소설리스트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942화 (932/1,404)

#942화 승자 없는 전장 (12)

양쪽 다 큰 피해를 낸 거점 공성전은 결국 패황 연합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는 유저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번 공성의 불이 꺼지기도 전에 이미 다음 공성에 대한 이야기가 게시판과 채팅창에 솔솔 피어나오기 시작했다.

- 와, 패황 연합이 이길 줄은 몰랐다.

- 그래도 아슬아슬했지.

- 솔직히 패황이 이긴 게 더 신기하다.

- 그냥 끝날 것 같진 않지?

- ㅇㅇ. 초월 애들 완전 이를 갈고 있던데?

- 지금 시장에 고강 아이템하고 강화석 싹 사들인다더라.

- 덕분에 가지고 있는 거 비싸게 팜.

- 나도. 가격 막 올려도 그냥 다 사감. 감사감사.

- 아, 아쉽다. 이럴 때 많이 팔아야 하는데.

이미 초월 연합에서 이어질 다음 공성을 위해 아이템들을 사들인다는 이야기는 비밀도 아니었다.

그냥 보는 눈만 있어도 바로 시장 흐름을 알 수 있으니까.

거기다 생성 간섭이 안 되는 위치에 새로 거점을 만들며 다음 전쟁을 준비한다는 걸 직접적으로 보여주기까지 했다.

당연히 이런 흐름은 패황과 혼령에게도 흘러 들어갔다.

<혼령> 들었나? 아무래도 쟤들 한판 더 할 거 같다.

<윈> 하, 설마 한 번 이기고 끝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혼령> 이렇게 바로 움직일 줄은 몰랐다. 덕분에 우리도 꽤 바빠졌어. 이쪽도 피해가 이만저만 아니니.

당연하겠지만 공성이라는 건.

양쪽 다 엄청난 자금을 쏟아부으면서 싸우는, 그야말로 끝도 없는 소모전이나 다름없었다.

전쟁을 하면서 드는 물약은 기본이고.

공성 장비와 NPC들의 고용,

장비의 파손이나 드랍에 따른 피해 비용 등.

돈이 들어갈 곳은 무궁무진하다.

그것뿐만 아니라 공성을 하면서 끌어들인 인력에 대한 수고 비용도 무시하지 못한다.

그냥 말 그대로 소모전이다.

양쪽 다 돈이 줄줄 흐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공성을 하는 건 한번 이기면 그 뒤로 들어오면 달콤한 열매가 있기 때문이었다.

거점 근처의 물류를 전부 장악할 수 있고.

세금을 걷을 수 있으며.

주변 사냥터의 소유권까지 생각해보면.

어떻게 봐도 남는 장사지.

물론 이겨서 안정시켰다는 전제하에서.

지금처럼 하루하루 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런 이득을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리고 공성이라는 게 워낙 돈이 많이 들어가다 보니 한 번 패하고 나면 당분간 공성 자금을 모으기 위해 어느 정도는 텀을 두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이 녀석들은 그런 텀이 전혀 없었다.

애초에 뒤에서 밀어주는 자금이 있으니 이런 것도 가능한 거겠지.

<혼령> 다시 공성이 가능한 시간이 풀리면 바로 들어올 모양이다.

<윈> 그래. 넌 꽤 고생하겠는데?

그때 나와의 말에서 뭔가를 파악한 듯 혼령이 다시 말을 꺼냈다.

<혼령> 설마 다음 공성은 안 할 생각이냐?

확실히 이놈.

눈치는 정말 좋단 말이야.

은근히 흘렸을 뿐인데 바로 내 의도를 눈치챘다.

<윈> 해줄 만큼은 해준 것 같아서. 목적도 어느 정도 달성했고. 너도 받을 만큼 받지 않았나?

패황 연합을 키워서 초월 연합과 치고받게 하는 원래의 목적은 이미 달성한 상태였다.

거기다 이 전쟁을 이용해 네임드들의 성장까지 이미 수준급으로 올려둔 상황이니.

또 얻은 것은 그 두 가지에 그치지 않았다.

바로 중간에 있는 거점 용아.

이걸 손가락 까딱하지 않고 통째로 먹었으니 내 쪽은 남아도 확실히 남는 장사지.

<혼령> 흠, 그렇게 말하면 나도 할 말은 없군. 하지만 네 세력이 없으면 우리가 밀릴 수도 있다.

<윈> 하, 엄살은 넣어 둬. 너네 쪽으로 지금 유저들이 더욱 모여들고 있잖아.

이건 그냥 빈말로 한 것이 아니었다.

두 연합의 싸움을 중간에 지켜보던 중립 세력들이 패황과 혼령 연합의 승리로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연합에 추가 가입 문의를 해오는 중이었다.

그것도 패황보다는 오히려 혼령 쪽에 더 많은 유저들이 몰렸다.

이번 전투들에 얼마나 혼령이 크게 돋보였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고.

이건 유저들이 패황보다 혼령을 더 선호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패황은 지금 꽤 골치가 아프겠군.

그렇다고 연합의 장악을 위해 혼령을 쳐낼 수도 없는 게, 혼령은 이미 패황이 건들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반대로 패황은 상대적으로 세력이 축소되었다고 느낄 정도겠지.

<혼령> 흠, 그렇긴 한데.

<윈> 이번에는 뒷문 내주지 말고. 어차피 수성하는 입장이라 성문만 안 내어주면 되는 거잖아.

시가지나 필드에서 붙지만 않으면.

실력이 좀 떨어지더라도 성벽과 수성 장비 등을 통해 충분히 전력을 극복할 수 있었다.

<혼령> 후, 말은 쉽게 하는군.

<윈> 어쨌든 우린 여기서 손 떼야 하거든. 진행하는 일도 밀려 있고.

<혼령> 할 수 없나.

혼령도 내가 말을 꺾지 않을 것이라 느꼈는지 더 이상의 재촉은 하지 않았다.

<혼령> 그럼 그 영웅 NPC들도 빠지는 건가?

<윈> 흐음, 아마도? 왜? 아쉬워?

<혼령>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이번에 발록, 뱀파이어 로드, 혹한의 얼음 여왕의 위력을 직접 봤으니.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솔직히 저들만 있어도 공성은 무조건 이길 테니.

<윈> 그건 일단 두고 보자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여기서는 약간의 여지만 남겨두면 돼.

<혼령> 그렇군. 알았다. 조만간 다시 연락하지.

절반의 성공을 거둔 혼령이 곧 연락을 끊자 옆에서 듣고 있던 재중이 형이 웃으면서 말했다.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봐.”

“아, 발록들요? 그 위력을 보면 뭐 포기 못 하겠죠.”

마주 웃어 보인 뒤 좀 전에 들어왔던 소식을 다시 물어보았다.

“아, 명궁하고 연하고 치고받았다면서요?”

“그래, 쉬쉬하고 있는데 중간에 어지간히 의견 통일이 안 된 모양이더군.”

이번엔 페가수스 연합에 명궁의 길드와 연의 길드가 모두 참가해 있었다.

연합의 이름만 페가수스지 실제적으로 명궁과 연이 투톱으로 연합을 이끌고 있었다.

그런데 둘이 중간에 의견 충돌이 상당했던 모양이었다.

재중이 형도 혀를 내둘렀다.

“명궁이 연의 멱살잡이를 했다더군. 주변에서 안 말렸으면 둘이 대판 싸울 뻔했어.”

“원래 사이가 안 좋았어요?”

“흐음, 그렇게 좋은 건 아니긴 하지만 싸울 정도는 또 아니지.”

“그럼 왜?”

“일단은 거점이 날아간 것부터랄까. 거기다 협곡을 넘는 추격조를 보내자는 것도 연이었고, 명궁은 안 된다고 반대했다가 결국 따라나섰는데 결과적으로 연의 실패작이었지.”

“명궁은 욕할 만하겠네요.”

“어, 거기다 연이 이번에 거점 패황의 비밀통로 침투 작전을 짰다던데.”

“아…… 그것도 망했죠.”

결과적으로 보면.

이번에 연이 짠 모든 작전들이 실패하거나 크게 손해를 봤다.

중간에서 명궁이나 다른 녀석들도 덩달아 엄청나게 피해를 본 상태고.

이러면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겠는데.

“연도 자존심이 좀 센 게 아니라서. 납득하기 힘드나 봐.”

“뭐, 네임드가 세 마리나 있었으니.”

연도 재수가 없는 게.

지금은 거점 용아인 거점 페가수스가 털린 것도 우리가 아니었으면 일어날 일이 아니었고.

거점 패황에서도 마찬가지.

무려 네임드 셋이 방어를 하는 곳을 아무 대비 없이 치고 들어갔으니 실패를 할 수밖에.

비밀 통로를 너무 맹신한 게 오히려 발목을 잡은 셈이었다.

“전신도 이번에는 커버를 못 해주는 모양이다.”

“으음, 전신 그 녀석도 피해가 적지 않을 테니까요.”

똑같이 피해를 본 상황에서 연의 편을 들었다간 무슨 역풍이 불지 모르니.

그렇다고 한쪽을 찍어 누르기에는 전신 입장에서도 쉽지 않은 일일 테다.

“너, 그래서 연을 보자고 하던 게 아니었어?”

“아, 아뇨. 뭐 적당히 좋은 상대라 생각해서 그랬는데 때마침 잘 됐네요.”

“큭, 이걸 운이 좋다 해야 할지.”

“그럼 우주의 기운이 모인다고 하죠, 뭐.”

솔직히 저렇게까지 싸울 줄은 몰랐지만.

아무튼 덕분에 일이 더 쉽게 될 것 같았다.

“어떻게 연결은 됐어요?”

“어렵진 않지. 사장님에게 부탁해 몇 번 건너 따로 연락 넣었거든.”

“좋네요, 그럼 끌지 말고 한 번 만나 보죠.”

“그래, 이번이 아니면 성사되기 힘든 물건이니.”

* * * * *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에 아무도 없는 산맥에서 연과의 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

눈에 띄면 안 되는 상황에선 최고의 자리랄까.

일단 우리 쪽은 나와 재중이 형, 그리고 레스가 자리했다.

반대로 연 쪽은 연과 휘하의 길드원 두 명이 함께했고.

먼저 연이 인상을 구기면서 말을 꺼냈다.

“……보자고 한 이유를 듣긴 했는데. 정말인가?”

슬쩍 재중이 형을 봤다가 고개를 끄덕이자 내가 먼저 말을 받았다.

“그래, 너도 혹하니까 이 자리에 나온 것 아냐?”

한 번 싸웠던 사이라서 그런지 딱히 존대를 하지는 않았다.

그래 봐야 서로 어색하기만 하지.

어차피 중요한 건 따로 있으니.

“왜 굳이 나인지 모르겠군.”

“너도 지금 성과가 필요하잖아.”

“흐음…….”

내 말에 연이 잠시 멈칫했다.

반응을 보니 대판 싸웠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네.

그리고 연합 내에서 연의 입지가 확 줄어들 것도 아마 맞을 것 같았다.

“그다지 긍정하고 싶은 사실은 아닌데.”

“그게 중요해?”

“……하긴 그렇군.”

“생각해 볼 시간은 충분히 줄 수 있지만 너무 기다리면 우린 다른 바이어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어.”

내 망설임 없는 당당한 말에 연의 눈썹이 잠시 움찔했다.

나름 저쪽에서 브레인으로 통하시는데 지금은 거의 외통수니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건 안 된다.

잠시 생각에 빠진 듯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연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버렸다.

“하하하하, 적들하고 손을 잡아야 하는 판국이라니. 미치겠군.”

“그래서 어째 마음에는 드시는가?”

“거절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왔지만…… 손쓸 수가 없군.”

이건 그냥 두 손 들었다는 표시였다.

“딱히 너한테도 나쁘진 않은 거래일 거야.”

“그래, 그리고 너에게도 그렇겠지.”

그 뒤 연과 몇 가지 협의를 본 다음 악수를 청했다.

연이 아니꼽다는 듯 손을 툭 치면서 거절하긴 했지만.

“중간에 어긋나면 재미없을 줄 알아.”

“아, 그러진 않을 거야. 우리도 돈이 필요해서.”

“장사꾼 같으니라고.”

“칭찬으로 듣겠어.”

지금 무슨 소리를 들으면 또 어떤가.

대어가 낚였는데.

여전히 싱글벙글 웃고 있는 날 보던 연이 한 마디 했다.

“그런데 그 녀석들은 대체 뭐지? 전신은 지금 어지간한 상위 네임드들도 홀로 상대할 수 있을 만큼 강한데. 그 발록이라는 녀석한테는 게임도 되지 않더군.”

그러더니 뭔가 생각나는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눈썹을 찡그리면서 내게 물었다.

“설마…… 그 녀석들 마왕은 아니겠지?”

“에이, 설마.”

내 대답에 연도 어이없다는 듯 말을 접었다.

“하긴, 마왕 정도 되는 녀석들이 고작 유저들 싸움에 뒤치다꺼리나 하진 않겠지. 그럼, 역시 영웅급 NPC들인가. 우리가 아무리 뒤져도 그런 NPC들은 없었는데. 대체 어디서 수급한 건지 모르겠군.”

“뭐, 영업 비밀이야. 너도 그런 것 하나둘은 가지고 있으니 말해 줄 수 없는 건 알겠지? 이를테면 지아라는 유저가 가지고 있던 영웅의 무구 같은 거 말이야.”

“……음.”

잠시 침묵하던 연이 확답을 원하는 듯 물었다.

“이번에 너희들은 참전하지 않는다는 것 확실한가?”

“어, 그래. 우린 이 전쟁에서 완전히 빠질 거다. 남은 건 너희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우리야 돈이 필요해서 잠시 끼어든 거니까.”

“……그럼 우리가.”

“아니, 이미 두둑하게 챙겨서. 우린 여기까지.”

“그런가. 알았다. 다음에 다른 일로 봤으면 좋겠군.”

“뭐 그러시던가.”

그러자 연이 자리를 일어나 그대로 길드원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완전히 떠난 걸 보자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던 레스에게 더없이 밝은 미소를 보여주며 말했다.

“거점 용아. 방금 팔렸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