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0화 불신의 연합 (12)
아라크네 로드의 깊고 어두운 숲속을 마치 내 집처럼 은신으로 숨어서 녀석들을 썰고 다닌 것도 잠시.
분주하게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던 내가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몇몇 녀석들은 안심을 했는지 다소 경계가 늦춰지긴 했다.
“갑자기 이놈 왜 안 나타나?”
“그러네. 좀 전까지만 해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고 나타나더니.”
“흠, 아마 이 녀석 마력이 다 했나 본데요?”
“확실히……!”
“그래, 은신으로 마지막 일격을 날리는 걸 보니 아마 힘과 민첩에 올인한 스타일 같은데……. 이렇게 오래 은신을 유지할 마력은 없을 거야.”
“그런데 네임드 템 중에 마력 꽤 높은 것들 있지 않아?”
“그래 봐야 악세 몇 개밖에 못 쓸걸? 그렇다고 로브를 입고 있던 것도 아니잖아. 마력이 높을 수가 없어.”
“으음, 그럼 마력을 채우고 다시 덤벼드는 것 아닐까?”
“설마. 이렇게 빨리 바닥난 마력은 못 채우지.”
“혹시 녀석이 마력 흡수 아이템을 가지고 있으면?”
“있긴 해도 그거 수치 얼마 안 될 걸? 옵션 높은 건 전부 통제 템이잖아.”
“아, 그렇지.”
“녀석이 어떻게 은신을 안 걸리고 쓰는진 몰라도 아무튼 레이드 끝나기 전엔 못 돌아올 거다.”
몇 녀석들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걸 옆에 유령보를 써서 지나가면서 듣게 되었다.
큭.
아니야.
그냥 지금은 나타날 필요가 없으니까 기다리는 건데.
오랜 시간 나타나지 않자 자기들끼리 이미 결론을 내려 버린 모양이었다.
솔직히.
내 스탯이 지금 정상은 아니라서 말이지.
테르타로스에 들어간 옵션 중에 근력, 민첩 만큼이나 지력과 마력이 상당히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이렇게 모든 스탯이 다 높은 경우는 애초에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지금 말하고 있는 유저들도 그것을 잘 알기에 저런 판단을 내린 거겠지.
마력이 부족해서 은신을 더 쓸 수 없다고.
하지만 실상은 마력이 넘쳐났다.
이대로 몇 분은 거뜬하게 은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지금 내 마력은 마법 계열의 광역기도 날릴 수 있는데 말이지.
그런 내 사정을 전혀 모르는 녀석들은 저런 오해를 할 법도 했다.
당연하게도 녀석들은 내가 자신들의 바로 옆에 서서 유유히 레이드를 구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테르타로스를 가져다 대기만 하면 목이 날아갈 녀석들이 천지인데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쉽네.
안타깝지만 지금은 이 녀석들이 목적이 아니었다.
바로 저 다 죽어가는 아라크네 로드의 목이 우선이지.
확실히 이 녀석들은 전에 아라크네 로드를 잡아 본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나라는 변수가 생겼음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레이드를 그대로 진행했다.
만약 처음 상대하거나 레이드에 미숙했다면 허둥대다가 타이밍을 놓치고 전멸했을 수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뭐 덕분에 내가 할 일이 대폭 줄어들어서 고마웠다.
괜히 레벨이라도 올라가면 혼자서는 저 아라크네 로드를 상대하긴 힘드니까.
그래서 일부러 이전처럼 녀석들을 흔들어만 놓고는 레이드를 지속할 수 있게 더 이상 건들지 않았다.
“자! 이제 마무리다!”
“하하, 얼른 끝내 버리죠.”
“안 그래도 은신하는 놈 때문에 찝찝했는데 빨리 돌아갑시다!”
“에이, 정체도 모르는 놈 때문에 이게 뭐람.”
“다시 나타나면 내가 죽여 줄게.”
“아서라. 녀석이 어딧는지 손도 못 대던 게 말은 잘해.”
“끙, 막말로 아예 안 보이는데 뭔 수로 잡냐.”
“그걸 해야 네가 랭커가 되는 거야.”
“미친. 그게 가능하면 내가 신이냐.”
“에이, 우리 길마는 잡을 수 있을걸? 아까도 위치 확인하고 화살 정확하게 날리던데.”
“그건 그렇네. 대체 어떻게 찾은 거지?”
레이드가 끝나간다고 생각해서 긴장이 많이 풀렸는지 이런저런 넋두리를 하면서 레이드를 진행하자 곧장 명궁에게서 일갈이 터져 나왔다.
“이 새끼들이! 모두 집중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은신한 녀석도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르니까 경계 늦추지 말고! 제대로 못 하는 새끼들은 제명시켜 버릴 테니까 똑바로 해!”
그러자 다소 느슨해져 있던 연합원들의 표정이 곧장 굳어지더니 다소 경직된 듯한 움직임으로 바뀌었다.
저 한마디에 겁을 먹은 건가?
아니라면 저렇게까지 표정과 행동이 바뀔 수는 없을 텐데.
이건 흡사 강제로 찍어 누르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고압적인 말투와 명령이었다.
흐음.
같이 하고 있는 길드들의 상하관계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고.
철저하게 수직적인 관계랄까.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그런 명령들이 잘 통하는 모습이었다.
완전히 연합원들을 장악한 거네.
이 녀석들이 구축해 놓은 연합이라는 게 어떤 느낌인지 지금 눈으로 보고는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전에 우리가 해 왔던 연합의 관계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뭐 다들 똑같으라는 법은 없으니 딱히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그런 녀석들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보니 레이드도 거의 끝을 향해 달려갔다.
쿠오오오!!
거의 죽음을 앞둔 아라크네 로드의 날선 비명.
재중이 형도 타이밍을 재고 있더니 바로 연락을 주었다.
<폰91> 준비해. 이제 타이밍이다.
<폰90> 네, 한 방에 끝낼게요.
그리고는 아라크네 로드를 포위하고 있는 유저들 뒤로 돌아가 아라크네 로드의 후방에서 테르타로스를 들어올렸다.
여기라면 방해를 받지 않겠지.
그렇게 모든 신경을 아라크네 로드의 뒷목을 향해 집중하고 있을 때.
갑자기 뭔가가 내 감각으로 거칠게 경고를 울려왔다.
응?
이건?
그리고는 급하게 발을 박차 뒤로 빠지면서 감각이 경고를 보내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쐐애액!!
화살?
지금 이 시점에?
일단 빠르게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저 화살이 나를 직접 공격하거나 하지는 못 했지만 화살의 종류를 보고는 아예 스킬을 써서 뒤로 더 몸을 빼내었다.
【 백스탭! 】
그러자 자세 제어가 되면서 몸이 뒤로 쭈욱 밀려나와 끈적끈적한 검은 기운을 내뿜는 화살을 완전히 피해 내었다.
아라크네 로드에게서 나온 네임드 보우였던가.
네임드조차 묶어 둘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행동제어 스킬을 동반한 무기.
그리고 저 방사형 화살은 근처에 스치기만 해도 아예 발이 묶여서 움직일 수도 없을 터.
몸을 완전히 빼내고서야 다시 기척을 완전히 죽였다.
명궁 저 녀석.
어떻게 내가 있는 곳을 정확히 알아낸 거지?
아라크네 로드를 공격하던 화살이 눈먼 화살이 되어 나를 공격했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았다.
일단 지금 내 위치는 아라크네 로드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현재 아라크네 로드 근처로 떨어지는 광역기들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막타를 날리기도 전에 은신이 눈먼 공격에 스쳐서 드러나는 일은 절대 금물이었다.
그렇다고 저 명궁이 눈먼 화살을 날렸다?
이건 프로게이머였던 저 녀석의 전적을 생각해 보면 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재중이 형만 봐도 일부러 노리지 않고서야 엄한 장소에 공격을 날리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
명궁이 그런 실수를 할 만큼 실력이 없는 건 절대 아니야.
다른 말로 지금은 확실히 날 노리고 화살을 쐈다고 보는 게 맞았다.
대체 어떻게 안 거지?
그리고 그걸 증명이나 하듯 두 번째 행동제어 화살이 또 내가 있는 장소를 향해 날아들었다.
큭.
이건 확실히 노린 거다.
그렇게 재빠르게 몸을 더 빼내어 위치를 바꾸자 잠시 녀석의 공격이 멈추었다.
응?
더 이상 공격을 하지 않아?
분명히 아까는 나를 죽일 듯이 바로 화살을 날려 댔는데…….
잠시 기다려도 화살이 날아오지 않자 계속 명궁의 상태를 살폈다.
명궁 역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게 날 노렸던 화살이 제대로 맞지 않아 기분이 퍽 상한 모양이었다.
흐음.
표정을 보니 확실하네.
곧장 재중이 형에게 연락을 넣었다.
<폰90> 형, 명궁 저 녀석이 절 향해 정확하게 화살을 날리는데요?
<폭91> 어, 나도 봤어. 잠시만.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재중이 형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폰91> 저 녀석. 아마 아라크네의 스킬과 유사한 스킬을 쓰는 모양이다.
<폰90> 스킬요?
<폰91> 아마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까 봤던 아라크네 로드의 검은 거미줄로 된 영역 알지?
<폰90> 아, 전에 그거요?
분명히 재중이 형이 설명해 주어서 잘 알고 있었다.
어둠의 숲 전반에 깔린 검은 거미줄을.
그것도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아주 얇고 흔적이 남지 않는 형태.
<폰91> 아마 네가 거리를 벌리자 범위가 되지 않아서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한 거야.
<폰90> 그럼 제가 다가서면 범위 안에 걸린다는 거네요.
<폰91> 어, 그렇지. 아마도 녀석의 스킬 랭크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은 범위가 굉장히 좁을 거다.
그래서였나.
아까 전에 멀리 벗어나 있을 때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지금은 보란 듯이 화살을 날린 게.
이건 은신을 파악하는 디텍트 에어리어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스킬이었다.
시전 유저를 중심으로 파장이 나오는 게 아니라 아예 유저를 중심으로 해서 전 범위에 거미줄과 같은 형태의 라인이 깔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런 식이라면 접근하기가 굉장히 어려운데…….
디텍트 하이딩 유저야 그냥 파장만 피해 버리면 된다지만.
당장 저 명궁 녀석이 어디론가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내가 들키지 않고 아라크네 로드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칫.
저런 기술까지 가지고 있다니.
이게 바로 네임드를 선점했을 때 가지는 이점이었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다른 네임드 스킬.
지금 내게 부족한 것도 바로 이런 스킬들의 부재에 있었고.
그렇다는 건.
결국 녀석 역시도 아라크네 로드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판단을 해야 했다.
<폰90> 허공 질주는 안 되겠죠?
<폰91> 은신 상태에서는 써도 괜찮겠지만. 한 번 드러나면 그다음이 없어.
<폰90> 그건 할 수 없겠네요.
차라리 텔레포트로 빠져나오면 빠져나왔지.
허공 질주는 들키면 안 된다.
그렇다는 건…….
어떻게든 몸으로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는 건데.
당장 저 스킬에 대한 파훼법을 고민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폰90> 얼마나 남았어요?
<폰91> 길어야 1분. 아니 이대로면 30초 안에 죽는다.
그 말을 듣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기회가 올지 몰라.
다음번에는 더 집요하게 방어 준비를 해올 테고.
그렇다는 건.
지금 무조건 아라크네 로드를 잡아 둘 필요가 있었다.
망설일 시간도 없네.
그리고 좌우로 주변을 살폈다.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게 없나?
가능하다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데.
하지만 처음 와보는 이 어두운 숲에서 뭔가를 바로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후.
생각해라.
딱 한 번이면 된다.
두 번은 필요도 없어.
그렇게 사방을 둘러보다 어느 순간 머리에 확 스쳐 지나가는 뭔가가 있었다.
흐음.
이게 가능하려나?
아니다.
지금은 판단할 시간도 아까워.
어차피 빠져나오는 건 텔레포트 반지로 한 번은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럼.
무조건 고지.
<폰90>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곧장 발을 박차고는 뛰었다.
그것도 정면이 아닌 옆으로.
<폰91> 응? 지금 뭐하는?
<폰90>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때워야죠.
아직은 저 명궁의 아라크네 로드 거미줄 스킬을 파훼할 순 없었다.
하지만 다른 방식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곧장 울창하게 솟아 있는 나무들 중 두 개의 나무들의 등을 번갈아 밟고 반동으로 치고 올라가면서 점점 위로 옮겨갔다.
그렇게 완전히 나무 위로 올라간 다음.
몸을 다시 박차 건너편의 다른 나무들로 몸을 옮겼다.
과연…….
이것도 녀석이 파악할 수 있을까?
곧장 시선을 내려 명궁을 바라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나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여전히 불만인 표정으로 주변만 살피고 있었다.
큭.
됐어.
이 싸움.
내가 이겼다.
명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