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1화 불신의 연합 (3)
곧 탱커 역시 다른 녀석들의 뒤를 따라 죽음의 빛으로 변해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거기다 갑옷 한쪽을 바닥에 남겨놓기까지.
알뜰하게 주고 가시네.
재중이 형도 피식 웃고는 갑옷을 주워서 인벤에 넣었다.
“생각 이상의 성과인데요?”
“그러네. 녀석이 바로 알아봐 준 덕분에 이쪽도 수고를 덜었어.”
이렇게 잘 될 줄이야.
너무 잘 풀리니까 오히려 불안감이 생길 정도였다.
“대본은 필요 없겠네요.”
“크큭, 그거 나름 열심히 짠 건데 말이지.”
사실 미리 준비한 대본 내용은 크게 어려울 게 없었다.
일단 녀석들을 보이는 족족 죽여 버린다.
그러면 당연히 경계가 심해질 테고.
그다음은.
경계를 서는 녀석들 주변으로 돌면서 마치 녀석들을 발견하지 못 한듯 우리가 말하는 내용을 몰래 들키는 딱 그런 그림을 만들려고 했는데…….
“초월인 척 흉내 내는 것도 굳이 할 필요가 없고요.”
“쓸데없는 수고를 덜어 주니 고맙지.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다 죽여야 했는데 말이야.”
만약 피해가 없으면 우리가 무슨 소리를 하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 터.
하지만 이미 몇 명이 우리 손에 죽은 이상은.
저쪽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팬텀 익스플로전을 쓰는 나와 재중이 형을.
심지어 은신 감지까지도 뚫고 돌아다니는 중이라.
녀석들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까다로운 상대일 것이다.
거기다.
아직 저들은 혹한의 얼음 여왕을 찾아내지도 못했다.
우리가 주변에서 저들을 사냥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말이고.
이래저래 곤란한 상황이겠지.
“지금쯤 비상이 걸렸겠죠?”
“그렇겠지. 일단 우리가 초월이 아니라고 의심을 할 순 있겠지만. 완전히 의심을 지우진 못해.”
“초월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거죠?”
“어, 팬텀 익스플로전을 쓸 수 있는 게 초월 쪽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래도 용의선상에서 범위가 확 좁혀지긴 하겠지. 그걸 가지고 있을 만한 녀석들로.”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 말을 멈췄다가 재중이 형이 다시 말을 이었다.
“보통 이렇게 되면 우리가 하나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가 있거든.”
“아, 연합 단위로 치러 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거죠?”
“저들이 보기에는 그렇겠지. 보여 준 건 나와 너 뿐이라지만. 절대 방심할 순 없는 상황이다. 착각이긴 해도 우리 뒤에는 초월이나 다른 길드가 있는 셈이라.”
그 말에 잠시 고민을 했다.
“형, 그럼 역시 대본을 써먹어야 할까요?”
“아무래도 그게 확실하겠지. 팬텀 익스플로전으로 의심을 주긴 했지만 확신은 아니니까. 녀석들끼리 물고 뜯게 만들려면 확실히 적을 만들어 줘야지.”
재중이 형 말대로 팬텀 익스플로전을 쓰는 길드가 여럿이라면 적의 범위가 너무 넓어져 버린다.
그러면 이쪽에서도 바로 반응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괜히 적이 아닌 길드들까지 건드려서 적으로 만들 순 없을 테니.
“몇 개 스킬이 더 있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건 그렇지. 초월 애들만 가지고 있는 스킬도 몇 가지 있거든. 절대 밖으로 내돌리지 않는 것들.”
“하, 그것만 있으면 빼박인데 아쉽네요.”
정체 모를 녀석이 초월 길드만 가지고 있을 스킬을 구사한다?
이건 뭐 더 이상 답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이상한 점이 생각나서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 녀석, 아까 바로 초월이라고 하던데요? 형 말대로라면 범위가 좀 넓어지진 않나요?”
“뭐, 그것까지는 모르겠는데?”
내 질문에 재중이 형이 잠시 고민을 하더니 답을 내놓았다.
“아마 이전에도 이미 서로 충돌이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아, 그렇겠네요.”
몇 번의 충돌이 있는 상태에서 지금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면 확실히 초월이라 바로 찍을 만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네임드 사냥을 방해한다는 건요.”
“뭐, 그건 좀 그래. 너무 급조한 작전이라 빈틈도 많으니까. 조금만 생각이 있는 녀석이라면 의심부터 하고 볼 거다.”
흐음.
저 말을 듣고 보니 대본이 너무 부실해 보이는데.
특히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초월 애들도 감지 능력이 있을 텐데 적들이 접근하는 걸 모르고 말을 흘린다는 건 이상하죠?”
“하긴 좀 그런가? 뻔히 보라는 듯이 말하는 건.”
그냥 평범하게 생각해 봐도.
저쪽의 전력보다 초월 길드원의 전력이 더 좋을 것이다.
실력이나 다른 아이템적인 면을 봐서도 모두.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그 탱커의 연합이 들이받았을지도.
이전에 그들의 말을 떠올려보면 왠지 조심스러운 분위기였다고 할까나.
쉽게 치고받을 만큼 쉬운 상대는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상대를 들이받으려면 이쪽도 정말 사활을 걸고 시작해야 한다.
당장 우리에게 뺨을 맞고 갔는데도 불구하고 별 다른 반응이 없는 걸 보면.
“아직도 결정을 못 내렸나 봐요.”
“확신이 없겠지. 전력도 문제고.”
역시 재중이 형도 같은 생각이었네.
“그럼 확신을 좀 심어 주러 가 보죠.”
그렇게 장소를 이동해 근처를 돌아다니자 이번에는 상당히 많은 숫자의 유저들이 모여서 이동 중이었다.
<노아01> 얼음 여왕을 포기 못 했나 봐요.
<노아02> 그래 보이네.
만약 얼음 여왕을 포기했다면 이미 이 자리를 떴을 것이다.
당장 전면전으로 갈 수 있는 상황까지는 피하고 싶을 테니까.
그리고 우리의 정체를 알아낼 시간도 필요했고.
하지만 저들은 얼음 여왕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 기회가 좋았다.
<노아01> 저들까지 녹이면 확실하겠네요.
<노아02> 그래. 숫자가 좀 많긴 해도. 저쪽 연합의 주력인 녀석들은 보이지 않아.
나 역시 사방으로 감지를 해 봤는데 저들 외에는 아무런 적도 근처에 느껴지지 않았다.
혹여나 로그아웃을 하고 있다가 다시 접속해서 포위를 하는 경우도 있긴 한데…….
그렇다고 보기에는 상당히 빠르게 장소를 이동하는 중이라서 아마 그건 어려울 것이다.
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또 모를까.
<노아01> 따라가죠.
이동하는 한 무리의 녀석들을 따라 뒤를 밟자 곧 녀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진짜 아무리 봐도 초월 애들이 우리 죽인 게 맞다니까? 정황상 그렇잖아.”
“확실하지 않은 걸로 애들 흔들지 마라. 아직 모른다.”
“야, 팬텀 익스플로전 썼다는 말 못 들었어? 그거 화랑 애들이 초월에 상납하는 스킬이잖아. 듣기로 몇 개 나오지도 않았다는데.”
“나도 알고는 있어. 그런데 그걸 누군가에게 팔았을 수도 있으니 일단 조심하자는 거지.”
“그 새끼들이 잘도 팔겠다, 네임드 최종 스킬을. 뒤에서 돈 다 대주는데 뭐가 부족해서.”
“그렇긴 한데…… 일단 부길마가 좀 알아보자고 하니까. 기다려 봐.”
부길마?
혹시 전에 그 메인 탱커 옆에서 말하던 사람이 부길마였던가.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면 이들의 행동에는 그 유저의 입김이 상당히 들어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 녀석은 너무 돌다리를 많이 두들겨서 문제야. 갈 때는 가야지. 들이받을 때는 확실하게 들이받고. 언제까지 우리가 초월 따까리 짓이나 해야 하는데?”
“큭, 나도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그래도 녀석들이 위에서 꽉 잡고 있으니 당장은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그래서 길마가 몰래 동맹들을 포섭 중이잖아. 한 번에 뒤집으려고.”
“쉿. 아까 길마 말 못 들었어? 당분간 조용히 있으라고.”
“알아, 알아. 하지만 대업을 앞두고 이렇게 갑자기 치고 들어오니까 그러지. 녀석들이 눈치 깠나 해서.”
“정말 조심해서 준비했다. 아직은 모를 거야.”
“그럼 오늘 쳐들어온 건 뭔데? 이거 초월이 완전히 선 넘은 거야.”
“그래, 그렇지만 아직은 초월이어도 참아야 할 판이다. 만약 그 녀석들이 아니라면 더 문제고. 또 다른 녀석들이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뜻이니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라니……. 그놈 은신 감지도 안 걸린다며? 무슨 특수 아이템 들고 있는 거 아냐?”
“나야 모르지.”
“거 봐. 초월 새끼들 맞다니까 그러네. 그 정도 아이템 들고 있을 만한 게 그놈들밖에 더 있나.”
“몇 곳이 더 있긴 하잖아. 괜히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일부러 노리고 들어왔을 수도 있다.”
녀석들의 마지막 그 말에는 솔직히 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노아01> 꽤 눈치가 빠른 녀석이 있네요.
<노아02> 쟤들도 머리가 없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아직은 넘겨짚는 수준이지. 가능성만 열어 두고.
<노아01> 그럼 확실히 좁혀 줘야겠어요.
확인해 보니 녀석들의 가운데 은신 감지 스킬을 쓰는 마법사가 존재했다.
이번에는 전과 다르게 이중으로 녀석을 보호 중이었다.
혹여라도 죽을까 꽁꽁 싸맸다고 할까.
<노아01> 아, 저기다 트리플 템페스트 같은 거 한 방 날려 주면 좋을 것 같은데.
혹한의 얼음 여왕에게서 얻은 스킬들 중 그 스킬이 가장 강했다.
일단 범위도 범위인데.
위력 역시 넘사벽이지.
아까 얼음 여왕이 쓰던 그만큼의 강도는 나오진 않겠지만 저 녀석들을 한 번에 녹여 버리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특히 이렇게 가깝게 접근했을 때는 더 그렇고.
은신한 상태에서 다가가 바로 앞에서 트리플 템페스트를 시전해 버리면?
안 봐도 뻔하다.
그냥 몰살.
<노아02> 뭐 그건 다음에 쓰기로 하고. 일단 하나씩 녹이자.
그렇게 녀석들의 뒤를 따라가면서 제일 후방에 있는 녀석의 목을 먼저 날려 버렸다.
앞에 가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은밀함과 함께.
서걱!
나와 재중이 형이 동시에 목을 날린 뒤.
다시 은신을 해서 사라졌고.
그렇게 몇 명의 목이 날아간 뒤에야 녀석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적이다!”
“그 녀석들이야!”
“잡아! 산 채로!”
우릴 잡겠다고?
<노아02> 잡아서 확인하려는 거겠지. 하이딩 페이스를 벗겨서.
재중이 형 말대로 은신이 풀리고 하이딩 페이스가 벗겨지면 아이디를 숨겼다고 해도 얼굴은 스샷으로 찍을 수 있었다.
그걸 상대 측의 인력 정보와 대조해 보면 어디 길드 녀석인지 정도는 금방 나오니까.
뭐.
그렇게는 당해 줄 수 없지.
곧장 나와 재중이 형이 은신으로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면서 녀석들의 목을 하나둘 날려갔다.
“뭐야? 이 새끼들은. 은신 감지에 안 걸려?!”
“디텍트 하이딩은 어떻게 된 거야?”
그러자 가운데서 보호받던 마법사가 얼굴을 확 일그러뜨리고 외쳤다.
“젠장. 방금도 썼는데 안 잡힌다고!”
“하나도 아니고 둘 다……?”
당연히 안 잡힐 수밖에.
디텍트 하이딩 유저의 파장이 흘러나올 때마다 내가 재중이 형에게 매번 경고를 해 주니까.
그럼 파훼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녀석들이 준비를 잘 해왔다고는 한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딱 보아하니 우리를 잡기 위한 조합을 준비한 모양인데.
방어가 강한 탱커에.
기습 한 방에 죽지 않도록 딜러들도 경갑이 아닌 중갑을 입은 검방 유저들로 모아 놔서 그런지 정말 방어가 단단했다.
거기다 속박 주문들을 쓰는 마법사들까지 안쪽에 보호를 하는 중이었고.
은신만 못 잡아낸다 뿐이지.
만약 한 번이라도 걸리면 빠져나오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확실히 한 방이 필요해.
여기서 시간을 더 끌면 분명히 지원이 올 것이다.
그것도 꽤 빠른 시간 내에.
그러다 재중이 형에게 물었다.
<노아01> 형, 혹시 얼음 여왕의 스킬도 초월에 있어요?
<노아02> 어, 있지. 최초로 잡은 게 그 녀석들이니까.
<노아01> 그럼 뭐. 고민할 필요도 없겠네요.
<노아02> 해버릴 거냐?
<노아01> 이대로 빠질 게 아니라면요.
<노아02> 오케이. 쓸어버려.
재중이 형의 허락이 떨어지자 바로 테르타로스의 세팅을 일부 변경했다.
그리고는 곧장 차징을 해서 녀석들이 단단히 모여 있는 장소에 스킬을 날렸다.
그것도 얼음 여왕의 최종 스킬을.
【 트리플 템페스트! 】
쌔애애애액!!
콰아아아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갑자기 연속으로 중첩해 돌아가는 세 개의 얼음 폭풍이 들이닥치자 녀석들의 표정이 아연실색했다.
그래.
내가 바로 살아 있는 증거다.
이대로 다 죽어 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