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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827화 (817/1,404)

#827화 왕이 사라진 사이 (4)

“잘 봤냐?”

“네, 뭐. 잘 치시던데요.”

“그냥 잘 치는 걸로 끝?”

“아, 우승 축하드려요.”

“이거, 이거, 반응이 너무 시들한데?”

“형이 우승할 것 같았거든요.”

“아니라니까. 이번에 애들 이를 갈고 나왔더라. 얼마나 피똥 싸며 싸웠구만.”

“그런 것에 비해 여유가 있던데요.”

“다 연기지, 연기. 지는 척 밀려 줘야 빈틈도 보여 주면서 치고 들어오잖아.”

“음, 마지막은 좀 힘들어 보이긴 했어요.”

“아, 전신 그놈은 확실히 좀 힘들지.”

재중이 형과 마지막까지 박빙이었던.

초월 길드의 전신.

솔직히 그 사람이 그렇게까지 강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몇 개월 전에 한 번 마지막으로 볼 때는 그냥 스쳐 지나간 정도라.

그리고 내가 했던 일은 포인트를 사들여서 이벤트를 이겼을 뿐이었다.

직접적으로 칼을 부딪힌 적은 없단 말이지.

만약 내가 싸웠어도 그 사람을 이길 수 있었을까.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재중이 형과 전신의 전투 장면을 떠올렸다.

한 치의 앞도 볼 수 없는 접전.

딱 한 번의 실수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살얼음판 속에서 결국 재중이 형의 숨겨둔 한 수가 전신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아마 이전에 싸웠으면.

전신이 상당히 버거웠으리라.

나 역시 재중이 형을 제대로 이긴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접속을 해 봐야 알 텐데…….

이미 재중이 형과 전신의 레벨은 내 마지막 레벨 대를 아득하게 넘어가 버렸다.

장비 역시 마찬가지.

그래서 장담은 못 한다.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확실히 이길 수 있을지는.

대회 사회자가 내 상황을 언급했을 때.

그리고 유저들이 내 이름을 연호했을 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때 기절한 그날 이후로.

VRS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정신은 괜찮다고 말한다.

하지만 VRS 시스템과 내 몸은 아니었다.

VRS에 눕자마자 바로 헛구역질이 나오고 머리가 새하얗게 멍해지면서 심한 어지럼증을 동반했다.

시스템 경고음도 미친 듯이 울려 댔고.

다시 쓰러져서 나오는 날 보고 당황한 유혜선 팀장의 시커멓게 죽은 표정을 하며 급하게 내게 달려오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시도를 해 봤지만.

마찬가지.

내 몸은 VRS를 거부한다.

아니면.

VRS 시스템 자체가.

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지.

어쨌거나.

아직은 불가능하다.

다시 저 세계로 돌아가는 것은.

싸울 수조차 없는데 누가 이기고 지고 하는 문제가 무슨 상관인가.

유혜선 팀장도 여러 번 실험을 해보다가 내 몸이 버티지 못하니까 결국 중간에 포기를 선언했다.

계속 했다가는 내 쪽의 신체 밸런스가 무너질 수 있다고 하니까.

그렇다고 유혜선 팀장이 아예 포기를 한 건 아니었다.

최대한 내 RTP와 차이가 덜 나는 재중이 형을 불러들여서 연구를 계속한다는 말을 듣긴 했다.

예전에 VRS를 개발할 때도 재중이 형이 상당히 도움을 줬다고 하던데.

아마 이번에도 그런 형식으로 재중이 형이 도움을 주는 것 같았다.

재중이 형은 딱히 내게 말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내가 신경 쓸까 봐 말을 안 하는 거겠지.

눈치채지 않도록 아무렇지도 않게 도와주는 걸 보면 고맙긴 하다.

유혜선 팀장도 딱히 티를 내진 말라고 했고.

이번에 대회 단체전에 신경을 쓰지 못한 것도 아마 그것 때문이겠지.

재중이 형이 전신에게 전략에서 밀린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재중이 형의 능력을 신뢰하기도 하고.

최강의 프로게이머라는 칭호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1:1 전투만큼이나.

다양한 전술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은 재중이 형이 아마 더 월등하리라.

그런 재중이 형이 있는데도 우리 쪽 길드들이 다 죽을 썼으니.

결론은 제대로 신경을 못 썼다고 볼 수밖에.

개인전이야 재중이 형의 개인 능력으로 어떻게든 하면 되니까.

미안한 마음이 가슴을 꾹꾹 찌르는 기분이네.

저렇게까지 해 주는데 못 돌아가면 어떻게 하나.

이런저런 생각들이 복잡하게 머릿속을 맴돌면서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아주 멍하게.

눈앞의 광경만 멍하니 바라봤다.

지글지글.

마블링이 자르르한 한우가 불판 위에서 구워지는 광경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그만큼 비싼 것만 빼면.

멍하니 한우가 선분홍빛을 잃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재중이 형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야, 뭐 하냐. 탄다, 타!”

“아, 타네요.”

“타네요? 이런 미친. 이 귀한 고기를 말이야.”

그러면서 재중이 형이 재빠르게 집게를 내게서 강탈해 본인이 고기를 뒤집기 시작했다.

“어우씨, 야들야들한 한우가 아니라 과자가 됐네.”

투덜거리면서 열심히 한우를 뒤집는 재중이 형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이 형도 참 한결같다니까.

그때 입안에 한우를 한가득 구겨 넣고 있던 종훈이 형이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거 좀 안 타게 잘 구워 봐요.”

당연히 그 말에 재중이 형이 빡친 표정으로 집게를 집어던지려고 했다.

“야! 네가 구워!”

“아, 전 먹기 바빠서요. 오늘은 몸만 오라면서요. 실컷 먹여준다고요. 굽는 것도 알아서 하신다더니…….”

“호오라, 내가 그랬던가? 흠, 마음이 바뀌었다. 방패전사는 여기서 아웃!”

“헉! 형님! 제가 굽겠습니다!”

재중이 형이 종훈이 형을 타박하자 곧장 종훈이 형이 바짝 엎드려 버렸다.

그러고는 집게를 들고 빛의 속도로 한우를 날라 불판 위에 굽기 시작했다.

“쳇, 50억이나 받으신 분이 쪼잔하게…….”

“뭐? 방금 내가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

“하하하하, 아닙니다. 당연히 제가 구워야죠. 한우도 사 주시는데 말입니다.”

결국 종훈이 형은 게임조차 걸어보지 못하고 한 번에 패배를 맞이했다.

뭐 물주가 재중이 형이니 당연한 일이려나.

“아, 그리고 처음부터 제가 구우려고 했다고요.”

“그래, 내가 네 마음 잘 안다.”

그런 둘의 투닥거림에 은하와 아라, 나르샤 누나가 모두 손을 가리고 웃어버렸다.

거기다 재중이 형 여자친구인 수정이 누나 역시도 이 자리에 같이 모였다.

이번 로스트 스카이 대회에서 재중이 형이 우승을 했으니 축하하는 자리로 모였으니까.

수정이 누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온화한 얼굴로 모두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음.

보이긴 저렇게 보여도 한 번 화나면 무섭지.

저 재중이 형이 꼼짝 못하는 걸 보면.

사장님은 갑자기 일이 생기셔서 참가하지 못하셨다.

한우라는 말에 꼭 온다고 하시더니.

그쪽은 아무래도 가정이 있으니까.

잘 놀고 가라는 말만 전해 주고 바로 가 버리셨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막내별.

우리 팀의 회복을 도맡아 하던 연지 누나 역시 지금 이 자리에 같이 와 있었다.

“종훈이 오빠는 어딜 가도 샌드백이네요. 누가 탱거 아니랄까 봐 극딜 당하시네.”

아주 대놓고 현란한 말솜씨로 종훈이 형을 두 번 죽여 버리자 종훈이 형이 곧장 우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 탱커 안 해!”

“에이, 오빠가 안 하면 누가 해요. 오빠가 최고의 탱커잖아요.”

“흠, 그건 그렇지!”

극딜 후에 바로 먹이를 주자 종훈이 형이 언제 그랬다는 듯 환하게 웃어 버렸다.

옆에서 나르샤 누나가 바로 한숨을 쉬었고.

“어휴, 이 단순한 머리로 어떻게 탱을 하는지 모르겠어.”

“누가 단순하다는 거야?”

“너 말이야, 너. 세상 단순한 바보.”

그러자 다시 시무룩한 표정으로 종훈이 형이 구석에 박혀버렸다.

“나르샤, 너무 종훈이 오빠 뭐라고 하지 마. 저렇게 바보 같아도 얼마나 귀엽니.”

그런 연지 누나의 말에 다시 종훈이 형이 땅을 파고 들어갔다.

저 형, 누가 좀 안 구해 주나?

어째 만나기만 하면 종훈이 형이 샌드백이 되는 기분인데.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도 연지 누나가 종훈이 형과 잘 어울렸다.

나르샤 누나야 원래 잘 아는 사이이긴 하니까 이상할 건 없지만.

빤히 연지 누나를 바라보자 연지 누나도 나를 마주 바라보았다.

“응? 왜? 뭐 부족해? 가져다줄까?”

“아, 아뇨. 괜찮아요.”

연지 누나의 나이는 나르샤 누나와 동갑이고, 은하와 아라에게는 언니였다.

나르샤 누나와는 동갑이다 보니 금방 친해진 듯하고.

거기다 성격이 생각과 완전 달랐다.

인게임에서는 그렇게 밝은 모습은 아니었는데 실제로 봤을 때 굉장히 활발한 느낌을 받았었다.

지금까지 근처에 없던 그런 성격의 캐릭터이기도 하고.

방송 역시 꽤 성격을 죽여 가면서 했던 것 같은데.

나중에 본인에게 왜 이렇게 성격이 다르냐고 물어보니까 돌아온 대답이 컨셉이라고 했던가.

차가운 도시의 여자…….

아무튼 뭐 그런 내용이었지.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을 했을 뿐.

딱히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본인도 불편해하지도 않았고.

당연히 성격이 좋아 우리와도 금방 친해졌었다.

심지어 예전에 아나운서도 했었다니까.

지금이야 BJ로 활동하는 거지만.

아마 그때 생긴 습관일지도.

“방송은 잘 돼가요?”

“응? 그냥 그랭. 요즘은 그렇게 조회수도 많이 안 나오고.”

“그런가요.”

그냥 특별한 뜻 없이 예의상 한 번 물어본 것이었다.

이런 게 아니면 지금은 딱히 연지 누나와 할 말은 없으니까.

그런데 그때 연지 누나가 아쉽다는 듯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하아, 우리 주호 없으니까 너무 심심하잖아. 예전처럼 막 신나는 일도 없고.”

“……아, 네.”

연지 누나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잠시 굳어 버렸다.

그때 나르샤 누나가 그런 연지 누나의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악! 아프잖아.”

하지만 나르샤 누나의 매서운 눈빛을 보더니 연지 누나가 푹 기가 죽었다.

“아, 나도 알아!”

그러더니 연지 누나가 날 보면서 미안한 가득한 얼굴로 사과했다.

“미안, 괜히 이야기 꺼내서.”

“아뇨, 괜찮아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으응, 그래도.”

“정말 괜찮아요. 그렇게 오래 쉴 것 같지도 않으니까.”

“응?”

내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아, 유혜선 팀장님이 마지막 조율 단계라고 알려 줬어요.”

연지 누나가 화들짝 놀라서 외쳤다.

“정말?”

“네, 뭐 조만간 가능할 것 같기도 해요.”

전사 형도 마찬가지.

“오, 드디어 복귀냐!”

“으음, 확실하지는 않아요. 적합한지 테스트를 좀 많이 해봐야 해서. 그래서 당분간 그쪽에서 살아야 할 것 같아요.”

수정이 누나도 나르샤 누나도 모두 축하한다는 말을 해주었다.

아라 역시도 좋은지 두 손을 흔들면서 좋아했고.

“와, 승호 오빠 돌아온다아!”

“하하……. 아직은 아니야.”

옆에서 듣던 은하는 순간 눈물이 나는지 눈가가 빨갛게 물들었다.

끙.

얘는 너무 잘 운다니까.

당연히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고.

남들보다 감수성이 풍부해서 그렇다고 들었는데 아마 그쪽이 맞을 것 같았다.

“정말 잘 됐어요, 오빠.”

“응.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거야.”

그동안 제일 가까이서 은하가 지켜봤으니.

유혜선 팀장이 말한 기간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또 아무도 몰랐고.

나중에는 서로 말을 꺼내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내가 불편할까 봐.

나중에 모두에게 고맙다는 말이라도 한 번 해야 하려나.

그런 그들에게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저 조만간 돌아갑니다!”

그래.

반드시.

돌아간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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