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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773화 (763/1,404)

#773화 지저 세계 (9)

마왕의 요청이라…….

솔직히 이렇게까지 일이 잘 풀릴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여기까지 오면서 머릿속으로 구상은 해 둔 상태였다.

분명히 아스티아가 마왕 벨라와 어떤 식으로든 인연이 있을 테니 그쪽에 기대보는 걸로.

그리고 정말 운이 좋다면…….

그렇다면 전투 없이 무혈입성도 가능하지 않을까.

뭐 마왕 벨라가 우리를 보자마자 공격을 해서 이 예상은 많이 빗나가긴 했지만.

설마 아스티아가 몇 백년 전의 마왕 벨라의 상관이라고까진 상상도 못 했지.

이후 마왕 벨라가 아스티아를 알아본 뒤로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며 퀘스트가 뜨길 기다렸는데, 이에 관련해서는 어떤 퀘스트도 뜨지 않았다.

응?

퀘스트가 뜨지 않는다고?

이건 정해진 수순이 아니었던가?

아스티아가 마왕 벨라를 만나서 일어나는 일련의 퀘스트가 생길 줄 알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퀘스트가 발생하지 않자 곧장 아스티아를 바라보았다.

잠시 마왕 벨라와 이야기를 나누던 아스티아가 내 시선에 나를 돌아보더니 물었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아뇨. 문제는 아니죠.”

아냐.

이건 문제다.

퀘스트가 뜨지 않는다는 건 지금 이 상황이 원래 정해진 각본에도 없는 방향이라는 건데…….

혹은 아직 준비가 덜 됐거나.

그게 아니라면.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어쩌면 지금 만나면 안 되는 인물들이 만나서 문제가 생긴 것일 수도 있고.

뭐가 잘못됐지?

분명히 내가 마왕 벨라와 만나면서 진명을 듣고는 퀘스트가 뜨기는 했었다.

으음…….

여기서 뭐가 부족한 거지?

뭘 놓치고 있는 거야?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없나.

아스티아, 마왕 벨라.

그리고 흉물스럽게 시체들을 쌓아두고 있는 성벽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스티아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제가 일을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응?”

내 요청에 잠시 나를 또렷하게 바라보던 아스티아가 곧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마음대로 해. 어차피 그러려고 했으니까.”

오케이.

그렇게 내가 중간에 끼어들자 마왕 벨라가 다소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와 아스티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째서?”

“흐음, 맡겨도 돼. 얘가 꽤 일은 잘하거든.”

호오.

아스티아가 이럴 때 다 도움을 주네.

그런 아스티아의 지원 사격을 듬뿍 등에 받아 마왕 벨라에게 말을 걸었다.

“주호라고 합니다.”

그러자 마왕 벨라가 다시 한 번 빤히 바라보고는 위아래로 나를 쭉 살폈다.

마치 검색이라도 하듯.

그리고 나온 날카로운 한 마디.

“넌 너무 약하네.”

끙.

이 여자가 뼈 때리네.

그래.

지금은 어떻게 해도 마왕보다는 약하겠지.

아마 NPC들은 대략 눈으로 보기만 해도 유저들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마왕이라면 더 그렇고.

레벨로 치면 절반이나 되려나?

그런 마왕 벨라의 품평에 아스타아가 피식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마치 나를 지원하듯.

딱 알맞은 형태로.

“얘, 이런 상태로 내 공격을 막는다니까?”

“무슨?!”

“그것도 몇 번이나. 놀랍지?”

아스티아의 던지듯 꺼낸 말에 마왕 벨라의 눈이 크게 커졌다.

흐음.

이게 무슨 놀랄 일이라고 그렇게 놀라나.

아스티아의 그 어마무시한 공격을 막아 가면서 얼마나 연습했는데.

가끔 정말 죽는가 싶을 때도 있었지만.

“말도 안 됩니다. 한 방에 죽을 정도로 약한…….”

“아냐, 이젠 진짜 마음먹고 패도 절대 안 죽어.”

“…….”

어이없음.

당황.

딱 그런 표정이 드러나는 마왕 벨라의 모습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마왕 벨라가 생각하기에 내가 정말 약한 부하 정도로만 여겨졌던 것 같네.

딱히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겉으로 보기에 약한 것은 사실이라.

그런데 따지고 보면 마왕 벨라의 공격도 한 번 막긴 막았었다.

본인은 전혀 모르겠지만.

《 마왕 벨라와의 친밀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

응?

친밀도가 올라?

설마 이 마왕.

강하고 약하고가 평가의 대상이었던 건가?

그렇다면 방금의 아스티아의 지원은 내게 정말로 큰 도움이 된 셈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마왕 벨라가 당황하는 순간이 내겐 기회였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고 어수선한 지금이.

거기다 친밀도가 올라가기도 했으니까.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셨죠?”

“응? 그렇긴 하지만…….”

“그럼 정말 잘 찾아오셨습니다. 마침 제가 그 도움을 드릴 수도 있을 것 같네요.”

“네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거지?”

됐어.

아스티아의 도움으로 일단 마왕 벨라와 같은 선상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옆에 서 있는 날 아예 무시하는 상황은 지나갔으니.

마왕 벨라의 말에 잠시 멀리 있는 마왕성을 쳐다보았다.

내 고개가 돌아가니 자연스럽게 마왕 벨라의 시선도 그쪽으로 돌아갔고.

아무리 봐도 어떤 돌발 상황이든 마왕 벨라가 무조건 직접 나서야 하는 지금의 모습이 정상적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그런 마왕 벨라의 약한 점을 살살 긁으면…….

“혹시 병력이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마왕 벨라가 아스티아에게 손을 내민 것은 아마도 이런 측면이 있지 않을까.

지금 당장 도움을 줄 수 있는 즉시 전력.

물론 내 쪽에서 그런 전력을 바로 내어주기란 불가능했다.

아스티아가 직접 나서지 않는다면.

하지만 이쪽에는 쓰지 않은 패가 꽤 많이 남아 있거든.

아픈 곳을 살짝 긁자 마왕 벨라의 표정이 바로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이런.

너무 한 번에 긁어 버렸나.

여기서는 한 번 순화시킬 필요가 있어.

“아, 저 마왕성은 꽤 크죠. 제가 본 어떤 마왕성보다도 멋진 곳이기도 합니다.”

내 칭찬에 못 미더워하는 척하면서도 마왕 벨라의 표정이 살짝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흠흠, 그래서?”

《 마왕 벨라와의 친밀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

크.

표정은 전혀 아닌 척하면서 좋아하는데?

이건 시스템 메시지로도 확실히 확인되었다.

그럼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이렇게 좋은 마왕성이 관리가 된다면 얼마나 더 멋진 마왕성으로 변모하겠습니까.”

“흠흠, 그건 그래.”

《 마왕 벨라와의 친밀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

이거.

너무 난이도가 낮은 것 아냐?

아니다.

난이도가 낮다기보다는 이미 아스티아가 쌓아 준 친밀도가 바탕이 되었기에 이렇게 마왕 벨라와 대화가 가능한 셈이었다.

만약 그냥 얼토당토않은 녀석이 이런 이야기를 했으면 그냥 그 자리에서 전기 통닭구이가 됐을 터.

처음에 마왕 벨라가 날 보고 너무 약하다고 하는 것만 봐도.

아마 조금만 약했더라면 그냥 무시했을 테니.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 마왕 벨라의 상황이었다.

솔직히 마왕성만 보면 봐줄 만한 게 하나도 없어.

거점으로써의 역할?

그건 우리에게나 중요한 거고.

마왕 벨라에게 그런 게 필요할까?

저 정도로 강한 NPC가 굳이 힘들게 마왕성을 지켜가면서?

하루 종일 경계를 서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저 마왕 벨라는 이 마왕성을 혼자 지키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지금 물어봐도 전혀 대답해 주지도 않을 테고.

오히려 역정을 내면서 공격을 하지 않으면 다행.

그럼 그냥 역으로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이 마왕성은 마왕 벨라에게 지켜야 하는 장소이니까.

그런 성향에 맞춰서 내가 움직여야 해.

“성벽을 유지 보수할 인원도요. 그리고 성벽에 있는 저 많은 시체들을 치워 버리면 좀 더 볼만하지 않겠습니까.”

“흐응?!”

《 마왕 벨라와의 친밀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

“이왕이면 마왕성 주변을 감시할 만한 하수인들도 좀 있는 편이 좋겠죠.”

“그건 그래.”

《 마왕 벨라와의 친밀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

“그리고…….”

《 마왕 벨라와의 친밀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

솔직히 입으로 약속할 수 있는 말은 굉장히 많았다.

마왕 벨라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 위한 점도 있긴 하지만.

이건…….

전부 내게 필요한 일이야.

이대로 저 마왕성에 들어간다고 해도 잠잘 수 있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진 않을 것 같으니.

마왕성이 저 모양이 된 건 내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당장 어떻게든 써먹을 장소가 되는 게 더 중요하지.

그럼 이 마왕성의 주인을 최대한 구슬리고 달래야 하는 게 나의 일이었다.

아스티아도 이런 건 해 줄 수 없으니까.

한참 동안 내 말을 들으면서 혹한 표정을 짓던 마왕 벨라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는지 다시 엄중한 얼굴로 돌아왔다.

달콤한 잠에 빠졌다가 다시 깨어난 듯한, 딱 그런 표정으로.

“흐음. 정말 네가 그걸 다 해줄 수 있다는 거야?”

마왕 벨라도 나의 필요성을 알게 된 거려나?

내가 이 정도로 당신을 지원해 줄 수 있다라는 걸 계속 이야기해 놨으니.

“가능합니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마왕 벨라께서 절 좀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러자 마왕 벨라가 아스티아를 곧장 쳐다보았다.

아스티아는 웃는 표정으로 마왕 벨라에게 답을 주었고.

그래.

저 표정은 그냥 믿고 맡기라잖아.

자.

답정너라고.

넌 대답만 하면 돼.

잠시 고민을 하던 마왕 벨라가 곧 결심했는지 내게 말을 꺼냈다.

“흐음. 좋아. 한번 해봐.”

그런데 그때.

내 머리 위로 뜻하지 않게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마왕 벨라가 베르테니아 마왕성의 집사로 교황 『주호』 를 제안합니다. 허락하시겠습니까? 》

순간 시스템 메시지를 보고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이렇게까지 원한 건 아니었긴 한데…….

이봐.

나 나름 밖에서는 교황이라고.

신성을 대표하는 교황이 마왕성의 집사를 하라니.

어이없는 상황이었지만 내 손은 이미 YES에 올려져 있었다.

까짓 교황이 마왕성 집사 좀 하면 어떠냐.

다 서로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일인데.

《 교황 『주호』 가 베르테니아 마왕성의 집사직을 선택했습니다. 》

YES를 선택하자마자 내 시스템 상태에는 무려 세 가지 직업이 동시에 찍혀 나왔다.

가르시아 제국 공작.

제넨샤 신성 제국 교황.

베르테니아 마왕성 집사.

남들은 하나 가지기도 힘든 자리를 무려 세 개나 가지게 되었다.

얼렁뚱땅 마왕성의 집사로 취직하게 된 다음 곧장 마왕성의 시스템을 살펴보았다.

흐음.

아스티아의 말대로라면…….

분명히 있을 텐데.

아무 생각 없이 마왕성의 집사 자리를 덥석 받은 건 아니었다.

어디 있냐.

반드시 있어야 해.

약속해 놓은 걸 전부 현실로 만들려면.

아니라면 마왕 벨라와 칼부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뭐 당장은 아니라도 분명히 그렇게 되겠지.

그리고 마왕성의 시스템에서 뭔가를 찾은 순간.

기쁜 마음에 주먹을 꽉 쥐었다.

좋아.

이건 있고.

그럼 다음은…….

곧장 마왕성의 시스템 옆에 신성 제국 제넨샤의 시스템을 동시에 올려놓았다.

큭.

이 시스템을 왜 만들어 놨나 했는데 말이지.

동시에 두 개의 성을 내가 설정할 수 있게 됨으로써 얻은 최대의 이득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원하던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에 올라왔다.

《 신성 제국 제넨샤 성과 베르테니아 마왕성의 포탈을 연결하시겠습니까? 》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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