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695화 (685/1,404)

#695화 만들어진 그림 속에서 (1)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신성 제국의 NPC들.

그리고 그 사이로 모습을 보이는 유저들까지.

모두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 포위하는 모습을 보고는 두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형, 이거 아무래도…….”

재중이 형 역시 주변을 바라보면서 표정을 굳혔다.

“어, 함정이다.”

대체 어떻게……?

우리가 여기 다시 나타날 거라는 건 우리 외에는 전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이건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그렇다고 재중이 형이 저들에게 말해 주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았다.

그건 애초에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니까.

재중이 형이 상황이 너무 좋지 않자 잠시 한숨을 쉰 뒤 우리의 정면에 나선 올렌드 추기경에게 말했다.

“죽을 자리라……. 누가 죽을지는 해봐야 알겠지.”

그러면서 곧장 내게 귓속말을 했다.

저쪽에서는 눈치채지 못하게끔 시선은 정면에 둔 채로.

<불멸> 길을 열어 줄 테니, 먼저 빠져나가.

<주호> 형은요?

<불멸> 이 포위망을 둘 다 무사히 빠져나가는 건 무리다.

지금 그렇게 말할 정도로 상황이 굉장히 나빴다.

적들은 수도 없이 많은데 이쪽은 둘뿐.

심지어 포위까지 당한 상황이라 뭔가를 해보기도 전에 당할 위험도 있었고.

그런 재중이 형의 말에 올렌드 추기경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 버렸다.

“배짱이 좋으시군요. 하지만 여기서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저건 이미 작정을 한 듯한 말투였다.

반드시 우리를 여기서 죽이겠다는.

하지만 너무 이상한데?

NPC가 유저들의 목숨에 그렇게까지 연연할 필요가 있나?

어차피 저들에게 유저는 죽으면 다시 살아나는 존재.

이런 일은 퀘스트가 동반되지 않으면 크게 의미도 없는 일이된다.

그렇다는 말은…….

“형, 이거 저 올렌드 추기경의 작품이 아니에요.”

“그렇겠지. 저기 뒤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는 놈이 있잖아.”

그러면서 재중이 형이 올렌드 추기경이 아닌 후방에서 자리 잡고 있는 한 유저를 가리켰다.

연이라고 했던가?

진회색의 머리.

무뚝뚝해 보이는 인상.

분명히 그때 우리를 분석하는 것 같은 멘트를 잔뜩 날리고 퇴장한 유저였다.

우리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할 수 없다는 듯 연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주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저놈, 우리를 다 잡아 놓은 물고기쯤으로 생각하는 건가?

보통은 방심을 하지 않는 게 맞겠지만.

지금은 저렇게 해도 충분히 이해가 될 만큼 상황이 나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떻게 지금 이 자리가 마음에 드십니까?”

연이 재중이 형에게 인사를 하자, 재중이 형이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생각보다 머리를 많이 쓴 모양인데?”

“당신을 상대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겠죠.”

“우리가 여기로 돌아올 거라는 것도 다 예상했나?”

“역시 잘 아시는군요.”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대규모의 병력을 바로 배치할 순 없었을 테니까.”

“네, 맞습니다. 처음부터 노리고 있었죠.”

“처음부터라……. 어디서부터 장난을 친 거지?”

“으음, 생각해 보면 조금 엇나가긴 했습니다만. 사실 당신이 이렇게 빨리 신성 제국으로 올 줄은 우리도 상상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 드워프 왕과 노느라고 좀 더 시간이 걸릴 거라 예상했었거든요. 암흑 지대를 그렇게 빨리 통과하는 것까지도.”

연의 말대로 우리가 급하게 고대 드워프 왕과의 일을 처리하고 넘어오기는 했었다.

거기다 암흑 지대를 건너오는 과정 역시 한 번에 패스해 버렸고.

좀 더 오래 시간을 끌었으면 저들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흘러갔을 텐데. 지금 그렇게 되지 않아서 연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가 너무 빨리 넘어와서 일이 엉망이 되었다?”

“네, 뭐 그렇군요. 나머지 봉인을 다 풀 때까지는 시간이 좀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말입니다. 덕분에 중간부터 계획을 전부 수정한다고 정말 고생했습니다.”

“처음에 추기경이 문을 열어 주지 않은 것도?”

“하하, 그땐 꽤 당황했거든요. 추기경 쪽이나 이쪽이나 모두. 시간을 벌 셈이었는데…….”

“베히모스를 잡아 버렸다?”

재중이 형의 그 말에 연이 진짜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정말 놀랐습니다. 이쪽의 판단으로는 지금은 절대 못 잡는 녀석으로 분류가 되었거든요.”

“이미 한 번 싸워 본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큭, 된통 당했었죠. 월드 네임드가 괜히 월드 네임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준비를 꽤 한 상태로 봉인을 풀었는데 말이죠.”

아마 저들은 처음엔 베히모스를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해서 봉인을 풀었을지도 모르겠다.

마검을 얻는 동시에 베히모스까지 잡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

그야말로 최상의 보상을 얻는 셈이니까.

“베히모스, 강하지. 당장 어찌할 수 없을 만큼.”

“네, 그러니까요. 설마 그 베히모스를 단독으로 잡아 버릴 줄은…….”

그러면서 연이 질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건 연의 주변에 있는 다른 프로게이머들도 다르지 않았다.

하나같이 같은 딱 그런 표정.

“덕분에 일이 다 꼬였죠. 추가 봉인을 풀러 가지도 못하고요. 성녀는 계속 우리를 방해하질 않나. 죽이고 싶은데 죽이는 것도 안 되고.”

그러면서 연이 추기경을 바라봤다.

“추기경이 손을 쓰기에는 너무 시간이 촉박했죠. 그래서 당신들을 초대하려고 했는데…….”

재중이 형이 듣고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우리를 죽일 함정을 파려고?”

“음, 정확하게는 성녀 쪽이었습니다만. 분명히 당신들을 보려고 성녀가 움직였을 테니.”

연의 말대로 베히모스를 잡자마자 성녀가 우리들과 접촉을 시도했었다.

“그런데 그것도 이미 늦었더군요. 설마 성녀 쪽에서 먼저 당신들을 찾아갈 줄은…….”

아마 저들끼리 계획해 놓은 모든 것들이 우리가 베히모스를 잡으면서 엉켜 버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연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마지막 기회가 오더군요. 점검 덕분에 베히모스가 다시 나와서 성녀의 발을 묶을 줄이야.”

“덕분에 봉인을 풀러 갈 수 있게 됐고?”

“그렇습니다. 견제를 하던 병력들이 다 빠지면 봉인을 푸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죠. 올렌드 추기경이 지키고 있던 봉인처럼.”

“이미 봉인을 푼 건가?”

“보시다시피. 이미 연락이 가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재중이 형과 내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

챠밍에게 연락이 왔다가 끊긴 게 그것 때문이었나?

동쪽이라면 히드라가 봉인되어 있을 텐데.

저 녀석의 말이 맞다면 다른 일행은 지금 봉인이 풀린 히드라와 싸우고 있을 확률이 아주 높았다.

분명히 함정이라고 했었으니.

재중이 형이 연에게 다시 물었다.

“어떻게 동쪽으로 갈 거라고 예상한 거지?”

“으음, 이건 좀 어려운 문제군요. 당신처럼 생각이 깊은 사람의 예상 경로를 읽어 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중, 삼중으로 생각을 읽어야 하니까요.”

연이 뿌듯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분명 당신이라면 베히모스가 성녀의 발을 묶어 두는 사이 봉인을 풀러 간다고 예상을 했을 겁니다. 둘 중에 한 곳만 노리거나 둘 다 노리거나. 보통 이러면 똑같이 나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말을 잠시 멈춘 연이 나를 다시 바라봤다.

“저 소년이라면. 할 수 있는 게 상당히 많더군요. 그래서 겉으로 알려진 이전 행적들을 전부 훑었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상대방을 엿 먹이는지도요.”

“주호의 행적이라……. 그것까지 노린 거였나?”

“네, 반드시. 높은 확률로 베히모스를 한쪽에 떨어뜨려놓고 반대편을 노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저 소년이 자주 하던 방법대로요.”

그 말을 듣자마자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연을 바라봤다.

그렇게까지 연구를 했다고?

나를?

마치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미리 다 읽은 것처럼 작전을 짜왔다.

재중이 형이 다시 물었다.

“만약 반대로 갔다면? 네 계획은 전부 엉망이 됐을 텐데?”

“아, 그건…… 당연히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가르가와 히드라. 당신들이라면 반드시 히드라를 노릴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공중 네임드와 지상 네임드. 답은 딱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아직 확인을 못한 네임드라면 더욱더.”

“아주 이쪽 패를 다 들여다봤네.”

“조사를 많이 한 덕분이죠.”

“우리가 신성 제국으로 돌아오는 것까지 전부 예상한 건가?”

“생각보다 너무 지켜보던 유저들을 물로 보신 것 같습니다만. 목격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주 장소를 이동하시더군요. 그 페가수스라는 탈것을 타고요.”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여기로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텐데?”

“아닙니다. 당신들은 반드시 여기로 왔어야 했죠. 동쪽과 가장 가까운 장소로요. 당신에게 있어 여기로 와야 최단의 이동 경로가 될 테니까요.”

그 말을 듣고는 바로 소름이 돋았다.

전에 재중이 형이 저 연이라는 사람이 분석을 엄청나게 하는 타입이라고 했는데 지금 확인해 보니 그 말이 절대 틀리지 않았다.

나나 재중이 형의 그간의 행적, 성격, 스타일 등.

그거에 따라 우리가 할 만한 행동들을 전부 예상해서 그에 맞는 최적의 파훼법을 들고 나온 것이다.

얼마나 조사를 많이 했으면 저렇게까지 할 수 있는지 놀랍기만 하네.

아무나 쉽게 따라할 만한 일은 절대 아니었다.

모든 내용을 들은 재중이 형이 곧장 혀를 찼다.

“이거 참, 한 방 먹었는데?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당신을 이기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합니다. 솔직히 이걸로도 불안한 느낌이라. 준비를 많이 했습니다만.”

그러면서 연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신성 제국의 NPC들.

오직 나와 재중이 형을 잡기 위해 준비된 병력들이었다.

“잘도 이 많은 병력들을 들키지 않고 숨겨놨네.”

“처음부터 지하에 숨어 있었죠.”

“하, 그랬나. 그런데 굳이 우릴 죽여 봐야 얻는 것도 없을 텐데? 어차피 죽어도 살아나.”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저 소년은 상황이 좀 많이 다를 겁니다.”

그러면서 연이 나를 가리켰다.

“저 소년은 정말 위험합니다.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그러니까…… 여기서 한 번쯤은 저 소년을 멈춰 세우겠습니다.”

이건 설마.

르아 카르테를?

“다른 서버에서 르아 카르테를 가진 모든 유저들을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공통점을 하나 발견했죠. 죽으면 르아 카르테가 증발한다는 점을요.”

“정말 철저히 조사했네.”

저건 놀랄 정도로 나만을 표적으로 삼아 조사를 한 셈이었다.

“그리고 베히모스를 잡아낼 정도의 엄청난 위력은…… 저 르아 카르테에 있겠죠. 다른 말로 저 소년이 죽는다면 그 원동력이 사라지는 셈입니다.”

“처음부터 주호 하나만을 노른 거였나?”

그 말에 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자리서 전부 죽더라도. 저 소년만은 반드시 죽일 겁니다.”

연이 말을 끝내자 연의 길드인 영혼 길드가 신성 제국의 NPC들 사이로 전부 모습을 드러냈다.

“하, 이것들 봐라. 아주 막 나가네.”

그러면서 재중이 형이 내 앞을 막고 섰다.

<불멸> 말하면서 시간을 좀 벌려고 했는데 더 이상은 무리다.

우리 팀이나 원정대 사람들이 돌아올 때까지 버티려고 했는데 아마 저쪽 역시 지금 거센 저항을 받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결국 여기는 우리가 자력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는 말이었고.

<주호> 어떻게 해요?

<불멸> 계획대로. 넌 살아남는 것만 집중해라.

우리와 연의 대화가 끝나자 점점 신성 제국의 NPC들의 포위망이 가깝게 좁혀져 왔다.

연의 영혼 길드 역시 사이로 포진해 있었고.

그나마 다른 프로 팀들의 길드가 없어서 다행인 건가?

만약 두세 개의 길드가 더 추가됐었다면 거의 포기할 만한 상황이 나왔을 것이다.

그때 챠밍에게서 다시 연락이 들어왔다.

<챠밍> 오빠, 여기 발이 묶였어요.

<주호> 역시 그런가?

<챠밍> 알아요?

<주호> 여기 누가 친절히 다 알려 줬거든. 역시 히드라야?

<챠밍> 네. 앞은 히드라가, 뒤에는 프로 팀들이 막고 있어요. 포위하는 NPC들도 너무 많아요.

저쪽도 만만찮네.

아마 이번 기회에 우리 쪽 병력을 전부 몰살시킬 생각인 것 같았다.

올렌드 추기경이 보유한 신성 제국의 병력을 빌어.

반대로 성녀의 병력은 너무 적은 것도 문제였고.

오히려 이건 우리 쪽에서 저쪽을 도와줘야 할 판인가.

하, 이건 진짜 안 쓸려고 했는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갑자기 내가 움직이자 상대측도 모두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뭔가 할 거라고 놀란 건가?

내가 꺼낸 아이템은 단 하나였다.

『 고대 마수의 심장. 』

베히모스를 잡고 나온.

고대 마수의 심장.

이게 뭔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쓸 수밖에 없었다.

“휴, 그래. 너희들이 죽든, 우리가 죽든 한번 해보자.”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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