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6화 왕의 시험 (1)
한참 전투를 치르고 와서 그런지 재중이 형의 눈빛이 사뭇 달라 보였다.
거친 전투를 갈망하는 것 같은.
딱 그런 투사의 눈빛.
요즘은 다른 유저들과 싸울 일이 잘 없어서 그런지 잊고 있었지만.
저 형.
싸우는 거 엄청 좋아했었지.
예전에 1서버에 넘어올 때 당시에도 재중이 형은 길드 쟁을 한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학살의 미로에서 그 본능이 다시 살아났던 모양이고.
그런 눈빛으로 최하층을 쭉 둘러본 재중이 형이 곧 나를 발견하고는 씨익 웃어 보였다.
아마도 저건 안도하는 그런 표정이려나.
“하, 난 빨리 넘어온다고 개고생하면서 넘어왔는데 생각보다 멀쩡하네. 왠지 헛수고를 한 것 같다?”
그 말에 나 역시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의외로 싸울 일이 없더라고요. 초월 길드가 붙으려고만 하면 도망가던데요.”
그러면서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는 초월 길드를 떠올렸다.
정말 제대로 싸울 일은 처음에 포위를 당했을 때 말고는 거의 없었다.
그 이후로는 초월 길드 유저들이 계속 날 피해 다녔으니까.
대놓고 붙으려고 해도 일부러 싸움을 피하는데 방법이 없지.
초월 길드라는 말에 재중이 형이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더니 실망한 것 같은 한마디를 했다.
“이거 참, 알맹이가 빠지고 없잖아? 걔들 다 어디 갔어?”
“바로 내빼던데요?”
“쩝, 난 지금 전투력 쫙 올라왔다고. 이러면 안 되지.”
재중이 형도 초월 길드와 붙는 것을 기대했는지 실망 가득한 한숨을 쉬었다.
“다음에 기회가 있겠죠.”
“뭐, 그런가? 그럼 남은 떨거지나 정리하면서 놀아 볼까나.”
재중이 형의 떨거지라는 말에 해원의 표정이 팍 상해서 구겨졌다.
“큭, 그 말 주워 담는 편이 좋을 텐데?”
“아, 네 주변에 그 녀석들을 믿는 건가?”
그러면서 해원의 근처에 있는 처음 보는 길드들을 가리켰다.
나도 이제 어지간한 큰 길드들은 알지만 저긴 확실히 처음 보는 길드였다.
그렇다는 말은 해원이 새로 만들거나 어디선가 포섭해 온 길드라는 말이고.
그리고 예전에 엔느가 말했듯이 저 길드들은 초월 길드를 견제하기 위해 준비해 놓은 길드일 것이다.
비록 지금은 초월 길드가 사라지긴 했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할 거냐? 너 하나 가담한다고 이 녀석들을 다 이기진 못해.”
해원의 자신만만한 그 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저건 진짜 제대로 된 재중이 형을 못 봐서 하는 소리고.
같은 프로들을 붙여 놓으면 또 모를까.
그때 다시 미로의 입구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걸 보자마자 재중이 형에게 물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더 있어요?”
“어, 내가 말 안 했던가?”
재중이 형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전사 형이 듀라한 쉴드를 앞세우면서 입구를 넘어왔다.
전사 형 역시 몸 전체가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 가득했고.
학살의 미로에서 진짜 고생한 모양이네.
그리고 날 보더니 반가운 표정을 가득하고는 내게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크흐, 주호야! 살아 있었구나.”
“아, 전사 형. 반가운 건 알겠는데 남자가 이러는 건 좀…….”
그러자 전사 형이 머쓱한 눈을 하고는 바로 내게서 떨어졌다.
전사 형이 넘어오고 그 뒤를 이어 사장님을 비롯한 나르샤 누나, 챠밍, 막내별 역시 넘어왔다.
“오빠!”
그리고 챠밍이 냅다 달려오다가 주변에 가득한 유저들을 보고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멈춰서 버렸다.
“왜? 계속 달려오지. 난 준비됐는데.”
“아, 아니에요!”
그렇게 얼굴이 빨개진 챠밍은 방향을 바꿔 이쁜소녀에게 달려가 서로 끌어안으면서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하, 아깝네.
그리고 이어서 최강 길드, 달 길드, 치맥 길드 역시 넘어왔다.
다들 전투가 격했는지 성해 보이는 유저가 거의 없었다.
숫자도 많이 줄어 있었고.
생각 이상으로 피해가 심한데?
대체 얼마나 많은 유저들과 싸우다 온 거지?
이 정도로 피해를 입으려면 어지간한 숫자로는 설명이 안 된다.
그런 내 의문을 전사 형이 바로 풀어 주었다.
헬쓱해 보이는 표정으로.
“야, 우리 18대:1로 싸우다 왔다니까?”
“하하, 농담도…….”
그런 전사 형의 말에 챠밍이 고개를 저었다.
“100대 1 아니었어요?! 진짜 힘들었는데…….”
그러면서 챠밍 역시 질린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챠밍까지 그런 표정을 짓자 정말 어렵게 싸우다 온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사 형이 나를 보면서 말했다.
“순번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는데 계속 꾸역꾸역 밀려들더라니까? 나중에는 숫자도 안 세고 계속 죽였다. 아마 우리 포인트가 너보다 높을걸?”
“설마요…….”
그런데 전사 형이 보여 준 포인트 수치를 보고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얼마나 많은 유저들을 죽였으면…….
심지어 챠밍은 그런 전사 형보다 열 배나 높은 포인트를 가지고 있었다.
“쟤는 완전 대마도사였다. 나중에 별명 하나 붙지 않을까 싶은데. 학살의 마도사 정도?”
전사 형의 그 말에 챠밍이 부끄러워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하긴, 이 정도면.
그런 표현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완전 아수라장을 거치고 왔구나.
그렇게 우리 쪽 아군들이 잔뜩 넘어오자 전체적인 구도가 바뀌어버렸다.
수세적인 불리함을 어느 정도 메워줄 수 있는 수준으로.
물론 아직까지도 숫자가 부족하기는 했지만.
이대로 난전으로 가더라도 유저 수 때문에 확 밀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미르 길드도 있었고.
우리 쪽 연합 사람들이 다 넘어오자 해원의 표정이 바로 굳어 버렸다.
그런 해원을 보면서 재중이 형이 말했다.
“어때? 이제 좀 할 만해졌지? 제대로 한판 붙어 볼까? 아주 여기서 다 쓸어버릴 수도 있는데.”
그런데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응?
왜 재중이 형이 바로 싸우려고 하지를 않지?
전력상 붙으면 우리가 이길 텐데…….
내가 아는 재중이 형이라면 우리 쪽 연합 사람들이 넘어오자마자 바로 싸웠을 것이다.
선빵이 필승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인데?
혹시나 싶어 재중이 형에게 귓속말을 넣어 보았다.
<주호> 혹시 무슨 문제 있어요?
<재중> 어, 넘어오기 전에 물약을 다 썼어. 지금 애들 다 빈털터리다.
역시.
뭔가 문제가 있었어.
아니라면 재중이 형이 이렇게 말로만 버티고 있을 리가 없었다.
<재중> 내색하지 말고. 애들도 조심하는 중이니까.
물약이 하나도 없다면 문제가 있지.
붙으면 나나 재중이 형은 버티겠지만 우리 쪽 사람들이 여기서 다 죽어버리면 그것도 문제였다.
적들이 이전에 미르 길드와 싸우는 것을 봤는데 그 정도 전력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엔느에게도 물었다.
<주호> 혹시 남은 물약 얼마나 되나요?
<엔느> 으음, 전체적으로 거의 떨어졌죠. 아마 이쪽은 몇 분 못 싸울 것 같아요.
전투 중에 체크를 다 했는지 엔느에게서 바로 답이 나왔다.
저쪽은 아직 쌩쌩한데 이쪽은 빈털터리라 이거군.
내가 한 번에 하나씩 죽이면 되겠지만…….
역시 시간이 문제인가.
재중이 형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나서자 해원이 옆에 있던 리사와 한참을 뭔가 주고받는 것 같더니 표정이 더 구겨졌다.
뭔가 잘 안 풀릴 때의 그런 표정인가?
리사 역시 굳은 표정으로 나와 재중이 형, 그리고 우리 쪽 연합 사람들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마지막에 듬직하게 서 있는 대전사 칼룬을 바라봤다.
대전사 칼룬이 우리 쪽에 가담할지 안 할지 리사는 정확히 모르니까.
그런 리사가 대전사 칼룬에게 물었다.
“혹시 전투가 일어나면 주호에게 도움을 주는 겁니까?”
그러자 칼룬이 머뭇거림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다. 지금은 고대 드워프 왕의 손님이기도 하다. 난 그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지. 』
그 말에 해원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리사도 결국 한숨을 쉬었고.
그러다 재중이 형을 보면서 제안했다.
“하아, 정말 왜 이렇게 되어서는……. 우리가 빠진다면 이대로 끝낼 건가요?”
리사의 제안은 더 이상은 싸우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여기서 손을 떼겠다는 말이기도 했고.
그 제안에 재중이 형은 잠시 기다렸다가 옆에 있던 사장님과 곤란하다는 듯 의논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저 형, 연기 정말 잘한다니까.
속으로는 좋으면서…….
그리고 의논이 끝난 후 여유 있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가는 길 안 막는 게 내 신조라서.”
대전사 칼룬이라는 변수.
그 변수가 리사에게 선택권을 확 줄여 버렸을 것이다.
재중이 형이 제안을 수락하자 리사가 자신들의 편에 뭔가를 전달하더니 이내 입술을 질끈 씹었다.
“이쪽도 가는 길은 안 막도록 하죠.”
“어떻게 믿지? 뒤통수치면?”
그 말에 리사가 칼룬에게 물었다.
“나가는 길은 어디죠?”
그러자 대전사 칼룬이 한쪽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 포탈이 있다. 』
포탈이 있었던가?
하긴, 최하층까지 내려왔다가 꼼짝도 못 하고 묶여 있을 순 없으니.
미로 형식이다 보니 다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시간만 날릴 뿐이었다.
어쩌면 대전사 칼룬도 저 포탈로 내려왔을지 모르고.
“휴, 다음에는 이렇게 넘어가진 않을 거예요.”
“좋을 대로.”
그렇게 해원의 연합이 모두 물러나자 상황이 완전히 종료되었다.
남겨진 떨거지들이 있긴 했지만.
우리를 배신했던 유저들.
그들을 본 전사 형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쟤들은 뭐냐?”
“있어요. 줄 잘못 탄 애들.”
내 대답을 들은 전사 형은 대충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기를 들었다.
“그럼 죽이면 되겠네?”
“힘들게 그럴 필요 있나요.”
전사 형의 죽인다는 말에 놀란 유저들이 재빠르게 해원의 연합을 따라 퇴장해 버렸다.
이럴 때는 눈치가 정말 빠르다니까.
모든 유저들이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 그제야 우리 연합 사람들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어유, 힘들어.”
“또 싸우는 줄 알고 놀랐네.”
“오늘은 피곤해.”
“좀 쉬자.”
스칼렛과 이슬두잔도 마찬가지로 자리에 앉았다.
다들 억지로 뚫고 온 모양이네.
재중이 형이 옆으로 와서 물었다.
“끝난 거냐?”
“네, 이제 칼룬만 따라가면 돼요.”
『 주호 님, 제단으로 따라오시죠. 』
대전사 칼룬이 안내를 하자 우리 팀과 연합 모두 따라나섰다.
전투 자국이 가득했던 장소를 지나 한참을 걸어 들어가니 멀리 웅장한 드워프상이 세워져 있는 제단이 보였다.
가까이 가자 거대한 배틀 해머를 들고 뭔가를 내려치고 있는 형상의 황금색 상이 가운데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폐허가 된 제단에 황금이라…….
이 드워프가 고대 드워프이려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대전사 칼룬이 우리 쪽 연합을 제지했다.
『 자격이 없는 자는 더 이상 지나갈 수 없습니다. 』
“나밖에 안 되는 건가?”
『 주호 님과 함께하는 사람들은 가능합니다. 』
그 말을 들은 재중이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티 하나만 가능하다는 거려나?”
재중이 형과 파티를 맺은 뒤 내 옆으로 걸어오자 대전사 칼룬이 딱히 제지는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NPC는 파티라는 개념을 인식할 수 없으니 다른 방식으로 말한 것 같았다.
“할 수 없네요. 일단 이 파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팀을 불러 모아 한곳에 섰더니 엔느가 손을 들었다.
“저도 가면 안 될까요?”
파티에 한 자리가 남기 때문에 가능이야 하지만.
재중이 형을 보니 잠시 생각하던 재중이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쁘진 않겠지. 애초에 약속도 그쪽이었고.”
“고마워요.”
엔느를 파티에 넣자 대전사 칼룬이 말했다.
『 그럼, 이동하겠습니다. 황금상에 손을. 』
대전사 칼룬의 말대로 모두 황금상에 손을 대자 곧장 시야가 반전되었다.
이건 워프?
순식간에 우리가 서 있던 곳이 다른 곳으로 바뀌고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가 잔뜩 늘어져 있는 장소로 이동이 되었다.
후끈한 열기가 가득한 바닥으로 검게 타오르는 용암이 흐르는 공간에 옮겨오자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까지 들었다.
이쁜소녀가 깜짝 놀라 외쳤다.
“후아! 숨쉬기 힘들어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모두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대체?
사방이 흘러내리는 검은 용암이라니.
『 여기가 암흑혈입니다. 』
이게?
암흑혈이라는 말에 엔느의 눈빛이 반짝였다.
뭔가를 알고 있는 건가?
얼마 기다리지 않아 용광로 사이로 누군가가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흡사 대전사 칼룬과 비슷한.
아니 그보다 더 덩치가 컸으며 연륜이 눈에 묻어나는 한 드워프의 등장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 그대가 그 유명한 ‘주호’ 인가. 』
유명?
나를…… 알아?
그리고 순간 르아 카르테가 미친 듯이 떨리면서 반응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한 방향이 아니라.
두 방향을 향해.
그 떨림을 느끼자마자 머리에 뭔가가 스쳐 갔다.
이건 설마……!
유일 아이템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어?!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