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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535화 (528/1,404)

#535화 지금 필요한 것은 스피드 (4)

잿빛의 듀라한.

있어야 할 곳이 제대로 달려 있지 않는 대신, 신체가 과도할 정도로 발달된 전형적인 전사의 모습.

한 손에 쥔 거대한 창과 진한 보랏빛이 감도는 검은 갑옷 역시 그러한 분위기를 가득 자아냈고.

또한, 갑옷과 마찬가지로 창에서도 진한 보랏빛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으로 보아 저 창 역시 평범한 무기는 아니었다.

타고 있는 말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얼핏 보면 땅에 닿아 있는 것 같지만 말의 네 발이 전부 공중에 떠 있었으니까.

공중 탈것?

아니, 공중 탈것이 이런 식으로 움직일 수는 없는데.

아예 높은 고도를 날아다녔다면 또 모를까.

“듀라한 막아!”

“성벽 방어 쪽 인원은 도대체 뭐한 거냐!”

“저 이상한 말이 성벽을 타고 넘어오는데 어쩌라고?!”

“아, 지금 그게 중요해?! 탱 되는 애들 달려들어!”

“몸빵 되는 애들 다 내려와!”

“일단 무조건 붙어!!”

잿빛의 듀라한이 성벽을 박차고 바이탄 요새 안으로 넘어오자 성벽 안쪽에서도 난리가 났다.

흡사 고르곤이 날뛰던 때와 동일한 모습.

물론,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적어도 듀라한은 확실히 보인다는 점이었다.

보인다는 점이 유저들이 겁을 먹지 않고 달려들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다만.

듀라한을 빠르게 포위한 탱커진은 아무런 행동조차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쓰러졌다.

아예 상대가 안 될 정도의 전력 차.

“크악!”

“이 공격은 대체 뭐야?!”

“방패가 갈라져?!”

“젠장! 막을 수가 없어!”

“체력이 바닥났어! 힐!”

진한 보랏빛 잔상이 지나갈 때마다 그 자리에 서 있던 유저는 너나 할 것 없이 빛으로 변했다.

기술의 차이, 레벨의 차이, 아이템의 차이… 수많은 차이가 만든 광경.

저 기술은 아무리 봐도 테인 공작이 사용했던 것과 매우 흡사하다.

테인 공작의 공격은 지금도 생각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웨폰 기술을 중첩해야 겨우 붙어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기도 했고.

이번 이벤트에 참여한 유저 중 일부는, 나름 최상이라 자부하며 자신들이 구할 수 있는 최상의 무기, 방어구, 악세를 준비했겠지만 듀라한 앞에선 장난 수준이다.

그러한 격차를 만든 게 놈이 들고 있는 무기인지 아니면 아예 공격 스킬인지는 확실하진 않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고르곤을 잡고 나온 하이딩 블레이드의 은신 기술.

이거라면 놈을 어떻게든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 생각과 함께 은신을 사용해 놈의 뒤로 움직였는데도, 녀석은 나를 파악하지 못했다.

아니, 내가 주변에 돌아다니는 것 자체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건 어글이 안 끌려서 그런 건지.

혹은 아예 안 보이는 건지.

확인이 필요해!

잿빛의 듀라한이 다른 유저들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완전히 녀석의 뒤를 잡고 르아 카르테를 녀석의 뒷덜미를 향해 겨누었다.

거의 모든 틈새를 막은 풀 플레이트 갑옷이라 틈이 없을 것 같았지만 갑옷의 부위를 서로 이어주는 이음새 부분에서 보랏빛 기운이 미세하게나마 흘러나오고 있었다.

은신이 없었다면 갑옷 혹은 자체적으로 생성된 기운으로 봤겠지만, 은신이 적용된 상태에서 바라보자 작은 것 하나하나가 더 잘보이는 것 같았다.

은신.

이거 대단하네.

녀석에게 피격을 당하지 않는다면 코앞까지 달려들어도 아마 모를 것이다.

주변 유저들을 공격하고 난 뒤 잠시 녀석의 움직임이 고정되자 사정없이 듀라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 대쉬! 】

그리고 르아 카르테로 녀석의 뒷덜미에 정확히 찔러 넣었다.

카갹!

르아 카르테가 녀석의 갑옷 빈틈을 파고들며 쇠 갈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와 함께 내 모습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사방에서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뭐야?”

“주호?!”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나?”

“어떻게?”

그런 유저들의 놀람과 별개로 내 시선은 온통 한곳으로 쏠려 있었다.

타격이 없는 건가?

분명히 쇠 갈리는 소리는 들렸는데 신체를 공격할 때 특유의 찢기는 감각이 손에 전혀 걸리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곳을 가르는 느낌.

설마…….

이 녀석 속이 빈 건 아니겠지?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방금 전 공격이 먹히지 않았을 수 있는데…….

그런데 그때 내 귓가로 하나의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 은신의 쿨타임이 초기화되었습니다. 》

먹혔나?

손에 너무 감각이 없어서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의심이 되었는데 다행히 크리티컬은 완벽하게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 공격이 먹히자 잿빛의 듀라한의 시선이 바로 내 쪽으로 돌아왔다.

아니, 시선이 아닌 신체 전체가 내게 돌려졌다는 표현이 맞으려나.

머리 자체가 없으니.

네임드다 보니 한 번의 크리티컬 정도로는 녀석을 무력화시키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이건 예상했던 거니까.

바로 듀라한에게서 떨어져 나와 다시 한 번 돌아온 은신을 시전했다.

【 은신! 】

그러자 다시 내 팔과 몸이 흐릿하게 변해갔다.

마력이야 르아 카르테로 충분히 끌어올 수 있으니까 시전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고.

정작 문제는 녀석의 어글이 어떻게 인식되는가, 였다.

은신이 되고서도 잿빛의 듀라한이 계속 나를 바라보면 이건 은신을 써봤자 아무 의미가 없었다.

다른 곳을 봐라…….

다른 곳을 봐라…….

그렇게 속으로 몇 번 되새기는데 순간 잿빛의 듀라한이 긴 창을 들어 올렸다가 곧 주변에 있는 다른 유저에게 공격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좋아!

적어도 듀라한에게는 먹힌다.

그렇다면 이제 투자를 꺼려할 이유도 없고.

은신이 된 상태로 제대로 대미지를 주려면…….

곧장 뒤로 빠져나와 대기조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그리고 완전히 시선에서 멀어진 뒤 인벤에서 강화석을 꺼내 들었다.

『 10강 무기 정제 강화석. 』

이렇게 계속 쓰면 곧 바닥나겠지만, 그래도 써야 할 곳에는 써야겠지.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 강화에 성공하셨습니다!! 》

『 +10 하이딩 블레이드 / 출혈 41(28+13) 타격 33(20+13)

- 모든 시간 동안 은신 시전 가능.

- 은신 유지 시 추가 마력 소모 1/2.

- 공격이나 피격 시 은신 해제.

- 크리티컬 시 은신 쿨타임 초기화.

- 은신 시 크리티컬 대미지 100% 추가.

- 악마형 피해 300% 』

데몬 블레이드와 달리 관통이나 치명타 대미지 추가가 없었지만 이건 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악마형 피해 대미지가 더 높으니 부족한 대미지에 대한 상쇄도 되었고.

옵션도 밤에만 은신이 가능했던 게 낮에도 가능하도록 변경.

거기다 마력 소모 역시 1/2 줄어들고 은신 시 크리티컬 대미지가 100% 추가되었다.

강화를 해서 하이딩 블레이드에 걸린 제한이 상당수 줄어든 셈.

그냥 노강을 쓰는 것보다 이쪽이 운신 폭이 훨씬 넓어졌다.

《 주호 님이 【 +10 하이딩 블레이드 】 인챈트에 성공했습니다! 》

한참 요새 방어를 하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강화 시스템 메시지가 울리자 사람들이 깜짝 놀라 외쳤다.

“10강?!”

“또 주호야?”

“하이딩 블레이드?! 이런 무기도 있었어?”

“옵션 눌러봐라. 미쳤다.”

“와, 진짜 미쳤네.”

“진심 돌았네.”

“충^^7”

“대박. 이거 대체 얼마짜리야?”

한동안 채팅창이 마비될 정도로 수없이 많은 글이 올라갔다.

요새 방어전에 나타난 듀라한이 아니라 10강 하이딩 블레이드가 더 주목을 받을 정도로.

괜히 10강을 했나 생각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정도 수준의 무기가 없다면 저 잿빛의 듀라한을 잡아내지도 못할 것이다.

<불멸> 화려하게 해주는데? 보아하니 은신이 잘 먹히나 봐?

<주호> 네, 형. 잘 먹혀요.

<불멸> 잡을 수 있겠어?

<주호> 생각했던 몇 가지 조건이 맞으면요.

<불멸> 일단 여기는 맡겨야겠어. 우리도 저 녀석 저 이상한 기술은 막기 힘드니까.

테인 공작이 쓰는 기술과 비슷한 저 보랏빛 공격을 말하는 거겠지.

트리플 캐스팅 기술서를 많이 가지고 있어 형들이 무리를 하면 아마 막아낼 수는 있을지 모른다.

다만 오랫동안 막아내는 것은 부담이 될 테고.

아마 내가 실패를 하면 그때 나서겠지.

후우.

그럼 가볼까.

은신을 한 상태로 유저들과 접전 중인 잿빛의 듀라한에게 다시 접근했다.

지금 현재 각 길드의 탱커들이 앞선에서 듀라한을 붙들고 차륜전으로 치고 들어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누군가 당하면 바로 다른 누군가가 들어가고.

완전히 죽지만 않는다면 뒤에 있던 힐러들이 미친 듯이 힐을 쏟아부어서 겨우 명줄만 살려놓길 반복했다.

그리고 원거리 딜러들이 조금이라도 듀라한의 체력을 깎기 위해 사방에서 화살과 마법을 날려댔고.

성벽을 올려다보니 성벽에서 아슬아슬할 정도로 병력을 많이 빼서 내려와 버렸다.

오히려 NPC들이 주축이 되어 성벽을 막고 있는 묘한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어차피 듀라한을 잡지 못하면 게임이 끝나니까.

그런 유저들 사이로 파고들어 다시 한 번 잿빛의 듀라한의 급소를 노리고 르아 카르테와 하이딩 블레이드를 동시에 휘둘렀다.

캬갹!

끼긱!

하이딩 블레이드는 녀석이 움직이면서 살짝 빗나갔으나 르아 카르테가 정확하게 유효타가 터지면서 대미지가 제대로 들어갔고 다시 은신의 쿨이 돌아왔다.

나쁘지 않아.

크리티컬.

쿨 타임 초기화.

르아 카르테의 마력 흡수.

이 세 가지가 맞물리면서 은신을 계속 쓸 수 있게끔 유지를 시켜줬다.

듀라한 근처를 계속 돌면서 녀석의 갑옷 사이 아주 작은 틈들을 공략하자 유저들의 함성이 쏟아졌다.

“우와! 대박!”

“주호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잖아?”

“완전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군.”

“저런 건 처음 봐.”

“듀라한도 반응 전혀 못 하는데?”

공격을 하고 나면 일단 은신이 풀린다.

그럼 내 모습이 유저들에게 보였고, 바로 은신을 다시 걸면 사라지니 아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내가 계속 점멸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렇게 계속 당하다 보니 이내 잿빛의 듀라한이 고함을 질렀다.

“크아아악!”

주변에 모두 피해를 주는 광역 하울링.

잠시 멈칫하는 순간 은신이 풀렸는데 어글이 내게 넘어와 있지 않아 그런지 다른 유저들을 먼저 공격해갔다.

은신이 풀리고 나타난 내 옆으로 어느새 전사 형이 달려와 나를 끌고 바깥으로 빼주었다.

내가 멈칫거리자 전사 형이 날 살리기 위해서 달려든 모양.

“이건 꽤 위험한데?”

“아, 전사 형. 고마워요.”

“너도 저건 조심해야겠다. 어글 넘어와 있었으면 너 죽었어.”

“네, 조심할게요. 그럼 다음에도 좀 부탁해요.”

“맡겨둬라. 이러려고 내가 있으니까.”

패턴을 알았으니 다음에 당할 일은 없겠지만 확실히 이건 조심해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은신을 걸고 공격을 하려는데 듀라한의 주변으로 이상한 보랏빛 기운이 막 회전을 하면서 듀라한의 몸을 전부 감쌌다.

“저건?”

“아마 방어막 같은데?

“그래요?”

“보통은.”

“한 번 해볼게요.”

다시 은신을 걸고 듀라한을 치는데 이번에는 크리티컬이 전혀 먹히지 않았다.

칫.

전사 형 말대로 방어막이었어.

이상한 막이 가로막자 그 뒤로 크리티컬 빈도가 확 떨어져 버렸다.

그만큼 은신 횟수가 확 줄어들었고.

내 모습이 보이는 순간마다 수시로 녀석이 어글이 넘어오면서 제대로 딜을 넣기가 힘들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듀라한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이건 너무 힘든데?

크리티컬이 터져야 딜 사이클을 돌릴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하아, 뭔가 방법이 없나?

조금 있으면 성벽도 힘들…….

그때 한쪽 성벽 위로 악마형 몬스터들이 올라왔다가 유저들에게 집중포화를 맞고 성벽으로 떨어져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성벽 안쪽 바닥에 떨어졌다가 대기하던 유저들이 달려들어 죽이는 모습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떨어진 몬스터라……

몬스터……..

몬스터?

머리에 스치는 하나의 생각.

크리티컬이 안 먹힌다면…….

먹히는 놈을 찾으면 되잖아?

그리고 급하게 그 유저들을 불러 세웠다.

“그놈들 좀 살려놔요!!”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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