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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526화 (519/1,404)
  • #526화 무너지는 요새 (1)

    보이지 않는 적.

    유저들에게 이것만큼 무서운 것이 또 있을까.

    저 많은 유저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무리 장비가 좋고 컨트롤이 좋다고 해도 보이지 않는 몬스터를 상대로 이기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반면에 나는 다르다.

    아니, 일정 수준 이상으로 감각을 쓸 수 있는 유저라면 확실히 다를 것이다.

    그 예가 지금 재중이 형이었다.

    재중이 형이 고르곤의 측면으로 들어가더니 기다란 창을 휘둘러 정확하게 배 부분을 가르고 빠져나왔다.

    쿠어어!!

    그러자 고르곤의 시선이 바로 재중이 형에게 돌아갔다.

    그 공격에 제대로 어그로가 끌렸는지 녀석의 거대한 앞발이 형이 있던 자리로 크게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재중이 형은 당연하다는 듯 유유히 뒤로 빠졌고.

    역시 가능하구나.

    내가 고르곤을 상대하면서 느낀 점은 RTP 수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몬스터 혹은 네임드의 움직임을 보다 확실히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중이 형 역시, 녀석의 움직임이 잡힐 것이다.

    나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재중이 형이 고르곤의 시선을 끌어두는 동안 나는 고르곤의 뒷다리를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고르곤의 움직임이 많아질수록 녀석의 형태를 파악하기엔 더 수월했다.

    움직임이 생긴다는 것은 곧 주변 공기의 흐름이 크게 변화한다는 것.

    고르곤처럼 덩치가 거대한 몬스터는 이런 흐름을 숨기기는 힘들었다.

    거기다 움직일 때마다 다리가 땅을 찍는 소리로 인해 더더욱 고르곤의 행동을 예측하기 쉬워졌다.

    재중이 형을 보자 전과 다르게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르곤을 상대해서 재밌어하는 그 모습에 그저 웃고 말았다.

    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즐기는 건가.

    지금도 아슬아슬할 정도의 컨트롤로 빗겨 치면서 고르곤의 움직임을 잘 제어하는 중이었다.

    다음 동작과 그다음 동작까지 전부 염두에 두고 차근차근 고르곤을 공략하는 모습.

    전에 고르곤의 영상을 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동작에 있어서 거침이 없었다.

    무리한 동작이 없어서 그런지 체력이 거의 빠지지도 않았고.

    들어오는 충격량을 전부 창끝으로 흡수해서 흘려보내고 있다는 말.

    저런 식으로 컨트롤을 하면 체력을 극한까지 아낄 수 있을 것이다.

    흡사 교본 같은 모습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주변으로 물러난 유저들 역시 마찬가지.

    “우와, 컨트롤 미침.”

    “허공에 막 휘두르는 것 같은데 전부 다 막고 있잖아?”

    “제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도 않았어.”

    “보이지도 않는 공격을 저 정도로 막아낼 수 있다니.”

    “역시 불멸인가…….”

    “심지어 체력도 안 빠짐.”

    “진짜네. 체력 물약 이펙트 한 번도 안 터진다.”

    “저 인간은 탱커를 했어도 잘했겠네.”

    이런 묘기 같은 탱킹에 사람들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허공에 휘두를 때 한 번씩 고르곤의 앞발과 부딪치면서 불꽃이 튀는 모습과 소리 때문에 확실히 막고 있다는 것을 유저들도 알았다.

    이펙트와 효과음이 없었다면 혼자 허공에 삽질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재중이 형이 적절하게 탱킹을 하면서 어글을 먹어가자 곧 내게 신호를 보냈다.

    “슬슬 해도 된다.”

    “네, 시작할게요.”

    이건 전사 형이 평소에 했던 역할을 재중이 형이 거의 대신하고 있는 셈.

    내가 공격하기 쉽도록 최대한 고르곤의 시선을 끌어준다.

    그 가공할 탱킹 능력으로.

    휴.

    저 정도까지 완벽하게 해주는데 이쪽도 분발해야겠지.

    예전 암흑 지대에서는 정말 아슬아슬하게 피해 가면서 공격을 했기에 유효타를 집어넣기 정말 힘들었다.

    이쪽은 살을 내어주고 뼈를 치는 공격까지 필요할 정도로 여유가 없었다.

    당연히 원하는 위치에 매번 공격을 넣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고.

    그러다 보니 상대하는 시간까지 점점 길어져 부담이 엄청나게 가중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재중이 형이 시선을 확실하게 끌어주기에 오직 공격하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한 번에 제대로 한 방.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을 넣는다!

    르아 카르테와 데몬 블레이드에 모든 인챈트를 다 걸어냈다.

    【 트리플 캐스팅! 】

    【 라이트 웨폰! 】

    【 라이트닝 웨폰! 】

    【 아쿠아 웨폰! 】

    웨폰을 걸고 난 뒤 추가로 웨폰을 더 걸었다.

    【 시간의 서! 】

    【 트리플 캐스팅! 】

    【 포이즌 웨폰! 】

    【 다크 웨폰! 】

    【 파이어 웨폰! 】

    동시에 웨폰이 줄줄이 걸리자 몇몇 유저가 깜짝 놀라 외쳤다.

    “저게 뭐야?”

    “새 기술인가?”

    “아냐, 웨폰 기술인 듯?”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어!”

    “그런데 저렇게 많이 걸려?”

    “와, 여섯 가지나 걸리는 건…….”

    “저거 완전 사긴데.”

    예전에 떨어진 아이템을 노리는 유저들과 싸우면서 웨폰 기술을 중첩시키는 방법을 한 번 노출한 적이 있었다.

    분명히 녹화 영상에도 남았을 터.

    누군가 방송을 했다면 알고 있는 유저들도 상당히 많으리라 생각했다.

    지금 보면 그렇게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고.

    정확하게는 쓰는 방법 자체를 모르겠지.

    트리플 캐스팅으로 이걸 쓴다는 걸 모르면 그저 신기한 기술이 될 뿐.

    거기다 시간의 서는 기억하기로 아직 다른 유저 중 누구도 소유하지 못했다.

    그렇게 최대한으로 대미지를 올린 다음 고르곤의 뒷다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 강격! 】

    공격력을 올릴 수 있는 모든 스킬을 동원해서.

    그리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제일 약해 보이는 부위를 르아 카르테로 타격하면서 데몬 블레이드는 반대편을 가르고 지나갔고.

    카앙!

    마치 쇠와 쇠가 마주친 것 같은 타격음에 양손이 저릿했다.

    전에도 느꼈지만 이 녀석은 보이는 것 이상으로 단단했다.

    다만, 이쪽은 관통 효과가 무시무시해서 말이지.

    무기 두 개를 합쳐 모든 몬스터에 관통 확률이 50%가 넘어간다.

    두 방 중 한 방은 관통이 걸린다는 말이고.

    이건 내가 고르곤을 공격하면 두 방 중 한 방은 방어를 무시할 수 있다는 소리다.

    그렇게 두 번의 공격 중 하나가 관통이 되었는지 한순간 고르곤의 거대한 신체가 휘청거리는 것이 보였다.

    균형을 잃을 정도의 위력.

    동시에 웨폰 기술들을 유지하느냐고 줄어든 마력이 한꺼번에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나쁘지 않아.

    재중이 형이 고르곤의 움직임을 제한시켜주기만 해도 한 번에 원하는 코스로 공격이 가능했다.

    고르곤이 휘청거리면서 나를 보려고 하자 곧장 뒤로 빠졌다.

    그러자 재중이 형이 바로 달려들어 대미지를 계속 쌓으며 고르곤의 시선을 빠르게 뺏어갔다.

    확실한 역할 분담.

    고르곤의 높은 방어를 뚫고 온전히 체력을 깎으려면 결국 내 한 방이 필요했다.

    그래서 다소 공격력이 낮은 재중이 형이 시선을 끌고, 실질적인 체력 감소는 내가 전담하는 식이 되었다.

    “할 만해요?”

    내가 물어보자 재중이 형이 고개만 끄덕이고는 곧장 다시 고르곤에게 달라붙었다.

    처음 상대하기에 긴장감을 최대로 유지하는 것 같기도 하고.

    순간 보이지 않는 검은 구들이 재중이 형에게 쏟아졌는데 빠르게 좌우로 여러 번 스텝을 밟더니 그 모든 공격을 차례대로 피해 버렸다.

    마치, 몸이 스르륵 밀려났다 멈췄다 하는 모습.

    아주 단순한 동작으로 촘촘히 날아오는 공격을 거의 제자리에서 모두 피해내는 모습에는 나도 놀랐다.

    저 형, 대체 어디까지 실력을 숨기고 있는 거야?

    “너도 해볼래?”

    재중이 형이 나를 보면서 웃자 그저 따라 웃기만 했다.

    방금 보여준 스텝은 영상을 여러 번 돌려보지 않고는 한 번에 따라하기 힘들어 보였다.

    “나중에요. 그럼 계속 가죠.”

    “못 따라 한다는 소리는 안 하네.”

    역시 재중이 형도 웃으면서 다시 고르곤에게 붙으려다가 주변을 보고 소리쳤다.

    “구경들 그만하고 올라가서 성벽 사수해. 멍 때리고 있을 시간 없다. 요새 무너지게 둘 거야?”

    그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유저들이 우르르 성벽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고르곤을 볼 수 있다면 또 모를까.

    지금은 짐이나 마찬가지.

    어차피 자신들이 여기 남아 있어 봐야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테니까.

    이전에 급하게 고르곤을 막아내려고 성벽 아래로 뛰어 내려왔던 탱커와 딜러들이 다시 성벽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몬스터들의 압박에서 힘들어하던 성벽 쪽이 차츰 안정을 되찾는 게 보였다.

    한숨 돌렸나?

    그렇게 요새 안쪽에서는 재중이 형과 나의 2인 레이드가 진행되었고, 성벽은 원래 그래야 했던 것처럼 처절한 수성전이 이어졌다.

    그리고 성벽에서 죽은 유저들이 곧바로 요새 내의 부활 포인트에서 살아와 다시 전장에 복귀했다.

    워낙 거리가 가깝다 보니 성벽이 빠르게 메워졌고,

    아래에서는 성벽 상황을 확인할 수 없어서 한 번씩 날아오는 챠밍의 귓속말이나 채팅을 보면서 상황을 확인했는데 무엇보다 고무적인 일은 채팅창이 안정되었다는 것.

    이전에는 정말 혼잡했던 것에 비하면 지금은 누가 봐도 괜찮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누가 바이탄 요새 먼저 무너진다고 했었냐?”

    “여기 유저에 비해 몹이 많아서 진짜 최고다!”

    “증표, 인벤 안에 잘 쌓임. 레벨도 잘 오르고. 장비 좋으면 바이탄이 최고인 듯.”

    “그리고 챠밍하고 막내별이 죽여줌ㅋㅋ. 메테오 쾅쾅 날려서 위험한 곳 다 쓸어주잖아.”

    “챠밍하고 막내별이 현재 전체 랭킹 1, 2위임.”

    “거기다 2인 레이드 하는 미친놈들도 있고 말이지.”

    “하긴 저놈들이 진짜지. 아니었으면 벌써 무너졌다.”

    “진심 괴물들.”

    가장 먼저 무너질 것 같았던 바이탄 요새가 굳건하게 버티자 새로운 유저들이 조금씩 넘어오기 시작했다.

    아마 상황을 보고만 있다가 안정적인 요새로 이동한 것 같기도 하고.

    그와는 상관없이 재중이 형과 나의 2인 레이드는 계속되어갔다.

    “계속 버틸 수 있겠어요?”

    “아직 괜찮아.”

    내 쪽보다는 재중이 형의 부담이 상당한 레이드였으니 수시로 컨디션 확인을 해야 했다.

    뭐 여차하면 둘이 역할을 바꾸면 되니까 버티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겠지.

    “그나저나 이 백작 놈은 언제쯤 나타나는 거야?”

    재중이 형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이제야 후엘 백작이 생각났다.

    “그러게요.”

    당연히 고르곤을 막기 위해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고르곤이 더 날뛰어야 나오는 건가?

    그렇다고 고르곤을 날뛰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고르곤에게도 광역기가 넘칠 정도로 많이 존재했다.

    단순히 앞발을 땅에 내려찍는 것도 엄청 넓은 범위로 광역 판정이 나는데다가 검은 구뿐만 아니라 뿔에서 모이는 뇌전과 비슷한 광역기도 있었다.

    레이저처럼 앞을 쓸어버리는 기술에 거대한 철퇴 꼬리를 사방팔방 랜덤으로 찍어 내리는 기술도 위협적이기는 마찬가지고.

    하나 같이 실수를 하면 바로 아웃될 정도로 위력이 강했다.

    자잘한 기술까지 합치면 패턴이 너무 많아 매번 목숨을 걸면서 레이드를 하고 있는 셈.

    뿔만 부수고 끝날 것 같으면 이 정도까지 버티진 않아도 될 텐데…….

    그때, 하늘에서 상당히 많은 비공정이 동시에 내려앉는 것이 보였다.

    저건?

    어디서 많이 본 마크인데?

    눈에 익은 몇 개의 마크가 보였고 그중 하나는 너무 잘 아는 마크였다.

    화련도 도착했나?

    새로 온 유저들은 2인 레이드를 하고 있는 우리를 슬쩍 보고는 빠르게 성벽 위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중 화련이 우리에게 너무 접근하지 않은 채 다가와 말했다.

    “정말 미쳤네, 미쳤어. 진짜 이걸 둘이서 잡고 있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다른 사람들 손에는 맡길 수가 없는 물건이라.”

    “흐음, 이런 차이라 이거지? 확실히 여기로 올 수밖에 없게 만들었네. 너희가.”

    “그게 무슨 말이죠?”

    “너 아직 못 들었구나?”

    화련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하길래 일단 듣고 있었다.

    그리고 뒷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버렸다.

    “동쪽에 있는 쿠론 요새, 벌써 무너졌어.”

    뭐?

    하도 황당해서 화련을 멍하니 바라봤다.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거기에 화련이 한마디 말을 더 했다.

    “여기 이놈 말고. 전혀 다른 놈에게.”

    뭐 다른 놈?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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