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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400화 (1,200/1,404)

# 400

#400화 장벽 너머 (4)

새 지역으로 떠나는 왕국 정기선이 높게 떠올라 로가슈 왕성이 점으로 변해갈 때쯤 더 이상 유저들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떠오른 왕국 정기선이 컴컴한 구름 속을 파고들더니 이내 고도를 고정했다.

생각보다 고도 자체는 높지 않았다.

베록의 고도를 최대로 높이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라 다소 안심 했다.

적어도 전과 같은 추락 쇼를 경험하진 않아도 될 것 같으니까.

혹여나 떨어지더라도 베록을 꺼내 옮겨 타면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같은 생각인지 고도를 확인하자마자 모두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쁜소녀는 그때의 기억이 아찔한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또 추락하면 어쩌나 했어요.”

“설마, 또 그러겠어.”

안심하라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나도 모르겠다.

매번 지역을 바꿀 때마다 정상적으로 날아간 적이 없었기에.

바다는 레서 크라켄이 있었고, 산맥은 블러드 가고일, 폭풍 지대는 썬더볼트가 있지 않았나.

지금 생각하면 그나마 산맥이 쉬운 축에 속했다.

물론, 지금 생각했을 때다.

당시엔 블러드 가고일도 정말 강했으니까.

다른 네임드에 비하면 블러드 가고일은 비교적 약한 편에 속하는 편이다.

특수해서 그렇지.

챠밍이 어두컴컴한 주변 구름을 보더니 조심스레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다소 불안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저 여기 있어도 돼죠?”

“물론, 왜 불안해?”

내 말에 챠밍이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오빠 옆이 제일 안전할 것 같아요.”

“그런 이유라면 잘 찾아오셨습니다. 여기 자리.”

내가 앉아 있던 자리 옆을 비워주자 챠밍은 자연스럽게 옆에 와서 앉았다.

얘도 높은 곳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

어느새 이쁜소녀도 쪼르르 달려와서 챠밍 옆에 앉고 전사 형, 나르샤 누나까지 모두 내 옆으로 왔다.

그리고 막내별까지 의문을 머리 위에 띄우면서 내 옆으로 왔다.

마치 난파된 배에서 구명조끼를 바라보는 표정.

그렇게 모두 내 옆에 자리 잡는 모습을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봤다.

“다들 왜 이러실까…….”

전사 형이 내 말을 듣더니 웃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곳에선 네 옆이 최고지. 검증된 탈출기 아니냐.”

“하아, 맘대로 하세요.”

어느새 북적거리는 내 옆으로 사장님과 재중이 형이 다가왔다.

“허허, 여긴 인기가 많구나.”

“저놈이 좀 이런 데 강하거든요.”

사장님과 재중이 형까지 자리 잡는 모습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다들 무조건 추락할 거라고 믿는 것 같은데…?

제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길 빌어야 하나.

아직 로가슈 왕국 범위 안이라 그런지 위기 상황이 발생하진 않았고 자연스럽게 왕국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전사 형은 궁금한 것이 있는지 내게 물었다.

“너 실버 등급 창고 들어갔던 건 어떻게 됐냐?”

“아, 상황이 워낙 바쁘게 돌아가서 말을 못 했네요.”

실버 등급 창고라는 말에 다들 주목했다.

“그게, 생각보다 좋은 건 없더라고요. 베록이나 트리스탄 같은 비공정 획득권하고 썬더볼트, 데스 나이트 장비가 있었어요. 정제 강화석도 묶음으로 있었고. 스킬북도 종류별로 있기는 한데…….”

듣기에 따라서는 매우 좋았다.

우리가 저 중 뭔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상황이라면 말이지.

문제는 대부분 우리 팀이 가지고 있거나 안 쓰고 있는 아이템 종류였다는 것.

거기다 하나, 하나 기여도를 너무 많이 요구했다.

이미 데스 나이트를 질릴 때까지 잡아본 우리에겐 그렇게까지 매혹적인 보물 창고가 아니었다.

“우리가 데스 나이트를 좀 많이 잡았어야지.”

재중이 형도 여기에는 동감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실버 창고에 환장을 했겠지만.

아쉽게도 우리에겐 그다지 해당 사항이 없었다.

만약 확정 강화석 같은 것을 팔았다면…….

상황이 꽤 달라졌을지도.

“왕성 쪽은 어때요?”

전사 형에게 물었더니 전사 형이 다른 BJ들이 방송하고 있는 채널을 틀어주었다.

그리고 거기선 거의 학살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BJ는 죽을까 봐 접근도 못 하고 멀리서 찍고 있었고.

악마형 케르베로스를 감싸고 있는 검은 기운이 그대로인 것을 봐서는 유효한 대미지를 거의 주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상성으로 피해를 주거나 혹은 강력한 대미지로 찍어누르거나 둘 중에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지금은 이도 저도 되지 않았다.

방어전에 참여한 유저들도 기가 차는지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고.

한켈과 쉴라가 투입됐음에도 여전히 상황은 악화 일로를 걸었다.

저렇게 해서 왕국이 망했구나.

그때는 확인을 못 했는데 직접 보니 악마형 케르베로스가 얼마나 사기였는지 눈에 확 들어왔다.

전사 형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방송 속 악마형 케르베로스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제가 저런 놈을 상대로 버텼다니…….”

“아마 조만간 또 붙게 될 겁니다.”

그런 예감이 든다.

저놈과는 어떻게든 한 번 결착을 내야 하니까.

내 확고한 예고에 다들 눈을 반짝였다.

우리 중 강한 상대에 쫄아서 피할 사람은 없다.

좋아하면 좋아했지.

악마형 케르베로스가 유저들을 계속 녹이면서 점점 왕성에 가깝게 다가갔다.

이대로 거대한 하르 기둥을 부수면 바로 멸망이다.

앞으로 십 분도 채 못 버티겠네.

그런데 그때 방송 속 상황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어? 오빠. 저기 성 쪽에.”

이쁜소녀가 뭔가를 발견했는지 손가락으로 화면을 한 곳을 가리켰다.

그리고 한순간 BJ의 방송 화면이 온통 하얀 화면으로 변해버렸다.

뭐지?

선 라이트인가?

아니, BJ가 있던 곳은 전투 장소와 거리가 상당히 있었는데?

아무리 쉴라의 선 라이트가 강해도 왕국 전역을 커버할 정도로 광대하진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화면이 하얗게 변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한 뭔가가 터졌다.

사장님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냥 화면이 나간 것 아니냐?”

그 말에 전사 형은 다른 BJ의 방송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다른 BJ도 똑같습니다. 다 화면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허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그와 함께 채팅창이 분주하게 올라갔다.

-뭐야?!

-온통 하얗잖아!

-보이는 사람 있어?

-쉴라인가?

-보이는 사람, 이야기 좀!

-근데 왜 이렇게 따뜻하냐?

-어? 뒈지는 줄 알았는데 체력이 풀됨!

-마력도!!!!

진짜 선 라이트인가?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환했던 화면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앗?!”

“오빠? 저기…!”

“어머?”

이쁜소녀, 챠밍, 막내별 모두 깜짝 놀란 듯 자연스럽게 하이톤의 비명이 났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없어졌어?”

악마형 케르베로스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다는 듯 사라졌다.

혹시 그사이에 어디론가 점프해서 사라진 건?

전사 형은 바로 주변 BJ들의 방송을 전부 켜서 케르베로스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런데 어떤 방송에서도 악마형 케르베로스의 모습이 잡히지 않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난데없이 사라진 케르베로스에 전장 전체가 요동쳤다.

“케르베로스는?”

“어디로 간 거야?!”

“없잖아?!”

“당장 찾아!”

“성으로 벌써 들어간 것 아냐?”

“머리는 장식이야? 그리 갔으면 저놈들이 살아 있겠냐?!”

그 말대로 로가슈 성과 악마형 케르베로스 사이에 있던 유저나 NPC 모두 멀쩡했다.

전장의 모습은 그대로인데 딱 하나만 사라진 상태.

이 초유의 사태에 모여 있던 모든 유저는 무기만 들고 멍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스템음이 전역을 울렸다.

《 잃어버린 상징의 힘이 발동되었습니다. 》

《 신성 지대로 변경시켜 악마의 힘을 몰아냅니다. 》

《 악마형 케르베로스가 암흑 영역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

《 악마형 케르베로스가 암흑 지대로 역소환됩니다. 》

《 로가슈 왕성 방어전이 강제 해제됩니다. 》

뭐, 신성 지대?

역소환?

이 예상치 못한 사태가 당황스러운 듯 정기선 위의 사람들이 모두 웅성거렸다.

재중이 형이 그 모습을 보고는 크큭 거리면서 웃었다.

“와, 이거 골 때리네. 잃어버린 상징이 저런 용도였어?”

“그러게요. 생각도 못 했어요.”

그러더니 재중이 형은 하늘을 바라봤다.

약간의 한숨을 섞어서.

“운영자들 진짜 어떻게든 맞춰주려고 고생하는구만. 저런 기능까지 끼워 넣고.”

“원래 있었을 수도 있지 않아요?”

“반반이지. 원래 있던 기능이거나 끼워 넣었거나.”

전자라면 우리가 할 말이 없다.

잃어버린 상징을 가져다준 게 우리니까.

반대로 후자면 따져야 하는데 증명할 길이 없지.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는 경우인가?

이미 벌어진 일이고 다시 돌아가서 뭔가를 꾸미기에는 상황이 너무 애매했다.

다시 한 번 악마형 케르베로스를 끌고 나오기는 부담스럽기도 하고.

한 번은 그러려니 해도 연속된 상황으로 이어진다면 누군가 개입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줄 수 있었다.

게다가 다시 케르베로스를 데려오는 정도로는 왕국을 멸망시킬 수 없겠지.

고르곤을 데려오면 또 모를까.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면 앞으로 방어전이나 수복전을 통해 확정 강화석을 다른 유저들이 얻을 수 없다는 이점이 있으니 아주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

앞으로 사람들이 새로운 지역으로 넘어오는 것도 지켜봐야 하고.

여러 가지로 꼬이네.

어떻게 보면 이게 정상적인 상황이 맞긴 한데 아직 나는 배고프다.

“아우, 왕이라도 죽이는 건데…….”

무심결에 뱉은 말에 다들 화들짝 놀라 날 쳐다봤다.

“아, 그냥 생각나서 한 말이에요. 상징을 드랍할 수 있잖아요. 전에 보니까 죽일 수 있겠던데.”

“……넌 어떤 의미로 진짜 대단한 놈이다.”

재중이 형의 재밌어하는 말투에 어깨만 으쓱했다.

이런 건 옳지 않다.

어설프게 여지를 줘 살아날 구멍을 만들어줬다는 것에 깊은 반성을 했다.

“다음엔 확실하게 죽여 버려야…….”

막내별이 날 보면서 기겁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와, 진짜 악당!”

“그래서 악당은 싫어요?”

“아뇨, 너무 좋죠. 딱 제 스타일인데요?”

금방 표정이 변해 싱글벙글 웃는 그 모습에 한숨을 쉬었다.

하아. 어째 내 주변엔 정상이 하나도 없어.

***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왕국 정기선은 북쪽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이쯤 날아오게 되면 검은 안개에 막혀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왕국 정기선은 아무런 제한 없이 그 장벽을 그대로 뚫고 지나가 버렸다.

전사 형을 비롯해 모두가 전체 맵을 켜놓고 우리의 이동 경로를 확인했다.

앞으로 지형이 어떻게 변하는지 다들 궁금해 하기도 했고.

그 와중에 재중이 형은 선원들과 몇 마디 말을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한 선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우리 로가슈 왕국은 전통적인 하르 수출국입니다. 다른 지역보다 하르 광산이 많았죠. 하지만 싸이클롭스나 썬더볼트, 리치 때문에 광산을 사용하지 못해서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

싸이클롭스, 썬더볼트, 리치.

셋 다 한 지역의 패자다.

광산과 주요거점을 쥐고 있는.

『 그런 악마들을 여러분들이 퇴치해주셔서 이렇게 다시 하르 수출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왕국을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

“이거 왕한테 더 뜯어내야 했던 것 아닙니까?”

전사 형의 아쉬운 말에 모두 크게 웃어버렸다.

확실히 왕국을 몇 번이나 살려줬는데 더 뜯어내도 할 말이 없지.

앞으로 이 하르 수출을 위한 정기선을 타고 유저들이 오가게 되겠네.

그런 선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맵을 계속 바라보고 있는데 이상한 점이 보였다.

“전사 형, 설마 여기 또 섬 있어요?”

맵의 검은 부분은 계속 걷히는데 땅의 경계가 끝나면서 예의 그 바다 같은 형태가 보였다.

“그러게. 섬 넘어 섬이었던가.”

로가슈 왕국이 아주 큰 섬 같은 지형이었나?

시작 지점은 정말 작은 섬이었고.

정말 섬 넘어 섬이네.

대체 이 동네는 얼마나 넓은 거지.

“그런데 굳이 이렇게 하늘로 날아갈 필요가? 바다라면 배를 이용해서 가는 편이 훨씬 수송에 좋지 않아요?”

상식적으로 항공보다는 배가 더 유리하다고 알고 있었다.

뭐, 하르를 태워 비공정을 띄우는 시대니까 전혀 다를 수 있겠지만.

내 질문에 답한 것은 재중이 형도 전사 형도 아닌 선원 NPC였다.

『 아래를 보시길 바랍니다. 』

어느새 고도를 낮춘 정기선 아래로 광활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촤아아아악!!!

캐에에에엑!!!!

주변 공기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괴함에 대기가 떨리며 하늘에서 날고 있는 정기선까지 충격에 흔들거렸다.

뭐지?

급하게 갑판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바다가 출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베록 크기의 몇십 배에 달하는 거대한 뭔가가 시커먼 바닷속을 가르며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너무 크다 보니 더 공포감을 주었고.

거기다 멀리서도 확인되는 아주 새빨간 이름에 침을 삼켰다.

『 레비아탄 』

……확실히 배로 못 지나다니는 이유가 있었구나.

이 녀석이 우리가 발견한 최초의 월드 네임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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