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9
#399화 장벽 너머 (3)
어둠 속에서 제일 처음 마주한 놈은 악마형 케르베로스.
직접 상대하기엔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네임드.
물론, 어떻게든 싸워낼 순 있지만, 내 체력이 먼저 떨어지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녀석이다.
나중에 녀석을 잡을 수 있을 만한 무기와 방어구, 그리고 사람들이 준비되어야 가능하겠지.
굳이 모습을 확인하지 않더라도 이미 멀리서부터 날 감지한 듯 내 쪽을 향해 달려오는 진동이 땅을 타고 몸을 울렸다.
고르곤의 진동과 달라 단번에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일단, 뒤에 단 상태로 계속 달려나갔다.
어둠 속에서 달리는 것은 몇 번 시도해서 그런지 나름 할만했다.
그 상태로 쭉 달려나가자 녀석과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기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따라잡히진 않는다는 소리.
이전에도 확인했지만, 최대 민첩과 헤이스트의 조합이면 주력은 커버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문제는 고르곤이지.
녀석은 분명히 악마형 케르베로스보다 빠르다.
아마 블링크나 기타 탈출기 등을 계속 사용해야지 떼어낼 수 있을 것이다.
뭐, 굳이 이 방법이 아니더라도 따돌릴 방법은 생각해 놓았다.
그래서 이런 일을 벌이는 거고.
보상으로 받은 르아 카르테는 교환 불가 무기.
다른 말로 하면 무조건 내게 귀속된다는 말과 같다.
누구에게 맡기고 올 수 없는 지금 내가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그런 아이템을 들고 자칫 죽을 수 있는 곳으로 간다고 하니까 재중이 형이 팀킬이라도 할 기세로 말렸다.
하지만 형도 내가 말한 방법을 듣고 난 뒤에야 마지못해 허락해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보니 이번엔 사족 보행 특유의 진동이 찌르르 울렸다.
드디어 왔나?
고르곤.
예전에 확인한 바로는 악마형 케르베로스와 달리 고르곤은 형체 자체가 흐릿했다.
그래서 어둠 속에 있으면 녀석을 발견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고 공격 대부분이 그런 형식이라 싸우는 것도 힘들었다.
아마 밝은 곳에 있더라도 흐릿한 뭔가로 보일 확률이 높았다.
빠르고, 잘 안 보이고, 강하고.
레벨과 상성을 떠나 상대하는 것 자체가 피곤한 녀석이었다.
녀석도 악마형 케르베로스와 마찬가지로 날 보자마자 신나게 달려들었다.
이제 녀석들을 데리고 이곳에서 나가면 상황 끝.
달리던 것을 잠시 멈추고 활을 꺼내 녀석들이 달려오는 방향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날리기 시작했다.
단순한 화살로 녀석들의 진격을 막을 순 없다.
다만, 화살을 날린 이유는 어글을 좀 더 확실하게 획득하기 위한 것이다.
혹시라도 쫓아오다 멈추기라도 한다면 낭패니까.
그렇게 어느 정도 어글을 먹었다고 판단한 뒤 곧장 미치광이 리치를 꺼내 들었다.
【 미치광이 리치 소환! 】
그리고 바로,
【 전이문 오픈! 】
전이문.
단순히 한쪽에서 다른 쪽을 불러오기 위한 스킬은 아니기에 이쪽 암흑 지대에서도 전이문이 열렸다.
쉽게 말하자면,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통행이랄까?
그리고 그 전이문이 열리자마자 바로 한 발을 걸쳐 언제든지 빠져나갈 수 있도록 준비를 했다.
그런데 여기서 의외의 상황이 발생했다.
전혀 고려하지도 않았고, 예상하지도 못했던 상황이.
“크아아!”
“쿠어엉!”
달려오던 고르곤이 근접해 있던 악마형 케르베로스를 공격한 것.
악마형 케르베로스는 고르곤의 공격에 떨어져 나갔지만, 이내 고르곤에게 달려들어 옆구리를 강하게 걷어찼다.
고르곤 역시 육중한 몸이 꺾이면서 옆으로 튕겨 나갔다.
체격만 보면 고르곤이 훨씬 크지만 악마형 케르베로스의 공격력이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그런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왜 지들끼리 싸워?
***
<주호> 형.
<불멸> 젠장, 뭐 잘못됐냐? 지금 연락할 때가 아니잖아. 혹시 죽었어?
재중이 형과 미리 이야기한 것이 있었다.
모든 작전이 제대로 흘러가면 다 함께 모여서 새 지역으로 떠나기로.
그런데 지금은 훨씬 이른 시간에 연락할 수밖에 없었다.
<주호> 저… 지들끼리 싸우는데요?
<불멸> 뭐?!
재중이 형이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는데 거기에 대해서 따로 해줄 말이 없었다.
<주호> 하아, 이거 작전이 틀어진 것 같아요.
물론, 둘 중 하나만 밖으로 끌어내도 왕국을 멸망시키기에는 충분하다.
아니, 차고 넘친다.
둘 다 끌어내려고 했던 것은 혹시나 모를 오차를 확실하게 줄이기 위함이었고.
그런데 지금은 그런 조심성이 상황을 이상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불멸> 일단 기다려봐. 둘 중 하나는 이기겠지.
그 말을 듣고는 어쩔 수 없이 그냥 기다렸다.
아니, 이 상황을 그냥 넘길 수 없어 같이 공격했다.
누가 이길지는 모르지만.
양쪽 다 대미지를 쌓아두면 아이템 하나 정도는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예전처럼 네임드끼리 싸워서 죽는다고 아이템이 다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결국, 내 쪽에서 공격을 해서 대미지를 쌓아야 한다.
그렇게 시작된 3파전.
한쪽이 유리하다 싶으면 한쪽을 공격하고.
다른 한쪽이 불리하면 그쪽을 도와주고.
둘 사이에 껴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작하자 물약이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암흑 지대에서 헤이스트를 계속 건 상태로 싸워야 하고, 한 방, 한 방의 후폭풍이 절대 약하지 않았다.
가령 고르곤이 앞발을 바닥에 내려찍기만 해도 주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깎여 내려갔다.
거기다 어둠 속에서 악마형 케르베로스의 공격을 피하는 것은 평소보다 배 이상의 노력을 들여야 했다.
원래라면 눈으로 보고 확실하게 피할 수 있는 공격도 스치거나 유효타로 들어왔으니까.
그런 악조건 속에서 녀석들의 패턴을 하나씩 몸에 새겼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이 경험은 나중에 정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악마형 케르베로스가 먼저 손을 떼면서 상황이 급격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 블링크! 】
바로 블링크로 사라져 버린 것.
아무리 내가 감각을 통해 많은 것을 느낀다지만 이 어둠 속에서 블링크로 사라져 버린 녀석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적어도 근처에 존재해야 기척이라도 느낄 텐데 지금은 그런 기척조차 없었다.
불리하니까 바로 튀어버린 건가?
허탈한 마음을 다잡을 여유도 없이 고르곤이 내게 고개를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온몸의 감각이 쭈뼛거리면서 경고를 알려왔으니까.
둘 사이에서 나오는 아이템은 아깝지만…….
원래 실행하려던 작전을 마무리하는 게 더 중요했다.
바로 열어둔 전이문을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뭔가 모를 공격에 전이문이 통째로 흔들리는 것까지 느끼고.
확실히 상대하기 버거운 네임드네.
그래도 여기 빛이 있는 바깥으로 나오면 또 모르겠다.
그렇다고 쉽게 잡을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고.
잠시 기다리는데 악마형 케르베로스와 달리 고르곤이 넘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지?
왜 안 넘어와?
분명히 지금쯤 눈을 부라리면서 넘어와야 정상…….
그때 갑자기 시스템 음이 울렸다.
《 개체 특성상 빛이 있는 구역을 싫어합니다. 》
《 고르곤이 전이문을 넘어오기를 거부합니다. 》
《 고르곤이 주호 님의 타케팅을 포기합니다. 》
《 고르곤의 위치가 점점 멀어집니다. 》
이건 또 개, 아니 소리야?
계속 예상치 못한 상황이 이어지자 허탈한 기분까지 들었다.
고르곤은 아예 이곳으로 넘어올 생각이 없다는 건가?
멍하니 전이문 앞에서 서 있다가 재중이 형에게 연락을 넣었다.
<주호> 형, 완전 망했어요.
<재중> 왜 또? 죽었어?!
<주호> 아뇨, 고르곤이 넘어올 생각을 안 하네요.
시스템에 대해서 설명하자 재중이 형도 어이가 없는지 그냥 웃어버렸다.
<재중> 와, 이 새끼들 골 때리네. 케르베로스는 튀어버리고, 고르곤은 안 되고, 나중에 다시 케르베로스라도 끌고 와야 하나.
<주호> 어쩔 수 없죠. 하아, 왕국 하나 무너뜨리기가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네요.
<재중> 미친 새끼. 크큭.
내 말에 기도 안 차는지 재중이 형이 마구 웃어댔다.
그렇게 온몸의 긴장이 풀리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다시 하늘을 멍하니 바라봤다.
정말 왕국 멸망으로 가는 시나리오가 쉽지는 않구나.
***
휴식 뒤 물약을 새로 채운 다음 다시 전이문을 건넜다.
이번엔 되겠지?
전처럼 고르곤을 만나지 않고 악마형 케르베로스만 끌어내어 전이문을 건너왔다.
고르곤과 다르게 확실하게 전이문을 넘어오는 녀석을 보고는 쾌재를 불렀다.
밝은 곳으로 오자 그만큼 어둠 속에서 피해 다녀야 하는 압박감이 사라져 그만큼 더 여유가 생겨났다.
<주호> 케르베로스는 넘어왔어요.
전이문의 위치는 마지막으로 넘어왔던 곳을 기억하는 시스템인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주변에 유저가 없을 만한 곳에서 전이문을 써서 넘어왔고 지금은 완전한 산속으로 녀석을 끌고 올 수 있었다.
우리 팀은 혹시 모를 유저의 접근을 막기 위해 주변에서 대기 중이었고.
옆에서 같이 망을 보고 있던 사장님에게 귓말이 들어왔다.
<카이저> 허허, 드디어 로가슈 왕국을 멸망시킬 수 있겠구나. 그럼, 우린 준비하마. 완전히 부숴버려라.
내 말을 듣고 있던 것은 사장님만이 아니었고.
<이쁜소녀> 우, 우리 왠지 악당 같지 않아요?
<방패전사> 사장님 지금 굉장히 악당 같은 멘트하셨습니다.
<카이저> 흠흠, 그렇구나.
하긴 지금 우리 포지션이 영웅의 그것과는 백만 광년 쯤 거리가 있었다.
무려 왕국을 멸망시키는 일을 꾸미고 있으니.
<막내별> 신나네요.
막내별 얘는 확실히 우리 과다.
나사 하나가 빠진.
<챠밍> 재미는 있는데 욕먹지 않을까요?
챠밍도 걱정은 하지만 그렇게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나르샤> 그래서 중간에 안 보이게 떨어뜨리고 움직일 거야.
나르샤 누나 말대로 이 녀석을 그대로 달고 왕국으로 갔다가는 서버의 전 인원들에게 욕먹기 십상이었다.
이건 예전에 유적지 하나를 터뜨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무려 서버 전체 인원의 새 지역 진입을 막는 일이니까.
어떻게 보면 예전에 죽음의 터널 사건과 일맥상통하기도 하고.
만약 이걸 들키면?
그냥 단순히 적대 길드 하나가 늘어나는 것으로 끝나진 않겠지.
아마 서버 전체 유저들을 상대로 싸움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았다.
앞으로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들키지 않을 자신은 있었으니까.
바로 미치광이 리치를 꺼내 들었다.
【 전이문 오픈! 】
그렇게 전이문을 지나쳐 주변을 뱅뱅 돌면서 악마형 케르베로스를 끌고 다녔다.
그리고.
【 전이문 해제! 】
전이문이 사라지는 것은 얼마간의 시간이 걸린다.
이건 전에 악마형 케르베로스를 암흑 지대로 버리고 올 때 이미 확인했었다.
그래서 해제를 시전하고도 전이문 주변을 한참 돌기만 했다.
얼마 뒤.
전이문이 거의 사라져갈 때쯤.
그대로 몸을 집어넣어 암흑 지대로 사라져 버렸다.
물론, 원래의 우리 세계에 악마형 케르베로스를 그대로 남겨둔 채로.
《 악마형 케르베로스가 전이문을 넘어올 수 없습니다. 》
《 악마형 케르베로스가 주호 님의 타케팅을 포기합니다. 》
《 악마형 케르베로스의 위치가 점점 멀어집니다. 》
됐다.
녀석을 완전히 떼어낼 방법.
그건 내가 반대로 전이문을 넘어와 버리는 것이다.
녀석만 남겨두고.
예상대로 녀석과의 어그로가 풀리면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주호> 다들 튀세요.
내 말에 다들 기다렸다는 듯 일사불란하게 지키고 있던 위치를 떠났다.
이젠 더 이상 주변을 살필 필요도 없고.
혹여나 여기에 관련되면 죽는 것도 문제지만 피곤한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불멸> 모두 멀어졌다. 알아서 비공정 타고 다 도망갔어.
<주호> 휴, 녀석은요?
<불멸> 현재 로가슈 왕성을 향해 전진 중.
여기까진 오케이인가.
완전 범죄.
이제 어느 누구도 우리가 악마형 케르베로스를 풀어놓았다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불멸> 이제 너도 넘어와.
재중이 형의 말에 다시 전이문을 넘어 원래의 세계로 돌아왔다.
그리고 귀환을 시전해 바로 로가슈 왕성으로 이동했다.
《 로가슈 왕성 방어전이 시작됩니다. 악마형 케르베로스를 저지하세요. 》
역시 아니나 다를까.
전과 똑같이 방어전을 위한 시스템이 발동되었다.
그때는 우리가 없어서 순식간에 거대한 하르 기둥까지 파괴되었지만, 지금은 어떨까?
생각해보니 이대로 악마형 케르베로스를 잡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닌데?
물론, 지금은 굳이 케르베로스를 상대로 모험을 할 필요는 없었다.
<주호> 다들 넘어가죠.
뒤는 돌아보지 않는다.
이 결과로 로가슈 왕국이 멸망하든, 멸망하지 않든.
방어전에 참여를 하지 않는 이상 이미 우리 손을 떠난 일이니까.
이미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먼저 와서 기다리던 우리 팀과 사장님 그리고 연합 유저들이 모두 황금색 티켓을 들고 시즌 업데이트로 새로 생긴 거대한 정기선 앞에 모여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방어전을 한다고 성벽을 향해 뛰어갔지만 우리는 저들과 입장이 달랐다.
지금 이곳을 떠날 테니까.
그리고 내가 도착하자마자 차례대로 탑승을 시작했다.
그때.
“꺅!”
“뭐야?”
로가슈 왕성 전역이 뭔가에 얻어맞아 큰 지진이 일어나는 것이 지면을 통해 느껴졌다.
아주 강력한.
무언가에 의해.
벌써 시작한 건가.
“빨리 타요. 시간이 촉박하네요. 늦었다가 휘말리겠어요.”
지금이야 문제가 없지 안쪽까지 들어오면 정신없어진다.
잘못하다 여기가 터지기라도 하면 이 모든 일이 의미가 없어지고.
내 재촉에 속도를 내 모두 정기선에 빠르게 올라탔다.
《 왕국 정기선 이용권을 확인합니다. 》
《 확인 완료. 》
《 하르 수출을 위한 왕국 정기선에 탑승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
그렇게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정기선에 올라타자 드디어 정기선이 떠올랐다.
《 왕국 정기선이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
하늘로 오르자 자연스럽게 왕성 성벽 주변으로 쭉 펼쳐져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비장한 각오와 함께 악마형 케르베로스를 막아서는 모습이.
물론, 케르베로스의 스킬 한 방에 유저들이 일자로 깔끔하게 녹아버렸다.
성벽이 무너지고.
유저들도 사라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마형 케르베로스를 잡기 위해 달려드는 사람들은 끝이 없었다.
쪽수로 잡을 수 있었다면 우리가 그 고생은 안 하지.
그렇게 정기선이 쭉 떠올라 사람들이 점으로 작게 변해가는 것을 지켜봤다.
그래, 계속 고생해라.
우린 먼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