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95화 빛이 머무는 곳, 유적지 (3)
“지금 장난하세요?
악마가 손에 들고 있던 펜을 으스러지게 잡는다.
“대체 얼마나 모자란 겁니까?”
그리고 기어코 앞에 서 있던 마법사 복장의 남성 길드원에게 한숨 쉬면서 이야기한다.
“2만에서 5천정도…….”
“하아, 미쳐 버리겠네.”
악마가 머리가 아픈지 곧장 고개를 짚는다.
“대체 왜? 충분하다고 결론 내렸잖아요. 장사로 사들이는 양도 계속 늘어날 거고 혹시 몰라서 일부러 선박도 더 끌어들여 조건부로 하르 가루를 캐게 했는데도 모자랍니까? 하루가 늦어져서 따라잡히면 손해가 얼만지 알아요? 지금 여기에 얼마나 쓴지 잘 아시잖아요.”
“그게…… 시장 쪽 거래가 완전히 막혔습니다.”
“아니, 대체 왜? 잘 나가고 있었잖아요. 담합한 길드들은 대체 뭐하고? 충분히 찔러준 걸로 아는데. 혹시 그놈들이 더 달랍니까? 이제 와서 값을 올린답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럼 왜?”
“일단 이걸 좀 보시죠.”
길드원이 슬쩍 거래 사이트를 띄워서 악마에게 보여준다.
“하, 이 새끼들 미친 것 아냐?”
쾅.
거래 사이트를 보자마자 책상을 팔로 강하게 내려쳤다.
“말이 돼? 이게?”
악마가 보는 거래 사이트에 하르 가루가 10개당 만원에 거래가 되는 중이다.
대부분이 거래 완료가 떠 있어서 그런지 그간 올렸던 하르 가루 역시도 싹 가격을 올린 상태고.
“거래 사이트뿐만 아니라 시장에서도 사람들이 일제히 가격을 올렸습니다. 급하게 파는 사람들 외에는 그냥 가지고 있는 것을 택한 모양인지 매물도 나오지 않는 중입니다.”
“대체 어디 쪽입니까? 이런 장난질을 할 놈들이.”
“아마 저쪽에서 가격을 높이기 위해 작업을 걸고 있다고밖에는…….”
길드원의 말에 악마가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고민에 빠졌다.
그러기를 한참 지나가 악마가 입을 열었다.
“연락해서 장난은 여기서 그만 끝내자고 해요. 평상시 가격의 두 배로 쳐 준다고 하면 대충 알아먹을 겁니다. 아니면 담합한 거 싹 불어버리고 같이 죽는 수가 생긴다고 전하고요.”
이 새끼들.
감히 이런 같잖은 장난질을 쳐?
악마가 짜증이 나는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이쪽도 라인이 있듯이 저쪽에도 라인이 있다.
한참 본 대륙이 열려서 시세가 왔다 갔다 할 때가 가장 돈놀이를 하기 좋을 때니까.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 왜! 두 배로 쳐준다고 했잖아요.”
“자기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놈들 말고 또 누가 있어요? 장난합니까?”
중간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길드원에게 짜증이 난 악마가 직접 저쪽 라인과 연결을 했다.
<악마> 적당히 하자? 응?
<나탈리> 어머? 우리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우리도 이번에 손해가 얼마나 큰지 알아?
볼 때마다 짜증 나게 구는군.
<악마> 세 배. 더는 안 돼.
<나탈리> 자기 생각보다 돈 많았구나? 처음엔 그렇게 빼더니.
<악마> 한 번만 더 장난치면 그땐 진짜 재미없을 줄 알아.
<나탈리> 근데 진짜 미안해서 어쩌지? 우리 아니라니까. 주고 싶어도 우리도 못 구해 지금.
<악마> 그럼 대체 누군데?!
<나탈리> 우리도 좀 알았으면 좋겠네. 그쪽으로 지금 장사 올 스톱이라.
세 배를 때려도 안 판다는 건 정말 없다는 뜻이다.
더 이상 붙들고 있어 봐야 답도 없고.
<악마> 알아내면 연락해.
악마가 바로 연락을 끊고 생각에 빠졌다.
표면에 드러나서 싸우다가 주호가 우리 길드에 반감이라도 가지면 곤란해서 어쩔 수 없이 올인 라인을 썼는데 완전 말려 버렸다.
올인 라인을 부추긴다고 돈은 돈대로 쓰고 입막음한다고 또 돈을 쓰고, 제우스 쪽도 마찬가지.
전설에서 빌려온 애들은 한 것도 없이 아주 형편없이 깨졌다.
그렇다고 이제 와 다시 다른 길드를 꼬셔 일을 꾸미기에는 시간도 돈도 문제다.
제우스 쪽에서 받은 자료로 최강이 엄청나게 앞서나가고 있다는 소리를 듣지만 않았으면 이 정도로 급하게 진행하지 않았을 것을 너무 서두른다고 전부 엉망이 됐다.
“하,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네.”
차라리 그냥 올인 라인과 함께 최강을 칠 것을 그랬나.
그랬으면 최소한 하르 가루로 이렇게 고민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때 다시 길드원이 연락을 받고 와서 바로 보고를 했다.
“저기, 또 문제가 생겼답니다. 누군가 지하수로로 들어가는 방법을 게시판에 푼 것 같습니다. 현재 엄청난 인원이 지하수로로 들어와서…….”
길드원의 설명을 모두 들은 악마가 결국 참지 못하고 건물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
< 로스트 스카이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 뇌파 확인.
> 주승호. 남성.
> 캐릭터명 주호. 레벨 37.
> 로딩 중…….
<챠밍> 어서 오세요.
<이쁜소녀> 푹 쉬셨어요?
<방패전사> 좀 늦으셨네요. 다들 준비됐습니다.
<주호> 제가 좀 늦었죠?
<챠밍> 많이 안 늦으셨어요.
<이쁜소녀> 괜찮아요.
창고 앞에서 일단 모이기로 하고 좀 기다리니 재중이 형도 접속했다.
<불멸> 내가 꼴찌네.
<주호> 술을 그렇게 마셨으니까요.
<불멸> 오랜만에 달려서 그런지 힘드네.
고기 파티에 이어 술도 잔뜩 마셨더니 생각보다 잠을 많이 자버렸다.
그리고 밤사이에 재미난 일도 잔뜩 일어났고.
<카이저> 아주 제대로 엿을 먹인 거 같구나. 시장 쪽은 싹 얼어붙었다. 매물이 싹 들어갔어. 가격도 확 오르고.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은 소문에 진짜 민감하다.
어떤 아이템이 비싸고 싼지 조금만 차이가 나도 금방 시장에 반영이 되니까.
일단 한쪽은 임시방편이지만 해결했고.
<주호> 지하수로 쪽은 어때요?
솔직히 이쪽이 더 문제다.
시장 물량이야 나눠 먹는다고 치더라도 여기는 미리 자리 잡은 일부 길드들이 독점에 가깝게 긁어모으고 있었으니까.
<카이저> 지금 하르 가루를 캐러 간 사람들하고 계속 긴장 상태다. 거긴 아주 전쟁이야. 전쟁.
하루 가루가 한 자리에 고정적으로 계속 나온다면 그냥 주야장천 그 자리에 서서 캐면 되는데 한 번 캐고 나면 조금 다른 위치에서 리젠이 되니까 완전 옆에서 나오면 자기 자리라고 주장하기가 힘들어진다.
지하수로 자체가 넓기도 하고 독점을 하고 있을 때야 좀 옆에서 나와도 서로 부딪칠 일이 없겠지만 지금은 조금만 눈을 돌리면 경쟁자니까.
경쟁자가 많아지면 당연히 개인의 채굴량 자체가 현저하게 떨어진다.
<주호> 그쪽도 어느 정도 해결됐네요.
아마, 상위 길드에서 담합을 하고 라인을 만들어서 광부들을 밀어내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반대로 밀릴 수도 있고.
그 상황에서 서로 엄청난 출혈이 일어날 테고 배보다 배꼽이 큰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
<카이저> 서로 박 터지게 싸워주면 우리야 고맙지.
<주호> 크게 한 번 싸울 것 같아요?
<카이저> 이미 여러 번 싸움이 났지. 누가 크게 한 번 불만 붙여주면 아주 난리가 날지도 모를 정도야. 들어가 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고. 진짜 개판이니까.
괜히 들어갔다가 휘말리면 정말 피곤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말이네.
우리가 시궁창을 만들어놨는데 거기 들어가서 같이 휘말리는 것처럼 웃기는 일도 없다.
<주호> 당분간 저주받은 숲으로 가야겠네요.
<카이저> 멀긴 해도 애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사실 우리 말고 다른 팀들은 전부 저주받은 숲에서 사냥 중이다.
던전은 경험치에 비해서 몹이 너무 강해 효율이 안 나온다고 해야 하나.
우리야 방패전사가 버텨주니까 마음 놓고 가서 사냥을 하는 거다.
보물상자에서 터진 대박 덕분에.
지하수로에서 사냥하면서 발견한 상자는 딱 세 개.
한 번은 방패전사의 방패 기술. 다른 두 번은 용도를 알 수 없는 기념주화가 두 개 나왔다.
기념주화는 쓸 곳을 몰라 일단은 내 인벤에 고이 잠든 상태고.
미믹.
현재 아는 선에서 열쇠를 드랍하는 유일한 몹이다.
일단, 보물상자를 열려면 미믹을 잡아야 하는데 미믹이 어디서 나오는지 전혀 모르는 것이 문제다.
당장은 열쇠를 얻으려면 방어전이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잠시 대화를 나누다 일단 전부 부둣가의 소형 카락에 올라탔다.
“할 수 있는 것 먼저 하죠.”
거대 개구리는 사람이 좀 빠지면 들어가서 잡고 나오면 되니까.
지하수로 통제도 통제지만 해적선과 크라켄은 리젠 시간에 맞춰서 무조건 잡아야 한다.
예정된 시간에 맞추려면.
재중이 형이 올라타자마자 바로 배를 베네아에서 바다로 띄웠다.
“정말 많아요.”
이쁜소녀가 소형 카락에 올라타 주변을 둘러보는데 며칠 사이에 정말 배가 엄청나게 늘었다.
바로 옆에도 똑같은 소형 카락이 아슬아슬하게 부둣가에 배를 대고 있었다.
베네아 부두를 가득 채우고 있는 선박들 때문인지 바다로 빠져나가기조차 쉽지 않다.
“이제 싣고 올 사람들도 별로 없으니까 곧 골칫덩이로 전락하겠네.”
재중이 형이 쭉 둘러보다가 남긴 한 마디.
수송업도 이제 단물이 다 빠진 거의 끝물이다.
“그럼, 저 배들은 다 어쩌죠?”
챠밍이 궁금한 듯 옆에서 묻는데 이건 나도 딱히 생각한 바가 없다.
“싸게 조선소에 처분하거나…… 어떻게든 써먹을 방법을 찾겠죠. 본 대륙 여행을 해도 되고요.”
어떤 식으로든 적자를 보지 않으려면 각자 쓸 방법을 찾아 나설 것 같다.
우리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
“진짜 3일만 버티자였는데…….”
“우리 이제 어떻게 해요?
“망했어요.”
방패전사, 챠밍, 이쁜소녀의 이어지는 한탄이 소형 카락의 갑판을 따라서 공허하게 퍼져나간다.
“저게 대체 몇 척이야?”
크라켄의 사방을 가득 메운 소형 카락 수십 척이 역시 수십 개의 큰 다리에 걸려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묶여 있다.
억지로 함포를 쏘는 배도 있고 사람이 뛰어내려서 헤엄치고 가다가 죽는 경우도 보인다.
“진짜 레이드네요.”
도합 수십 척의 배에 거기에 탄 수백의 사람이 참가하는 대규모 레이드.
사실 저게 맞다.
운영자들 입장에선 아마 저렇게 잡으라고 만들어둔 레이드가 맞을 것이다.
우리가 너무 쉽게 잡아서 그간 몰랐을 뿐.
목숨을 걸어가면서 치열하게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 저 기백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존경할만하다.
우리가 잡아야 할 크라켄만 아니었다면 말이지.
거기다 침몰할 선박의 값까지 생각하면 정말 무식하게 잡고 있다.
남아도는 선박을 저렇게 써먹을 줄이야.
재중이 형도 이건 예상을 못 했는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레이드 현장만 멍하니 보고 있다.
“해적선도 딱히 다를 것 없을 것 같은데요.”
방패전사가 손가락을 움직여서 홈페이지를 띄워서 한 영상을 보여준다.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해적선 레이드에 또 수십 척의 배가 붙어 있다.
물론, 올라탔다가 독과 블러드 공격에 전멸당하는 웃긴 상황이 연출되고 있지만.
해적선에 올라타는 건 진짜 소수로 해야 겨우 될까 말까 한데 저렇게 우르르 올라타서는 끝없이 쏟아지는 바닥 장판에 도망갈 자리도 없이 그냥 몰살이다.
그래서 결국은 함포로 해적선을 침몰시키는데 저렇게 하면 드랍템이 안 나온다.
하르 조각이 목적이라면 저렇게 하는 것이 맞긴 한데…….
씁쓸하네.
하르 가루의 가격이 올라가면서 하르 조각 자체도 엄청나게 비싸다 보니 대박을 노리고 쓸모가 없어진 선박을 여기에 투자하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가 리젠 시간을 맞춰놔도 바다가 넓다 보니 찾아다니다 보면 어느 정도 타임 리스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사이에 다른 배가 싸우기 시작하면 정말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되어 버린다.
지금이 딱 그 상황이고.
1서버에선 진짜 쉽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이쪽은 포기하죠. 이제.”
저 정도로 많은 선박 숫자면 같은 시간을 돌아다녀도 우리가 먼저 크라켄이나 해적선을 찾아낸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
괜히 시간 낭비하느니 이쪽은 손을 떼고 다른 것을 찾는 편이 낫다.
“매번 쉽지 않네요.”
하르 가루의 가격을 올려둔 것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자연스럽게 하르 조각을 주는 해적선, 크라켄에 눈이 돌아가 저렇게 무리를 해서라도 잡는 중이고.
나비 효과도 이 정도면 완전 어이없음이다.
이제 기댈 수 있는 곳은 거대 개구리뿐인가?
거기도 찾아가려면 현재 전쟁 중인 지하수로를 파고들어야 하는데…….
앞뒤로 꽉꽉 막혀 버렸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그렇긴 한데…….”
재중이 형 말대로 봐둔 네임드가 있긴 하다.
멀리서 보고 답이 안 나와서 일단 보고만 온 상태긴 하지만.
목록을 보니 1000개짜리 네임드라서 해적선과 크라켄의 공백을 메울 수 있기는 한데 당장 잡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서 문제다.
어떻게 한다.
그때, 갑자기 서버 전역에 시스템 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 베네아 지역의 몬스터들이 한계점을 넘어 하르 원석에 이끌립니다. 베네아 방어전이 곧 시작됩니다. 》
“정말 아주 죽으라는 법은 없네요.”
행운의 여신이 마지막으로 우리 손을 들어주는 건가?
유적지로 가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