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69화 본대륙 (5)
다른 사람들보다 목표지점이 훨씬 가까웠던 덕에 교역소와 조선소까지 들러서 빠르게 정보를 알아내고 난 후 곧장 도시 중앙의 빛이 솟아오르는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 중앙에 거의 3m가량 되는 투명한 크리스탈 같아 보이는 비석이 서 있었는데 근처로 다가가니 바로 귀환지를 지정할 수 있었다.
“이제 죽어도 괜찮겠네.”
“안 죽는 게 더 낫죠.”
이제 죽으면 경험치도 떨어뜨리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안 죽는 편이 낫다.
시작부터 귀환지 지정을 한 번도 안 하고 바다를 반쯤 건너서 죽으면 여기로 바로 넘어올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려나?
중세풍의 넓은 광장에 단둘이 앉아서 멍하게 기다리고 있으니 잡생각이 엄청나네.
길드 채팅과는 별개로 지금 여기로 온 사람들만 이야기할 수 있는 방을 개설해놓고 쭉 간략한 말들을 주고받고 있는데 일단은 전부 광장으로 모이기로 하고 조금 더 기다리고 있었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모두 한 자리에 다시 모였다.
딱히 주변에 사람들도 없어서 눈치 보지 않고 그냥 광장 한가운데 앉아서 정보를 주고받다 보니 대략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윤곽이 떠올랐다.
“네임드에 이름이 사라진 이유가 제작이 되기 때문이라…….”
사장님이 체리와 해신이 무기점에 들렸다가 알아온 정보를 듣고는 이해득실을 따지기 위해서 생각에 빠져 드셨다.
패치 하나에도 아이템 가격이 출렁출렁거릴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점은 다들 민감할 수밖에 없다.
“핵심 재료 템이 어느 정도나 풀리는지 보고 결정하기로 하지.”
사장님이 한참 고민하시더니 결국 애매한 대답만 내놓으셨다. 무기가 많이 풀려서 가격이 내려가는 것 이상으로 지금은 치고 나갈 무기가 필요하니까 섣불리 팔아버리긴 힘들다.
아예 상위 템이 생기면 또 모르겠지만, 일단 정보가 너무 없다.
다른 정보도 들어보니 도시 자체로 토벌 퀘스트 같은 것도 있고, 대단위로 몬스터가 몰려오는 것을 막아내는 퀘스트도 있는 모양이다.
“유적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가만히 듣고 있던 챠밍이 살짝 손을 들어 유적지를 언급했다.
유적지?
분명히 업데이트된다고 본 것 같긴 한데 정보가 없어서 잊어먹고 있었다.
“자세한 것까지는 알려주지 않던데 이 도시도 최초엔 유적지였다고 하던데요?”
의외로 마법 도구를 알아보러 갔던 챠밍이 마법 상점에서 뜻밖의 정보를 물어왔다.
정말 뜻밖의 정보에 뜨거운 시선들이 모이자 챠밍이 부끄러워하는 듯 살짝 고개를 돌렸다.
“자자, 정보가 더 없으니 그건 다시 도시를 돌아보면서 추가로 알아보기로 하고, 그래서 배를 살 수 있다고?”
사장님의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것이 사장님도 냄새를 맡으신 모양이다.
“케르베로스를 잡고 난 뒤에 얻은 잡템들 하나도 버리면 안 되겠던데요. 발톱이 증표 같은 겁니다. 조선소에서 배를 사거나 수주할 수 있는 증표요.”
재중이 형이 점원에게서 알아온 이야기들을 하나둘 풀기 시작했다.
“그럼, 케르베로스를 못 잡은 사람들은 배를 구할 수 없어요?”
이쁜소녀가 손을 살짝 들어서 궁금한 점을 물어본다.
“정답. 뭐, 다른 네임드를 잡아서 증표를 얻거나 다른 방법으로 증명하거나 하는 식으로 등급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지금 당장은 우리만 살 수 있어요.”
이게 중요하다.
나중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점원들이 당장은 우리 외의 사람들에게 어떤 배도 내어주지 않는다는 점이 그간의 고생을 싹 녹여주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렇다고 해도 당장 커다란 배를 살 수 있고 그런 건 아니에요.”
재중이 형이 다들 너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니까 손을 저으면서 분위기를 좀 진정시켰다.
“당장 쉽게 살 수 있는 건 바사, 코그선 정도고 소형 캐러벨이나 경 캐러벨은 돈을 좀 모아서 살 수 있을 것 같네요. 다우나 소형 카락은 캐러벨 보다 가격이 배에 가까워서 이건 좀 무리를 해야 살 수 있을 겁니다.”
아까 옆에서 같이 가격을 봤는데 소형 카락은 지금 우리 입장에서 도저히 쉽게 살만한 가격은 아니다.
지금 나온 배 중에서는 우리가 쓰기엔 좀 부담스러울 정도다.
“그 이상은 등급 제한이 걸렸는지 점원이 아예 보여주지도 않더군요.”
사실 그 이상은 보여줘 봐야 사지도 못하니 상관없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자! 의견 좀 모아볼게요. 앞으로 2주. 이걸 최대한 효율적으로 썼으면 좋겠는데 좋은 의견 있으면 말해보세요.”
재중이 형이 손뼉을 마주치면서 이목을 다시 집중시켰다.
“배를 사서 선착장과 섬 사이를 오가면 돈이 좀 되지 않을까요?”
방패전사가 슬쩍 손을 들어서 이야기를 꺼냈다.
확실히 저건 배를 보면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의견이다.
갈 때는 아이템을 사다가 팔고, 올 때는 사람들을 태워 오고.
“기각. 돈은 꽤 벌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우리가 돈이 급한 건 아니니까요. 우리 경쟁자들을 여기에 내려놓고 저희는 배 타러 나가면 이미 주객전도에요.”
방패전사의 의견이 막히자 챠밍이 의견을 냈다.
“한 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프리미엄을 붙여서 경매 형식으로 소수만 받는 건요? 그럼 배 가격 정도는 충분히 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소수만 아주 비싸게 받자는 건가? 나름 괜찮네. 경쟁자가 우르르 본대륙에 오는 건 문제지만 소수라면 어느 정도 감안 할만하다.
거기다 배를 산 돈을 싹 뽑아낼 수 있으면 충분히 남는 장사고.
“그건 괜찮네요. 다른 의견은요?”
이어서 사장님, 팀원들도 하나씩 의견을 내놓았다.
그냥 배를 무시하고 사냥을 가자는 의견, 배를 사서 길드원들만 태워서 오자는 의견도 있었다.
거기다 아예 배로 약탈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의견이 나오는 것을 잘 살펴보니 사장님 쪽 팀원들의 성향이 보이는 것 같다.
사냥은 해신이, 약탈은 천둥이, 길드원들 생각은 아이꿍이 하고 체리는 딱히 의견을 내지 않고 결정 나면 따르겠다는 눈치다.
사실 배로 아무것도 안 하면 그냥 딱 제자리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길드원들은 태워오는 것에 대해선 말이 좀 있긴 했는데 사장님이 조만간 결정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냈다.
아무래도 파벌이라는 것이 귀찮긴 귀찮은 모양이다.
이럴 바엔 그냥 분리하는 편이 낫지 않나?
약탈은 재밌겠는데 일단 의견을 좀 더 들어봐야겠지.
내가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챠밍과 이쁜소녀가 크라켄과 해적선을 잡으러 가자고 이야기할 때는 다들 그냥 웃어 보였다.
저거 농담 아닐 건데…….
어차피 어떤 식으로든 배를 타고 나가면 한 번쯤 부딪칠지도 모르니까 아주 말이 안 되는 소리도 아니다.
“흠, 의견이 많아서 결정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겠네요.”
사장님과 재중이 형이 따로 걸어가서 한참을 이야기 나누더니 결론이 난 듯 사장님이 모두를 불러놓고 다시 말을 꺼냈다.
“일단 베이스는 챠밍 님 의견대로 가고 대신 횟수를 두 번이나 세 번 정도로 늘리자. 그 정도라면 사냥에 지장도 없을 것 같고 뱃값 이상으로 벌 수도 있을 테니 괜찮은 것 같은데 다른 의견 더 있으면 말하고.”
재중이 형이 처음에 말한 대박에서는 다소 멀어진 느낌이긴 한데 어차피 기다리다 보면 코그선으로도 몇 명씩 타고 넘어올 거니까 우리가 먼저 경매로 비싸게 데리고 오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인다.
초반에 바싹 당길 수 있는 좋은 환경이긴 한데 왜 이렇게 뒤가 찜찜하지…….
2주.
정기선.
코그선.
프리미엄 경매.
해적.
약탈.
순간 머리에 뭔가가 확 하고 스치듯 지나간다.
“저기 사장님, 혹시 해적들이 어떤 배를 타고 다니는지 알아봐 주실 수 있어요?”
“음, 뭐 어려운 건 아니지. 본 사람들한테서 정보가 나왔을 테니까. 그건 왜?”
“먼저 알아봐 주세요. 이유는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불멸 형.”
“너 또 뭐 생각났구나?
재중이 형이 날 보면서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사실 재중이 형도 지금 나온 결론에 좀 답답해하는 것 같았는데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
“지금 사람들 수준으로 케르베로스를 정상적으로 깨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음, 빠르면 3주? 거의 한 달은 걸릴 것 같은데. 그러니까 저렇게 빠질 것을 알면서도 코그선을 타려고 난리지.”
“그 정도면 충분하네요. 혹시 아까 조선소에서 깃발 올릴 때 그거 교체가 가능했었어요?”
“아, 그거? 길드 마크 맞춰본다고 한 번 보긴 했는데 가능할 거다.”
이건 될 거 같기도 한데?
“주호야, 해적들 배 전부 정기선하고 똑같이 생겼다고 하는데?”
역시 사장님.
순식간에 알아봐 주시네.
“정기선하고 같으면 소형 카락이네요. 이제 시간이 없어요. 다들 빠르게 움직이죠.”
내가 간략하게 앞으로의 일들을 설명하고 바로 조선소로 달려나가자 모두 나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이젠 정말 시간이 빠듯하니까 한시라도 빨리 조선소에 도착해야 한다.
***
“소형 카락이 선수포 1문, 선미포 1문, 선측포 10문이네요. 그럼, 12문인데…….”
“너 아주 작정을 했네.”
함포를 고르는 날 보더니 재중이 형이 보면서 혀를 찬다.
“팰콘포가 나을까요? 미니온포가 나을까요?
“그것들 제일 싼 거 아냐?”
어차피 달 수 있는 포도 많이 없지만 함포 가격이 장난이 아니기도 하다.
팰콘포를 하려다가 미니온포로 바꿨다.
확인해 보니 가격 대비 사거리가 그나마 좋다.
“더 좋은 건 나중에 바꾸죠, 뭐.”
소형 카락도 비싸기는 해도 아주 못살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혼자는 부담이 돼서 길드원들에게 일정량 투자를 받았다.
어차피 이건 금방 돌려줄 돈이다. 곧바로 돈이 나올 곳이 있으니까.
“일단 시험해 보고 길드원들 태우러 가죠.”
어차피 우리끼린 이걸 다 못해 먹는다.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방랑하는 숲에 남아 있는 길드원들이라면 그걸 충분히 메워줄 수 있고.
아주 남보다는 그래도 한 가족이 낫지 않을까.
내 의견에 사장님이 특히 좋아하시는 모습이다.
이번 일로 길드원도 좋고 사장님도 좋고 갈라져 가던 부분을 봉합하기도 좋다. 물론 그 사이에서 충분한 돈을 받아서 더 좋고.
“운임은 제대로 받을 겁니다.”
“이미, 이야기 다 끝냈다. 넘어올 수만 있으면 그깟 돈이 문제냐고 하더라.”
지금 방랑하는 섬에서는 돈이 있어도 여기로 못 넘어오니까. 이렇게 내민 손을 뿌리치긴 힘들었을 것이다.
함포를 실은 가격까지 모두 치르고 모두 곧장 올라탔다.
우리가 타고 온 소형 캐러벨보다 훨씬 넓은 선적 공간에 모두 만족해하면서 여기저기 둘러보기 바쁜 모습이다.
삼각돛과 사각돛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우리 배가 베네아의 부둣가에서 조금 먼 바다로 나가자마자 곧장 깃발을 교체했다.
“급하게 만든 것 치곤 괜찮네요.”
하늘 높이 펄럭이는 전형적인 해골 깃발에 선원들만 선실로 숨기고 나면 누가 봐도 해적선이다.
한참을 초보 섬 쪽으로 거슬러 내려갔을 때 갑판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저기 코그선 한 대 옵니다.”
방패전사가 멀리서 느린 속도로 베네아로 다가오는 코그선을 발견하자 다들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사장님이 조타를 돌려서 소형 카락을 옆으로 돌려세우자 1층 포갑판에서 총 5문의 미니온포가 측면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함포는 한 번도 못 쏴봤는데…….”
“그냥 슈팅 게임 한다고 생각해.”
나와 재중이 형, 해신, 그리고 원거리 감각이 좋은 나르샤와 수아가 각각 한 포씩 잡고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사정없이 쏘기 시작했다.
처음엔 상당히 먼 곳에 떨어지던 포탄의 각도와 거리를 감각이 좋은 사람들이 조준하기 시작하자 금세 정타로 코그선을 맞춰 버렸다.
그대로 포탄을 몇 대 더 맞은 코그선이 반항조차 못 해보고 바닷속으로 끌려들어 갔다.
“됐다.”
그래, 이건 그냥 간단한 문제다.
이제부터 섬은 우리가 통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