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13화 (13/1,404)
  • # 13

    #13화 하늘에서 빛이 내리면 (7)

    내가 짠 계획은 단순하다. 그러나 치명적일 것이다. 확신은 없는 데 될 것 같은 그런 기분?

    “제가 마지막까지 남아서 뭐 했는지 궁금하시죠?”

    “네.”

    이구동성. 자기 전 이야기를 들려주는 부모님을 보는 눈빛들. 초롱초롱하구나.

    첨에 오크 족장의 포효를 막아낼 방법을 찾았을 때 고민을 잠시 했었다.

    공격의 레이드 팀에 알려주면 아마도 오크 족장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클리어하고 나서는? 남는 게 없다. 포효를 깰 방법을 알려준다고 공격이 ‘어이쿠! 감사합니다. 제가 보답으로 아이템을 왕창 넘겨드리죠.’라고 할까?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르듯 입을 싹 닦아버리면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될 뿐이다.

    이 방법은 일회용이다. 게임사가 바보가 아닌 이상은 바로 막아버릴 것이다. 멧돼지가 그러했듯이. 그래서 그 순간 이 일회용을 좀 더 알뜰하게 쓰기로 했다. 딱히 절친도 아닌 공격의 레이드 팀을 위해서 쓸 이유는 하등 없다.

    “그때 생각한 것이 레이드 팀을 새로 만들자였거든요.”

    “확실히…… 족장의 포효만 막아내면 레벨이 좀 모자라더라도 충분히 되겠죠.”

    이미 오크 족장과 푸닥거리를 해본 방패전사의 평이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것.

    애초에 오크 족장의 꼼짝도 못 하는 포효가 무서운 것이지 다른 구간에서는 어떻게든 물약으로 비벼 볼 수 있다. 재중이 형네도 포효 구간에서 절반 넘게 떨어져 나갔다고 하니까. 다른 팀도 마찬가지고.

    “물론 확실한 방법을 가진 이상 레이드 팀에서 보상을 훨씬 많이 먹을 생각이었죠.”

    “그런데 생각이 바뀌셨다?”

    “네, 글레이브 구간에서 싸우다 보니까 자꾸 눈에 걸리는 것이 있던데요?”

    “어떤?”

    “또 다른 가능성을 봤거든요. 그러다 보니 굳이 레이드 팀을 만들 필요가 없을 것 같던데요? 그걸 확인하려고 좀 늦게 나온 겁니다.”

    그 뒤로 한참 동안 설명이 이어졌다.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네? 그런 게 가능해요?”

    챠밍이 깜짝 놀라고.

    “저기…… 그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저희 문제가 될지도 모르겠는데요?”

    방패전사는 좀 부담스러워한다.

    “전 할게요.”

    챠밍은 그다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손을 들며 한다고 한다.

    확실히 챠밍은 재밌으면 그냥 뒤는 안 보는 스타일 같다. 금세 표정이 돌아와 반달로 휘어진 눈웃음이 나를 관통하려 한다. 부담스럽네. 저런 눈빛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만 같다.

    이 여자도 좀…… 확실히 어딘가 다른 묘한 느낌이 있다.

    “전 재밌을 것 같네요. 뭐, 문제 같은 건 그때 가서 생각해 봐요.”

    “저도…….”

    이쁜소녀도 다시 살아난 눈빛으로 내 손을 들어준다. 다시 오크 족장을 상대해 보고 싶은 생각이 가득한 모양이다. 눈빛이 이글이글하다.

    오케이, 두 명 확보. 이쁜소녀도 찬성이고 방패전사까지 손을 들면 계획의 칠 부 능선은 넘어간다.

    “넷이서 될까요? 딜량이 좀 적지 않을까요?”

    방패전사는 첨에 좀 놀란 것을 빼고는 다시 평정심을 찾은 듯 조곤조곤 물어온다. 그러고는 가능성을 검토한다.

    “좀 오래 잡아야 할 거예요. 근데 해보니까 전 될 것 같긴 하던데요? 안 되면 뭐…… 어쩔 수 없겠죠?”

    내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능청스레 말을 이었다.

    “이거 참…… 이러면 빠질 수 없겠는데요.”

    방패전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이로써 모두 참가다.

    ***

    다들 오크 족장을 상대하느라 지쳐있던 상태여서 접속을 끊었다.

    다음날, PC방에 출근해서 게시판을 보니 각 서버의 오크 마을마다 성공 여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현재 총 12개 서버에 10개 마을씩 하면 120개 오크 마을이 있는데 이 중 과반인 60개보다 적은 45개의 오크 마을이 성공해 공지로 올라와 있는 상태다.

    “휘유! 하루 만에 다들 대단한데?”

    재중이 형이 공지를 보더니 살짝 감탄 중이다.

    “뭐, 그래 봐야 형네보다 하루가 늦어요. 오늘 저녁이나 돼서야 다음 지역 가보겠네요. 저 사람들은.”

    “너희 지역은? 아직이야?”

    “네, 어제 왕창 깨졌어요. 따로 결성한 레이드 팀이 전부 초전박살 났죠 뭐.”

    “거봐라. 내가 뭐랬냐. 그럴 것 같다고 했지? 너 그냥 옆 마을로 옮겨가. 내가 보기엔 진짜 가망 없다. 니들 마을. 지금이라도 걸어가면 내일은 다음 맵 넘어갈 수 있으려나.”

    “다들 오늘 또 도전한대요.”

    그 말에 재중이 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실력도 안 되는 애들이 욕심만 많아서는. 애초에 제대로 된 팀으로 구성했으면 벌써 깨고 지나갔지. 인과응보다. 깬다고 해도 통행료 수수료가 반 토막 나겠는데?”

    “감수해야죠.”

    “너희도 다시 하냐? 한 번 해봐서 안 되면 어지간해서는 안 될 건데.”

    “전 그냥 빠지기로 했어요. 글레이브 구간에서 피를 반도 못 뺐는데 더 해봤자 승산 없어 보였어요. 오히려 서로 걸리적거려서 더 맞았다고 해야 하나요. 사람이 많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던데요.”

    “그것도 그렇지. 센스 없고 손발 안 맞는 애들하고 뛰면 그게 더 힘들어.”

    “새 지역은 어때요?”

    “조금 힘들지. 늑대들이 아주 힘이 철철 넘쳐흐르더라. 장비도 싹 다시 바꿔야 해. 강화석 써먹으려면.”

    “역시 다 쓰나 보네요.”

    “어, 우리가 지금 남한테 그거 팔 여력이 있겠냐. 다 써야지. 몇 명은 팔아서 현금으로 바꿨다던데 그거 다 헛짓이지. 너무 축배를 일찍 들었어. 걔들은 조만간 다 뒤로 쳐질 거다.”

    앞서 나가는 팀 입장에선 확실히 그럴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돈을 버는 때가 아니라 돈을 써야 할 때야. 아낌없이 쏟아부어도 따라가기 힘든데.”

    “형도 현질 좀 했나 봐요?”

    “어, 일단 여윳돈으로 밀고 있는데 이거 바닥나면 어쩔까 고민 중이다. 어디 돈 나올 데 없을까?”

    “적금 깨시죠?”

    “안 돼. 만기야, 아까워서 못 깨지.”

    “사장님은요?”

    “뭐, 그런다고 내가 진짜 사장님한테 손을 벌리겠냐.”

    “그럼 그냥 열심히 해야겠네요.”

    “그래, 별 방법이 없네. 잠이나 자야지. 힘없어 죽겠네.”

    잠들러 간 재중이 형이 고작 네 명이 오크 족장을 잡으러 간다는 말을 들으면 무슨 소리를 할까? 궁금해지네.

    ***

    < 로스트 스카이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 뇌파 확인.

    > 주승호. 남성.

    > 캐릭터명 주호. 레벨 10.

    > 로딩 중…….

    <챠밍> 어서 오세요. 다들 시장에 모여 있어요.

    챠밍에게 바로 연락이 온다. 간단하게 서로 안부를 묻고 곧장 만났다.

    “다들 준비는 되셨나요?”

    “네, 말씀해 주신 것들 전부 다 구해놨어요.”

    “그럼, 가죠.”

    앞장서는 나와 방패전사 뒤로 챠밍과 이쁜소녀가 뒤따른다.

    “이게 성공하면 엄청나겠네요.”

    “성공하면요. 일단 그것만 생각합시다.”

    방패전사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긴장이 되리라.

    딱히 오크 족장이 있는 제단까지 가는 길이 힘들진 않다. 물약 소비를 하지 않기 위해서 정말 천천히 일부러 HP를 채워가면서 가는 중이다 보니 위기도 없고 편안하다. 그렇게 한참을 전진하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 왔네요.”

    “전사 님, 제단은 열려 있어요?”

    “네, 오후 내내 다른 레이드 팀이 도전했다던데 다 망했나 봅니다.”

    방패전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오늘도 안 되면 내일도 안 될 확률이 높다. 이 마을에 계속 머물러야 하는지 고민될 정도다 이 상태면.

    “오늘로 끝내보죠. 갑시다.”

    이번엔 오크 족장이 차가운 바닥에 눕는 걸 보고 말 테니까.

    내 손이 차가운 제단 입구를 밀기 시작했다.

    ***

    제단 입구를 열고 들어가니 여전히 불붙어 타오르는 제단 끝에 오크 족장이 오만한 자세로 권좌에 앉아 우리를 바라본다.

    “반갑다. 오늘은 좀 눕자.”

    방패전사가 방패를 퉁퉁 치면서 투지를 다진다. 그와 별개로 우리는 착착 준비를 시작한다.

    “초반은 방패전사 님이 정말 잘해주셔야 합니다. 그럼 믿겠습니다. 가죠.”

    “챠밍 님, 이쁜소녀 님 바로 들어갑니다.”

    “네. 준비됐어요.”

    “저도 됐어요.”

    방패전사가 앞으로 나서 오크 족장 근처로 다가서니 팽팽한 근육질을 움찔거리면서 일어난다.

    ―감히 제단을 넘보느냐! 너희들의 죽음으로 갚으리라.

    뭐, 전에도 다 들었던 말이라 감흥이 없다. 딱 NPC의 한계다. 박력은 있지만 그게 끝. 오크가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것도 좀 이상하기도 하고.

    방패전사가 검과 방패를 들어 오크 족장을 제단에서 유인해 내린다. 우리와는 거리 차이가 있어서인지 족장은 곧장 방패전사를 따라간다.

    “지금입니다.”

    나와 챠밍, 이쁜소녀가 눈짓을 교환하고 곧장 제단으로 달린다.

    “여기서 제 손을 밟고 뛰세요.”

    내가 손을 깍지 기고는 손바닥을 위로 보이게 한 상태서 무릎을 굽힌다. 이쁜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날렵하게 내 손을 밟고 위로 훅 뛰어오른다. 그러고는 어딘가를 잡고 버텨 선다.

    “그 위로 더 올라가세요.”

    이쁜소녀가 점프해서 올라간 곳은 제단에서 제일 높은 기둥과 그를 연결하는 로프들이다. 로프를 잡고 조금 더 올라가니 기둥 끝에 올라갈 수 있었다.

    “시간 없어요. 바로!”

    챠밍도 마찬가지로 내 손을 밟고 올라간다. 둘 다 처음 해보는 자세인데도 제법 그럴싸하게 잘 한다. 이쁜소녀에 이어 챠밍까지 제단 끝의 굵은 기둥 위의 좁은 비석상 위에 올라섰다.

    “저희 다 올라왔어요! 전사 님 오세요!”

    “빨리요! 전사 님!”

    챠밍과 이쁜소녀가 멀리서 족장과 힘겹게 숨바꼭질 중인 방패전사를 부른다. 조급하고 서두름이 가득한 목소리가 오크 족장의 고함 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제단에 울려 퍼진다.

    멀리서 보니까 족장의 공격을 홀로 막고 있는 방패전사의 HP 바가 주르륵 내려갔다가 다시 찼다가를 반복한다.

    저기서 실수해서 방패전사가 죽어버리면 이 계획은 끝이니까 잘 살아서 여기까지 와야 한다.

    챠밍과 이쁜소녀의 하이톤의 외침을 들은 방패전사가 그제야 족장을 겨우 떨쳐놓고 우리에게 힘차게 달려온다.

    “뒤에! 족장!”

    “빨리 뛰어요!”

    대답할 정신도 없는지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오는 방패전사가 내 손바닥을 밟고 뛰어올라 겨우 챠밍과 이쁜소녀 곁으로 올라갔다.

    “휴…… 전 이거 두 번은 못할 것 같네요.”

    “잘하셨어요.”

    “고생요.”

    졸지에 쫓아가던 목표를 잃은 족장이 제단에 남아 있던 나에게 뜨거운 눈빛을 보낸다. 옆에 있는 장검을 들어 올리며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래, 안 그래도 상대해 주려고 했어. 와라!”

    족장이 열 받았는지 눈을 치켜뜨고 곧장 달려든다. 현실에서 2m짜리 거구가 저런 포스로 달려들면 진짜 뒤도 안 보고 도망갈 텐데. 지금은 그냥 가라앉은 호수 같은 마음으로 적을 대한다.

    큰 키만큼이나 큰 주먹이 나를 덮친다. 확실히 민첩 수치가 어마어마하게 높다. 빠르다. 하지만 읽을 순 있다.

    날아오는 주먹을 겨우 피하면서 다시 살짝 거리를 벌린다. 이제 진짜 확인할 때다. 피하는 와중에 슬쩍 제단 위를 바라본다.

    준비해 온 것이 잘 통하기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