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12화 하늘에서 빛이 내리면 (6)
재중이 형의 말을 빌리자면 오크 족장은.
‘몸 딴딴한 미친개.’ 라던가.
그리고 지금 다들 그 말을 온몸으로 절실하게 느끼는 중이다.
“야! 좀 잡아봐. 왼쪽으로 튄다.”
“대기조, 뭐해! 마법사들 보호해. 다 죽잖아!”
이미 진형은 무너진 지 오래고 그야말로 개판 오 분 전이다. 흔히 RPG 게임에서 말하는 어그로 조차 전혀 안 잡힌다. 아니 못 잡고 있다. 애초에 어그로란 개념이 적용되는지조차 의문이다.
시작은 괜찮았다.
1, 2팀에서 나온 방패 격수들이 제대로 자리를 잡고 뒤로 3, 4, 5팀들이 차례로 좌, 우 자리를 잡아서 안정적으로 레이드가 되는가 했다.
하지만 재중이 형 말대로 미친개다. 아무 전조 없이 미친 듯이 돌파해서 방패 격수들의 견제 범위를 벗어나 궁수와 마법사가 있던 곳으로 뛰어들었고 대기조가 급하게 이를 막아서긴 했으나 그사이 마법사 두 명, 궁수 한 명이 그대로 증발해 버렸다.
원거리 격수들은 제자리서 오크 족장을 맞추는 것만 집중했지 정작 오크 족장이 달라붙으니 제대로 피하지도 못하고 세 명이나 차가운 바닥에 누워버렸다.
그나마 궁수들은 민첩이 높아서 억지로 피하긴 했는데 마법사들은 한순간이지만 지옥을 맛본 상태다. 큰 주먹으로 죽을 때까지 맞는 기분이란 어떨까? 다신 경험하기 싫을지도.
다행히 챠밍은 요령 있게 움직여 미리 피해 버렸고. 우리 5팀에 속한 궁수와 마법사들도 제법 실력이 있는지 무난하게 족장을 피해서 달아나는 데 주력해서 살아남았다.
“피해는?”
“마법사 한 명 더 당했어.”
공격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열 명을 선발로 붙였는데 돌격으로 밀어내고 빈틈으로 유유히 빠져나가 마법사와 궁수를 노린다. 열 명으로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다.
“시작부터 이러면 못 깨. 방패 격수들 좀 더 달라붙으라고 하고, 대기조들도 좀 더 붙으라고 해. 계속 이렇게 빠져나가면 아무것도 안 돼.”
공격이 눈이 돌아간 오크 족장을 노려보면서 짜증을 낸다.
“저 근육 돼지 같은 새끼…… 뭐가 저렇게 빨라.”
옆에 서 있던 푸른 빛 커트 머리가 고개를 저어 반대를 표시한다.
“그것도 안 돼. 포효 타임까진 어떻게든 이대로 가야 해. 지금 더 접근시키면 단체로 패닉이다.”
“아…… 젠장.”
공격이 애꿎은 바닥만 차면서 오크 족장을 노려본다.
“장군 형. 그럼, 전부 다 말고 대기조 반만 붙이자. 응?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 돼. 일단 지금을 버텨야 나중이 있지. 마법사 몇 명 더 떨어져 나가면 어차피 딜 모자라서 포기해야 해.”
장군이라 불린 푸른색 커트 사내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장군도 지금 이대로 가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으니까.
팀의 장은 공격이긴 한데 둘의 관계는 좀 애매하다. 오히려 장군이 중심이고 공격은 돌격대장 같은 포지션이라 중요한 결정은 장군과 의논해야 하는 그런 관계다.
“전 팀 팀장에게. 대기조 반만 떼서 지금 투입하세요. 빈자리 메워서 족장 더 못 설치게 만드세요.”
각 팀 조장에게 바로 연락이 간다.
방패전사가 듣더니 바로 대기조에게 다시 전달. 한 시가 바쁘다 보니 서로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여서 답한다.
이쁜소녀와 명창이 서로 바라보다가 의견을 나눈다.
“제가?”
“일단 제가 가도록 하죠. 뒤를 부탁합니다.”
명창이 장창을 양손으로 꽈악 쥐고 달려나간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이쁜소녀는 그 모습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다가 다시 족장에게 집중한다.
***
생각보다 너무 날뛰는데?
족장을 상대해 본 소감이다. 이동이 너무 빠르다. 민첩 수치가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팀 궁수들보다 높은 건 확실하다. 움직임은 다 읽어지는데 정작 이동속도가 느려서 놓치고 만 것이다.
“방패전사 님 조금 더 좁게 커버해야 할 것 같은데요?”
좀 전에도 둘이서 커버 못 한 공간으로 돌아나가서 잡는다고 개고생했다.
“더 달라붙으면 못 따라잡을 걸요. 전 지금도 간당간당하네요.”
방패전사의 민첩은 그다지 높지 않다. 나 이상으로 고생 중일 거다. 너무 붙으면 족장이 빠져나갈 때 쫓아갈 수가 없다. 돌아서는 자세까지 고려해야 하니까.
축구할 때 엄청나게 개인기 좋게 날뛰고 스피드 좋은 놈을 딱 달라붙어서 마크하다가 턴 동작 하나에 바로 젖혀지는 거랑 비슷하다. 오히려 좀 더 거리를 두고 견제하듯 못 들어오게 막아야 한다. 마법사와 궁수의 목을 따려고 덤벼드는 놈한테는.
“그럼 한 줄로 막지 말고 아예 일자로 서 보죠? 방패전사 님이 더 붙으시고 제가 뒤를 커버할게요.”
“저까지 같이 서니까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네요.”
어느새 다가온 명창이 장창을 앞으로 내밀며 자리를 잡고 선다. 무표정한 인상. 붉은 스트레이트 헤어가 휘날린다.
확실히 한 명 더 붙으면 지금 하는 고민은 안 해도 된다. 커버할 범위가 줄어드니까.
“멀리서 지켜보니 원거리 격수들을 먼저 공격하도록 세팅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근접 격수가 접근하면 좀 맞더라도 돌격으로 밀어내면서 어떻게든 다가서려고 하더군요. 공격을 성공시키면 다시 진정되는 듯하고. 그사이에 패턴 변화가 두세 가지 더 보이긴 합니다만.”
명창이 흔들림 없는 말투로 말을 해준다. 확실히 재중이 형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그나저나 그냥 보고 바로 생각한 거면 이 아저씨도 눈썰미 괜찮은걸. 나야 다 듣고 와서 그냥 보이는 거지만.
“일단 방패전사 님이 더 붙으시죠. 저희는 빠져나가는 족장을 후려치는 역할이고. 옵니다!”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오크 족장이 다른 곳의 근접 격수를 후려치다가 경로를 바꿔서 우리 쪽으로 달려온다.
“이번엔 좀 멈춰라.”
방패전사가 악을 쓰면서 방패로 오크 족장의 돌진을 막아서는데 좀 역부족인 것 같다. 튕겨 나가는 방패전사는 어쩔 수 없다. 나와 명창이 그 뒤를 파고든다.
오크 족장 정면으로 찔러 들어가는 장창을 보자마자 족장이 한 손으로 쳐내서 밀어내버리고 곧장 내 옆을 지나가려고 한다.
이거 무시당하는 기분인데?
바로 따라붙어 쌍검을 교차하면서 족장의 목을 그어낸다. 촥촥 손맛이 오기는 했는데 대체 얼마만큼 대미지가 들어갔는지는 모르겠다. 경직이라도 되면 좋을 텐데. 확실히 이런 레이드형 보스에겐 이것도 잘 통하지 않는 건가?
근데 그 순간 내 눈에 보인다.
어? 아주 잠깐이지만…….
정말 미세하지만 살짝 멈췄다. 잘 나오던 영화가 버퍼링에 걸려 잠시 멈칫하는 수준.
효과가 있긴 있다. 근데 족장의 방어가 너무 높아서인지 효과가 너무 미미하다.
그래도 돌진이 끊겼다. 다시 달라붙는 방패전사와 명창. 그리고 우리 주변으로 다시 포위망이 형성된다.
그리고 봤다. 오크 족장의 시선이 내게 돌아가는 것을.
***
오크 족장은 여기저기 날뛰면서 돌진해서 돌파하고 우리 팀은 막아내고 하기를 한참. 그 이후로 전 레이드 팀이 얼마나 오크 족장과 실랑이를 벌였을까. 저 멀리 떨어진 오크 족장이 숨을 크게 쉬더니 한 번에 뱉어낸다.
“크워어어어!”
“포효다.”
귓가에 들리는 괴함과 어김없이 찾아오는 경직. 포효 때문인지 온몸의 감각이 순간 사라지는 기분이다. 이게 경직인가. 마음대로 못 움직이는 것이 기분이 엿 같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족장의 무쇠 주먹이 막 날린다. 저거 제대로 맞으면 리타이언데.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지 불행이라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일단 난 비껴간 상태. 그리고 다른 팀 몇 명이 그대로 리타이어 된다.
그와 동시에 대기를 타던 격수들이 일제히 덤벼든다. 우리를 살리려고.
이쁜소녀가 오크 족장을 향해 달려드는 뒷모습이 보인다. 거대한 양손검을 치켜세우면서 겁도 없이 바람처럼 날아가서 달려든다.
주위를 둘러봐도 여성이 저만한 검을 들고 족장에게 달려드는 경우는 없다. 진풍경이라면 진풍경. 너무 이질적이라 경외로 바라보게 된다.
일단은 못 움직여서 답답하지만 지켜보는 수밖에.
움찔.
이쁜소녀를 바라보다 무심코 따라 움직이려고 하는데 원래라면 몸이 멈춰 있어야 하지만 약간 움직여진다.
왜 움직여지지?
분명히 경직 시간은 8초 내외라고 하던데 포효를 맞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직이 풀리는 느낌이다. 무저갱에 빠졌다가 끌어올려 지는 기분. 4초 정도 흘렀나?
주변을 보니 아직도 근처의 근접 격수들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이건 버그인가? 이유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 차이점은?
RTP가 높아서? 이건 답이 아니고…… 답은 의외의 곳에서 찾았다. 외부 타격으로 느껴지는 고통 지수.
포효가 아픔으로 인식되는지 감각이 다시 살아난다. 고통이 경직을 깰 수 있는 모양이다.
이건…… 버그로 제재당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검사할 때 시스템 내에서 어떤 문제도 없을 거라 장담했으니 그럴 리는 없을 테지만.
일단은 경직에 걸린 것처럼 대기한다.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오크 족장을 보니 처음에 뒤를 지키던 공격과 장군도 이미 오크 족장과 한데 어울려서 칼춤을 추고 있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포효.
순간 팔등에 검을 가져다 대고 세게 그었다.
이게 통할까? 어떤 직감이 온다고 해야 하나. 게임 시스템에 이게 적용될 거란 확신은 전혀 없지만, 왠지 될 것 같은데?
팔을 그음과 동시에 HP가 쑥 빠져나가긴 하는데 경직이 거의 바로 풀린다.
된다. 이거 먹힌다. 확신이 섰다. 난 고통지수가 높아서인지 불편함이 느껴지지만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은 더 세게 그어야 할지도 모르겠네.
여전히 포효 범위 안에 들어간 근접 격수들은 얼음땡 놀이 중이고 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대기하던 조가 투입 돼서 시선을 끄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크 족장은 유유히 포효가 걸린 유저들을 학살한다. 애초에 프로그래밍이 그렇게 짜여 있으면 유저들도 별수 없는 거다. 좀 맞든 말든 허용범위를 넘지 않는 타격은 무시하고 지정된 타깃만 때리면 정말 별수 없다.
차라리 다른 팀에서 시도한 포효에 걸린 유저를 뒤로 빼내는 작전이 더 나앗을지도 모르겠네.
“이거 가망이 없어 보이는데.”
방패전사가 조금은 우울한 말투로 중얼거린다. 물론 옆에 있던 내게는 잘 들린다.
말 그대로 유저들이 녹고 있다. 공격과 장군이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고 있지만 작전도 안 통하고 유저들의 기본 스펙도 부족하다. 내심 기대하고 있던 나도 비슷한 심정이고. 지금 돌아가는 판이 개판이거든.
“확실히 그렇게 보이네요.”
솔직히 오크 족장의 돌진은 원거리 유저만 잘 피해 다니면 큰 피해는 없을 것 같다. 센스 있게 족장의 시야에서 직선거리만 잘 피해 주면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을 정도.
문제는 족장의 포효 구간. 아무리 날고 기어도 걸리면 자동으로 관속 행이다 보니 답도 없다. 지금 봐라. 12렙 이하는 그냥 녹는 중이다. 저건 공격이나 장군이 무슨 짓을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이제 선택권은 있는데…… 이를 어쩐다?
***
“아쉽네요.”
방패전사가 멍하니 번개를 머금은 잿빛 구름이 뭉게뭉게 흘러가고 있는 우중충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한숨 쉰다.
“정말요.”
챠밍도 비슷한 표정으로 옅은 웃음만을 보여준다.
“더 잘 했으면…….”
이쁜소녀가 애꿎은 양손검만 바닥에서 들었다 놨다 하면서 꿍한 표정을 짓는다.
“다들 수고했어요.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야죠.”
“하지만…….”
이쁜소녀는 뭐가 그렇게 아쉬운지 표정을 쉽게 풀지 않는다.
다들 예상 이상으로 잘 해줬고 또 그 이상의 활약을 보였다. 결코 12렙들에게 꿀리지 않을 정도로 확실하게.
다만 전략이 먹히지 않았고, 그리고 오크 족장을 넘기엔 레이드 팀의 레벨이나 역량이 역부족이었을 뿐이다. 애초에 12렙 이상을 상정하고 파티를 짰어야 했는데 결국 글레이브 구간에서 죄다 발목만 잡을 뿐이었고 무너진 진형은 쉽게 복구되지 않았다.
그와 별개로 챠밍, 이쁜소녀, 방패전사는 마지막까지 남아서 분전했지만 물약의 한계는 명확했다. 최후에 남은 것이 나와 우리 팀, 그리고 공격, 장군뿐이었으니 할 말 다 한 셈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안 나오시고 뭐 하신 거예요? 승산이 없어 보였는데.”
챠밍이 문득 생각났는지 물어온다.
공격과 장군, 이쁜소녀, 방패전사가 모두 쓰러지고 챠밍과 내가 살아남았지만 물약은 이미 다 떨어진 상황이었고 챠밍도 결국 리타이어 됐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싸우던 내가 한참이 지나서도 나오지 않자 궁금해한다.
이쁜소녀, 방패전사도 그 물음에 고개를 슬쩍 돌려서 나를 본다. 딱히 기대를 한 그런 것보다는 그냥 궁금함이 묻어나는 눈빛이다.
오크 족장이 잡혔으면 하늘에서 빛이 내린다는데 그것도 아니니까 족장을 잡은 건 절대 아닌 것을 알아서 그런지 기대가 없다.
내가 검지를 슬쩍 올려서 먹구름이 낀 하늘을 가리킨다.
“다들…… 저 하늘 한 번 열리게 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