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11화 하늘에서 빛이 내리면 (5)
재중이 형은 성심성의껏 설명을 해준 뒤 쓰러지듯 쪽방에 엎어지더니 소리 없이 자는 중이다. 협곡 다리를 건너면 나오는 새 지역을 돌아다닌다고 정신이 없다나.
확실히 이제야 오크 족장을 잡는 팀들에 비해 거의 하루는 빨리 새 지역에서 꿀을 빠는 중일 테다. 새 지역에 대해서 물어보니 그냥 자신도 아직 다 모른다고 간략하게만 설명하고 넘어갔다.
선택지가 세 가지 정도 있었다는데 첫 번째가 신 맵으로 넘어가서 사냥이나 정보를 얻는 것. 둘째가 다른 마을의 오크 족장을 잡아서 드랍 템과 강화석을 얻는 것. 세 번째는 동쪽의 오크 부락지로 옮겨간 오크 족장을 잡는 것.
부락지의 오크 족장은 드랍 템이 확실하지 않아 포기.
다른 마을의 오크 족장을 잡아봐야 통행료는 중복 지급이 안 되니 포기. 왕복해야 하는 이동시간 문제도 있고. 거기에 다른 마을의 오크 족장을 잡아버리면 괜히 그쪽의 레이드 팀과 불필요한 마찰이 생길 수도 있어서 포기했단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진 않았나 보다.
들이는 수고에 비해 얻는 이득이 적은 편이라나.
신 맵을 빨리 살펴보는 것이 가장 이득이 크다고 판단했으니 그렇게 했겠지. 지금 꿀 빠는 중이기도 하고.
재중이 형이 늘 말한 아무도 없이 혼자 잡는 사냥터가 제일 좋은 사냥터라고.
어쨌든 좀 부럽네. 새 지역 가보고 싶은데.
로스트 스카이의 요즘 가장 핫한 소재는 새 지역, 라이칸스로프의 영역이지만 재중이 형네 팀이 일절 정보를 내놓지 않는 중이다.
하긴 정보를 줘서 후발 주자가 따라올 여지를 주고 싶지는 않을 거다.
그다음이 바로 오크 족장 레이드와 피난민의 마을이다.
재중이 형네와 하루 차이로 여러 서버의 오크 마을들이 피난민의 마을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인증샷도 올라오고 공략본도 제법 많이 올라왔다.
―우리도 클리어.
―인증샷 올라갑니다.
―왜 우리 마을은 그대로야? 랭커들 뭐하냐. 좀 뚫어봐라.
―님들이 뚫으셈? 그지 근성 쯧쯧.
―오크 족장 글레이브 경매. 350만 원 뜸.
―강화도 안 된 템을? 너무 비싼데? 역시 게임 강국. 돈 없으면 겜 못하겠다.
―실화임? 대박이네. 지존 템 아님?
―노노, 그냥 스쳐 지나가는 템임.
―서버에 딱 열 자루라 비싼 듯.
―어차피 다음 맵 가면 노멀 템. 없어도 됨. 설레발 자제.
―위에 못 얻은 놈, 부러워서 정신 승리 오지구요
―스샷 봤는데 스탯도 붙었던데? 뎀지도 높고 절대 노멀 템 안 됨.
―전 기다리다 그냥 옆 마을 갑니다. ㅂㅂ.
―우리 마을도 가망 없음. 나도 간다. ㅂㅂ.
―전 마법 배우러 옆 마을로 갑니다. ㅂㅂ.
참고로 저 오크 족장 글레이브…… 결국 재중이 형에게 낙찰됐다. 돈을 아낌없이 쓰시는구나.
그리고 오크 마을 해방이 느린 지점은 지금 가차 없이 버려지고 있단다.
새 지역으로 가는 통행증을 발급받기 위해 오크 족장이 잡힌 마을로 이동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게시판에서는 난리가 났다.
이건 거의 민족 대이동인데?
***
<방패전사> 지금 다른 레이드 팀 오크 족장 잡으러 전부 떴어요. 저희가 마지막 주자네요.”
< 로스트 스카이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 뇌파 확인.
> 주승호. 남성.
> 캐릭터명 주호. 레벨 10.
> 로딩 중…….
접속하자마자 방패전사의 귓말이 날아온다.
―다들 예정일이 내일 아니었나요?
<방패전사> 그게 사정이 급해졌습니다. 지금 아수라장이에요.
―무슨 일 생겼나요?
<방패전사>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민족 대이동 아시죠? 오늘 종일 게시판에 핫한.
―네, 게시판에 올라온 것 봤습니다.
<방패전사> 그게 문제가 됐어요. 전 서버에 상위 레이드 팀이 전부 일정을 하루 앞당겨서 한참 전부터 시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준비가 덜 됐을 건데요? 그렇게 막 해도 되나요?
<방패전사> 이젠 어쩔 수 없으니까요. 안 하면 무시 못 할 후폭풍이 돼서 돌아오니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이해가 잘 안 되네요. 성공확률이 낮아질 텐데.
<방패전사> 오크 족장 잡아서 성공하면 보상으로 받는 통행료 수수료 아시죠? 그게, 문젭니다. 유저들이 자기 마을 근처의 공략된 다른 마을로 대폭 이동해 버리면 그 수수료가 줄어들 위기라서요. 현금가로 개인별로 최대 250만 원 상당의 보상이 확 줄어버릴지도 모르니까요. 거기다가 마법서와 지팡이, 활까지 파니까요. 옆 마을이 성공했는데 우리 마을이 그대로면 유저를 거의 다 뺏겨 버릴 겁니다.
―아…… 그걸 생각 못 했네요. 보상에 큰 관심이 없어서 별생각이 없었거든요. 성공할지 말지가 중요했지.
<방패전사> 네, 저도 오늘 접속하고서 알았습니다. 아무래도 보상 문제에 민감했던 팀들이 부산해지기 시작하면서요. 지금 그쪽들은 전부 총력전이에요.
―저희가 들어가기로 했던 팀은요?
<방패전사> 다른 팀은 지금 시도 중이거나 이미 다 깨졌습니다. 일단은 저희만 남은 셈이에요. 주호 님 기다린다고 사정을 좀 구했습니다. 준비는 다 하셨나요?
―네, 어제 비싼 돈 들여서 숲의 갑옷 상의, 하의도 다 맞췄어요. 뭐가 그렇게 비싼지.
<방패전사> 뭐, 그게 숲 세트의 끝판왕이라서 그래요. 잘 안 나오거든요. 그래서 비싸죠. 그게 있어야 제대로 숲 세트라 부르니까요. 레이드 기본 조건이기도 하고.
―덕분에 물약값 좀 내니까 손에 남는 게 얼마 없네요. 다른 분들은 어때요?
<방패전사> 네, 지금 옆에 모여 계십니다. 주호 님만 오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장소가 협곡 입구죠?
<방패전사> 예, 늦게 왔다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애초에 지금 모이기로 약속했었고. 다른 팀들이 거의 다 깨지는 바람에 오히려 지금 기대감이 좀 올라가 있는 상태죠. 나쁘지 않은 분위깁니다. 다른 팀이 성공했으면 아마 좀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요.
―네, 그건 뭐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라. 일단 가죠.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장비를 착용하고 스탯을 확인한다.
* * *
이름 : 주호
레벨 : 10 ▲2
【근력 2】 【민첩 3】 【체력 3 ▲1】
【지력 0】 【마력 1】
0 숲의 투구 / 방어력 2
0 숲의 갑옷 상의 / 방어력 4 ◀ NEW
0 숲의 갑옷 하의 / 방어력 3 ◀ NEW
0 트라이네의 신발 / 방어력 2 / 이동 속도+1
0 숲의 팔 보호대 / 방어력 2
0 숲의 다리 보호대 / 방어력 2
0 숲의 장검 / 공격력 2∼4 (x2)
* * *
재중이 형의 말을 들어서 일단 근력보단 체력을 올렸다.
오크 족장의 포효로 인해 경직이 일어날 동안 혹시 타격을 입어도 버틸만한 체력. 그것의 최소한도가 3이란다. 당연히 숲 세트는 기본이고. 근접 격수들은 최소 3, 원거리는 격수들은 애초에 거리 때문에 포효에 걸리지 않으니까 체력은 의미가 없다.
혹여나 재수가 없어서 머리를 강하게 맞거나 목이라도 꺾이면 그냥 사망이고. 경직이 일어나면 그냥 하느님께 비는 수밖에 없단다.
제발 덜 아픈 곳 때려달라고.
체력이 4가 되면 그냥 아무 곳이나 맞아도 한 번은 버틸 수 있다고 하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근력이 3이 되면 인벤에 넣을 수 있는 물약이 늘어날 테지만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오래 사느냐 한 번에 안 죽느냐의 선택이다.
협곡 입구 길을 따라가서 도착하니 다수의 유저들이 제각각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다.
방패전사, 챠밍, 이쁜소녀가 각자의 장비를 챙겨 들고 나를 반긴다. 살펴보니 상의 하의가 전부 숲의 갑옷이다. 특이하게 연녹색의 광택이 나는 철 종류 재질의 갑옷. 현재 가장 방어력이 우수하다. 그리고 안 나와서 비싸고.
간단하게 서로 인사를 나누고 물약 점검 후 방패전사가 팀장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간다.
아마 저 팀장이 방패전사의 지인일 것이고. 캐릭터 용모 수정으로 생긴 건 당연히 훈남에 엄청나게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색 장발로 현실서는 절대 볼 수 없는 헤어로 꾸민 상태다. 불꽃 산발 머리라고 표현해야 할까.
“도착하셨네요. 이제 가시면 됩니다.”
“공격이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방패전사 님께 5번 팀 구성은 맡겼으니 가시면서 들으시면 됩니다.”
가볍게 악수를 나누고 정해진 진형에 따라 5개 팀 40명이 이동을 시작한다. 각 유저들마다 가지각색의 헤어와 체격으로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자세히 보니 대부분의 여성 유저들은 활이나 지팡이를 들고 있다. 파티 비율을 보니 남녀 합쳐서 거의 20명을 궁수나 마법사로 맞춘 셈.
포효 대책인가?
오크 족장의 포효는 근접한 격수들을 일순간 경직시킨다. 그 때문인지 딜 로스를 줄이기 위해서 원거리 유저를 대거 참가시킨 모양이다. 경직되는 수를 최대한 줄이는 것도 방법의 하나니까.
옆에서 걷던 방패전사가 설명해 준다.
“저희 팀이 원래 네 명이라서 소수로 참가한 분들 네 분이 팀으로 들어왔습니다. 일단 제가 5번 팀장으로 되어 있고요. 여성 궁수 두 분, 여성 마법사 한 분, 장창 격수 한 분이 저희에게 배정됐습니다.”
우리 팀만으로 가정한다면 괜찮은 구성 같아 보인다.
근접 격수가 네 명이고 원거리로 네 명.
소개를 받고 서로 적당히 인사를 나눈다. 일단 머리 위로 아이디와 파티 시 HP도 보이기 때문에 헷갈릴 일은 없을 터. 손발을 못 맞춰보고 급하게 들어가야 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인데 이미 그건 감수해야 할 부분이다.
“서로 손발을 못 맞춰봐서 걱정은 좀 있긴 하지만 제가 예전에 파티로 같이 사냥한 경험이 있던 분들이라 이쪽으로 넣어달라고 했습니다. 다들 실력이 괜찮습니다.”
내 접속 시간에 맞춰서 같이해서 그렇지 남은 시간은 다른 사람들과도 파티를 많이 했을 방패전사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다. 파티원들 보는 안목도 있으니까.
“제일 큰 문제가 오크 족장의 포효인데 이때 대부분 죽는답니다. 그래서 근접 격수를 두 줄로 나눠서 운영할 거라네요. 포효에 경직되면 바로 다른 격수가 나설 수 있게요.”
“대기로 따로 뺀다는 겁니까? 그럼 딜이 잘 안 나올 텐데.”
“그 부분은 원거리 격수를 많이 넣어서 무마해볼 생각인 거죠.”
“근접 격수가 너무 적으면 족장이 원거리 격수를 치러 빠져나가는 걸 제어하기 힘들 건데요.”
“대기로 빠져 있는 근접 격수들이 그때 나서야죠. 좀 복잡해 보이긴 해도.”
연습할 시간이 있었다면 참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투정 부릴 때는 아니지.
“어떤 팀은 근접 격수를 무조건 체력 4를 찍어야 넣기도 하고, 어떤 팀은 아주 소수의 근접 격수로 해보기도 했다는데 밸런스 잡기가 참 쉽지 않네요. 또 어떤 팀은 포효에 걸리면 대기 중이던 소수의 격수가 달려들고 나머지는 포효 걸린 격수를 뒤로 빼내 오기도 하고. 각 팀마다 전략이 다 달라요.”
들어보니 한 번쯤 시도해 볼 만한 전략들이다. 어떤 팀이 더 나은지 알 수는 없지만 결국 마지막 결과가 알려줄 것이다.
포효 패턴, 돌진 패턴, 연속 휘두르기 패턴, 글레이브 패턴 등 재중이 형에게 들어서 알고 있던 패턴에 대한 대비를 하나씩 이야기하면서 우리 팀이 어떻게 움직일지를 설명해 준다.
나쁘지 않은데?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전략은 괜찮은 편이다.
문제는 역시 사람인가…….
중심축인 1팀과 2팀은 전부 12렙 이상. 13렙도 한 명 보인다. 3, 4, 5팀은 적절히 섞여 있고. 결국 승패는 저 1, 2팀이 얼마나 살아서 끝까지 갈 수 있는 가네.
의외로 공격이 12렙이고 그 옆에 짧게 쳐올린 푸른 빛 커트 사내가 13렙이다. 눈빛이 살아 있네. 좀 사나운 인상이다. 캐릭터 설정에서 눈매를 일부러 바꾼 건지 원래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와 주호 님이 한 조가 될 겁니다. 그리고 비상시에 이쁜소녀 님과 명창 님이 바로 투입되고요.”
제단까지 가는 길은 그렇게 힘들지 않은 편이다. 이 팀의 대부분의 유저들이 이미 오크 정도는 무난하게 상대할 수 있으니까.
팀에 은연중 불안감도 좀 돌고 있긴 하다. 이미 앞선 팀이 처치해 버렸으면? 그냥 지붕 위에 올라간 고양이 보는 셈이니.
제단에 다 도착해서야 그 불안감이 사라진다.
“제단이 열려 있습니다. 다들 들어가죠.”
그렇다. 이미 앞 팀은 전멸했다.
이젠 우리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