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개관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요."
10년도 전에 만난 청년이 이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로 탈바꿈해 나타나자 오프라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태호를 반겼다.
"만나서 반가워요, 미즈 제마. 이쪽이 세라죠?
제마와도 반갑게 인사한 오프라는 이제 막 4살을 넘긴 세라를 보고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악수를 청했다. 세라가 그 앙증맞은 손으로 오프라의 손가락에 손을 살포시 가져다 대자 오프라는 혹시 다칠까 조심히 잡아 악수했다.
오프라는 오늘 촬영이 근래 가장 높은 시청률을 세울 것이라 확신했다. 스토리가 훌륭했고 등장인물도 예뻤으며 토크쇼의 여왕인 자신이 감독을 맡은 이상 블록버스터급 성적은 확정적이었다.
오프라는 태호만 잠시 불러 오늘 녹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오늘 촬영은 기존 촬영 스케줄을 다 조정하면서까지 만든 매우 특별한 녹화였기 때문이다.
"백악관에서 연락받고 정말 놀랐어요. 이런 식으로 기존 일정 사이에 비집고 들어오는 경우가 없진 않아도 매우 드물어서."
백악관은 태호가 만들어 놓은 밥에 숟가락을 제대로 얻음과 동시에 반찬도 잔뜩 들고 와 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 코스요리의 애피타이저가 오프라 쇼였다.
태호를 오프라 쇼에 출연시켜 2년 전 사건을 환기한 다음 백악관에서 범인을 잡았다고 발표한다는 게 대략적인 그쪽 계획이었다. 자잘한 거 여럿 나가는 것보다 묵직한 한방이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태호는 백악관의 계획에 잘 어울려 줄 생각이었다.
"태호 씨. 그럼 나에게 설명해줘요. 오늘 촬영이 어떻게 이뤄지게 된 건지. 나도 뒷얘기를 알아야 대비를 하죠."
태호는 ST와의 악연을 간략히 소개했다. 원한 관계를 청산하자고 해놓고 저런 테러를 가한 이유를 그녀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물었다.
"범인은 찾았죠? 말해봐요. 누가 이랬는지?"
"방송에 내보낼 생각인가요?"
"힌트 정도는 내보내야죠. 정답 풀이는 백악관에서 해도."
오프라는 이런 이벤트에 엑스트라로 머물 생각이 없었다. 주연은 못 해도 조연은 하겠다는 의지를 풀풀 풍겼다.
"그 최정현이라는 사람의 친모이자 ST 그룹 CEO인 최 회장의 아내의 비서가 의뢰한 것으로 드러났어요. 그 비서라는 사람과 나와의 인연은 전혀 없고요."
태호의 설명에 따르면 최 회장의 아내가 시켜 비서가 벌인 행동인데 딱 들어봐도 꼬리 자르기를 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정의구현밖에 없군요."
태호는 정의구현이라는 말의 진의를 몰라 물었다.
"어떻게 하시게요?"
"정확히는 모르지만, 미국인이 미국 땅에서 당한 범죄고 만약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된 나라라면 미국으로 범죄자를 인도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범인을 꼭 미국 법정에 세웠으면 좋겠네요."
*
오프라 쇼 촬영장.
아름다운 제마와 깜찍한 세라까지 등장해 촬영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두 사람이 만난 이야기부터 세라가 태어나기까지 영화 같은 얘기가 펼쳐졌다. 불행한 결말을 돋보이려고 깔리는 행복한 서사 같기도 했다.
세라가 무대에서 내려가자 본격적으로 어두운 얘기가 시작됐다. 그림을 설명하는 태호는 덤덤한 표정이었지만 제마는 한껏 슬픈 감정이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태호의 설명.
"저 그림은 제게 실제 배달된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소의 머리를 모티브로 제작된 작품입니다."
'세 목숨'이라는 그림이 있다는 건 많은 사람이 알지만 저런 세세한 뒷이야기는 모르고 있거나 잊고 있던 사람들이 많았다. 태호의 설명이 끝나자 오프라는 제마에게 저 사건 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물었다.
오프라의 굳은 목소리에 제마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태호는 이게 보기 싫어 혼자 방송에 나올 생각이었지만 제마는 자기도 당사자라며 방송에 출연할 뜻을 굽히지 않았다.
"유산을 했어요. 저 소식을 들은 후 며칠 뒤에요. 스트레스가 많았던 게 원인인 듯해요."
그리고 이어지는 제마의 유산 후 겪었던 심적 고통과 아직까지 둘째를 갖지 못한 아픔을 토로하자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신파극이 펼쳐졌다.
여기에 태호에게 받은 설움도 겹쳐지자 제마의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를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오프라는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그래도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미국 수사당국의 노력으로 이 범죄의 진범이 곧 밝혀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살인에 준하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꼭 미국 법정에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배후 조종자가 있다면 그 역시도 반드시 처벌받아야 합니다."
이것으로 해야 할 일은 다 했다. 판도 더 벌릴 수 없을 만큼 벌려놨고 이제 결과만 확인하는 게 남았다. 한국에 가서 정의가 구현되는 순간만을 확인하면 됐다.
*
오프라의 클로징 멘트가 끝나고 촬영장에서 나오는 길. 제마는 태호 옆에 바짝 붙어 말했다.
"나 잘했지?"
제마는 쓰담쓰담을 바라는 고양이처럼 눈을 뜨고 태호를 쳐다봤다.
"잘했어."
"그럼 상을 줘."
"... 알았어. 오늘 밤."
"오늘부터 피임하면 나랑 이혼할 각오해!"
제마는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 알았어."
제마는 진작에 둘째를 갖고 싶었지만, 태호의 만류로 그러지 못했다. 둘째를 가져버리면 지금까지 만들어온 슬픈 서사가 망가진다는 제마가 이해 할 수도 없고 하기도 싫은 핑계를 댔다. 제마가 촬영 중에 서럽게 운 이유도 둘째를 유산해서가 아니라 둘째를 못 갖게 한 게 훨씬 컸다.
*
서울 광화문 사거리 근처에 짓기 시작한 태호의 미술관이 완공을 마치고 사용승인까지 났다.
십장생도에서 볼 수 있는 두 개의 산봉우리가 광화문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자 수많은 서울 시민들이 엄청난 기대감을 표출했다.
은빛 산봉우리 두 개가 가을 햇살을 반사 시키며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은 미술관이 경복궁의 신비로운 비밀을 품고 있을 듯 보였다.
경복궁 안에 있는 국립 고궁 미술관. 그 동쪽에 있으며 몇 년 전에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이제 남쪽에 개관하는 성호 미술관까지. 이것으로 서울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문화 도시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기반 시설을 갖추게 됐다.
사용승인이 나자마자 UAE 수장고에 있던 작품들이 특별 수송기편으로 이송된 후 전시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아부다비에 들어설 현대 미술관과 연계되어 1년을 기준으로 작품을 교환 전시하기로 합의되어 있었다.
'세 목숨'도 미국에서 날아가 미술관에서 제일 눈에 잘 띄는 곳에 빛의 마리아와 함께 전시될 예정이다. '세 목숨'은 다움 김 관장의 끈질긴 대여 요청에도 태호가 보내지 않고 들고 있던 작품이어서 이번이 한국에서의 처음 전시였다.
그렇게 '세 목숨'을 진열함으로써 미술관 개관 준비가 끝났다.
*
'꽝.'
최 회장이 집어 던져 깨진 크리스털 화병 조각이 사무실 바닥에 흩어져 심란하게 반짝거렸다.
"그래서. 그 망할 놈이 안 보인다고?"
최 회장은 한 달 전 사라진 아내의 비서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는 소식에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최 회장도 아내의 나쁜 꾀가 그놈 머리에서 나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디 있는데?"
비서실장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보고를 이어갔다.
"세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해외로 도주했거나, 사모님이 치웠거나, 정부가 신병을 확보했거나입니다. 제일 가능성이 높은 건 현재로선 두 번째 아니면 세 번째인데 그룹엔 두 번째보다는 세 번째가 더 문젭니다."
"신병을 확보해? 왜?"
"권태호에게 일어났던 소머리 테러가 그자 소행이라는 얘기가 돌고 있습니다."
최 회장은 순간 어지럼증이 생겨 주저앉을 뻔했다. 전 세계가 다 알게 된 작품과 사연이었다. 뒷얘기는 몰라도 적어도 작품은 여러 매체를 통해 못해도 한번은 봤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된 테러가 회사와 연결되는 순간 아내뿐만 아니라 자신도 그룹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직위를 내려놔야 한다. 적어도 직계 최씨 일가는 다 내려놔야 했다. 그 뒤로는 친척들도 밀려날 것이다.
최 회장은 분노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이걸 지금에야 아는 건데!!"
최 회장이 분노의 찬 목소리에 비서실장은 더 목을 움츠리며 대답했다.
"사모님이 절대로 모르는 일이라고 하셔서 의심은 갔지만, 손을 쓸 수 없었습니다."
"자금 추적은 할 수 있었잖아!"
"계좌는 뒤졌습니다만 나온 게 없었습니다. 지금도 비트코인으로 결제한 것으로 추측만 할 뿐입니다."
최 회장은 비트코인으로 뭘 어떻게 한 것인지, 추적 못 할 의뢰가 가능한지 물어보려다 말았다. 거래 내역이 잡히지 않아 미국도 2년이 걸려서야 방법을 찾은 신기술이다. 그리고 그놈이 어떤 방식으로 거래한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최 회장은 그 미술관 개관식에 가서 태호를 보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지금도 심장이 뛰고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태호가 자신을 만나면 분명히 이죽거릴 게 확실한데 그걸 견딜 자신이 없었다.
"일주일 뒤 그 미술관 개관식이 있지?"
"네, 회장님."
"그거 못 간다고 전해."
비서실장은 깜짝 놀랐다.
"안됩니다, 회장님. 대통령까지 참석하는 개관식입니다. ST 건설에서 지은 미술관인데 회장님이 빠지시면 괜한 의심만 살 뿐입니다. 지금은 철저히 꼬리 자르기를 하셔야 합니다."
"어디까지 잘라야 하는데?"
"... 최악의 경우 사모님과 이혼하시고 실적이 안 좋은 친인척들은 모두 다 정리하셔야 합니다."
"더 최악은?"
"..."
말을 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최 회장도 그룹 이미지 쇄신을 위해 옷을 벗어야 한다.
최 회장은 어릴 적 망나니처럼 활개 치고 다니던 아들과 그런 아들을 맹목적으로 감싸던 아내를 바로잡지 못한 죗값을 지금 치르는 것 같았다. 최 회장의 입에선 깊은 한숨만 나왔다.
*
화창한 가을날이었다.
푸른 하늘은 높고도 높아 복수를 즐기기엔 더없이 좋은 날이기도 했다.
제마와 오고 싶었지만 임신한 제마를 두고 비행기를 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번에도 유산하면 뒷일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게 아니어도 같이 못 올 이유는 더 있었다. 아름다운 미술관을 개관하러 왔지만 여기서 벌어질 일은 그렇지 못할 게 확실해서다.
막 개관을 알리는 안내가 들려왔다.
안내에 따라 테이프 커팅을 하러 태호가 중앙으로 이동했다.
대통령 내외가 가운데 서고 태호도 그 옆에 서 있었다.
태호와 가족 옆에는 다움 김유미 관장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 서울 시장과 최태선 회장 등이 서 있었다.
영부인은 모르지만, 대통령과 태호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고 있었다.
태호를 만나 반갑게 인사하는 대통령의 얼굴에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를 만났다는 기쁨과 그가 공을 들여 건설한 미술관 개관을 축하하는 마음과 함께 한국 굴지의 그룹 ST가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됐다는 안타까움이 공존했다.
테이프 커팅을 한 다음 대통령 내외와 환담을 한 후 최 회장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설계대로 잘 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태호의 얼굴을 보며 최 회장은 떨떠름한 기운을 겨우 감췄다.
"만족하신다니 다행입니다, 태호 작가님."
"아내도 소개해 드리고 싶었는데 못 왔습니다. 좀 늦게 둘째를 가졌습니다. 사모님이 보내신 선물 덕분에 2년 전에 둘째를 유산했거든요."
태호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미술관을 떠나려는 최 회장에게 다가가 말했다. 웃으며 말하지만, 속에 쌓인 분노를 못 느낄 최 회장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