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에미리트의 제안4
태호는 국왕이 고령인 점을 고려해 빠르게 작업하기로 마음먹었다. 의뢰인이 자기가 주문한 작품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만 한 비극은 없다. 뉴욕으로 돌아가 구도를 잡기 위해 이슬람 관련 서적과 인터넷 자료 등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열 작품 정도를 만들기로 한 후, 예언자 무함마드의 일생 중 제일 중요한 열 가지 이야기를 찾았다. 자료를 찾기 시작한 후 얼마 뒤, 주위에 도움을 요청했다. 코란을 읽어본 경험이 있다 하더라도 이런 중요한 작품을 홀로 결정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관련된 토론이 활발해 원하는 자료를 구하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태호는 구상한 내용을 자필로 쓴 다음 제마와 함께 아부다비로 향했다.
이메일로 전달하면 간단하지만, 직접 요청 사항을 전달하기로 마음먹었다. 지난번 묵었던 호텔이 마음에 든 것도, 아랍 에미리트 항공사 일등석이 무료인 것도 여행을 결정하는 계기가 됐다. 아랍 에미리트에 도착한 태호는 마중 나온 문화관광청 직원에게 편지를 전달하고 제마와 호텔에서 대기했다.
아랍 에미리트 국왕은 일정을 소화하고 난 뒤 자택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비서가 가지고 온 태호의 편지를 읽었다.
태호의 편지에는 구상 중인 작품이라며 무함마드의 일대기를 12연작으로 그려보겠다는 계획이 적혀있었고 12연작에 담길 장면 또한 하나하나 나열되어 있었다.
- 무함마드가 분쟁의 진원인 흑석을 옮기는 장면
- 무함마드가 천사 가브리엘을 히라 동굴에서 만나는 장면
- 아내 카디자의 품에서 편안하게 잠드는 모습
- 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무함마드가 사막을 홀로 걸어가는 모습
- 무함마드와 열두 제자의 모습
- 메디나에서 이슬람 공동체를 만드는 모습
- 바드르 전투
- 우후드 전투
- 메카를 무혈 입성하는 모습
- 카바 신전에서 수많은 우상을 부수는 장면
- 산을 옮기기 위해 직접 걸어가는 장면
- 아내 아이샤의 품에서 죽는 장면
편지에 담긴 가장 중요한 질문은 자신이 선택한 장면들이 무함마드의 일대기에서 가장 중요하거나 적합한 장면이 맞는지를 물었다.
태호의 다른 요청사항에는 선택한 12연작을 그리기 위한 자료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자신이 자료를 찾아서 작업을 시작할 경우 준비 기간에만 얼마가 소요될지 알 수가 없다며 가능한 한 빨리 작업을 완성하고자 한다는 의욕을 드러냈다. 엄청난 대작이 될 것이 분명한 이 작품들에 오점을 남기기 싫다는 이유도 덧붙였다.
국왕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고 바로 태호에게 친필로 답장을 썼다.
"자네의 선택은 적절하며 지원 가능한 모든 것을 지원하겠네."
국왕은 최측근 비서를 늦은 시간이었지만 호출했다. 국왕은 태호의 편지를 비서에게 넘겼다. 비서는 편지를 읽고 국왕이 자신을 호출한 이유를 파악했다.
"권태호 작가의 요청사항을 파악해 최대한 빠르게 제공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조처를 하게. 난 내가 살아 있을 때 완성된 그림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정신이 온전할 때 완성된 그림이 보고 싶네."
비서는 국왕의 말을 단숨에 이해했다. 온갖 성인병을 다 달고 사는 국왕은 건강에 자신이 없었다. 태호가 작품을 완성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하라는 말은 작품 활동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
태호가 자료가 필요하다고 하면 자료를 얻어다 줄 것이고, 뉴욕의 현재 작업실이 작다고 하면 큰 작업실을 얻어 줄 것이다.
비서가 빠르게 사라진 뒤, 밤늦은 시간이지만 국왕은 메카를 향해 절을 하며 알라께 태호가 완성할 작품을 보고 당신께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
태호는 제마와 아부다비에서 이박삼일 휴가를 잘 즐긴 후 아침에 짐을 챙겨 체크아웃하고 뉴욕으로 가기 위해 공항으로 이동할 준비를 했다. 호텔에서 준비한 리무진은 이미 두 사람을 태울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이었다. 태호와 제마가 호텔 로비에 나타나자 대통령 비서실에서 파견된 직원이 다가왔다.
"샤키르 알리입니다. 대통령 비서실에서 나왔습니다. 아부다비에서의 여행은 즐거우셨습니까?"
"안녕하세요. 덕분에 잘 지내고 갑니다."
태호는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감사를 표했다. 정말 호텔에서 왕족처럼 잘 지냈기 때문이다.
"공항까지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샤키르는 호텔 로비에 있던 두 명의 직원을 호출했고 그들은 빠르게 다가와 태호와 제마에게서 짐을 받아 리무진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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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으로 향하는 리무진 안.
리무진은 호텔에서 준비한 리무진이 아니라 샤키르가 몰고 온 리무진이었다. 공항에서 호텔로 올 때 탔던 리무진보다 훨씬 더 고급스러웠다.
샤키르는 가방에서 편지를 꺼내 공손히 태호에게 건넸다.
"국왕 폐하의 친서입니다. 읽어보시고 궁금하신 내용은 저에게 물어보시면 됩니다. 이 편지는 청장님이 보내신 편지입니다."
국왕의 편지에는 감사 인사와 지원을 약속한 내용이 쓰여 있었고, 청장의 편지에는 앞의 비서가 자신을 돕기 위한 대통령 비서실에서 파견된 직원이라고 적혀있었다.
"국왕 폐하께서는 당신의 호의가 잘못 전달되는 것을 경계하십니다."
샤키르라는 직원의 임무가 태호에 대한 감시가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아닙니다. 국왕 폐하의 호의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태호의 긍정적인 답을 들은 샤키르는 밝은 표정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제가 지시받은 내용은 태호 님이 필요하신 모든 것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먼저 폐하께 요청하신 자료는 준비 중입니다. 역사적으로 고증이 끝난 자료를 전달 드릴 예정이며 만약 직접 방문이 필요하신 경우 가용한 모든 수단을 이용해 빠르고 편안한 방문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태호와 제마가 탄 비행기에 샤키르도 동승했다.
뉴욕에 도착한 샤키르는 태호보다 더 능숙하게 리무진을 잡고 두 사람을 집까지 데려다줬다.
"언제쯤 방문하면 될까요?"
"이틀 뒤에 작업실에서 만났으면 좋겠군요. 뉴욕에선 따로 지낼 곳이 있으십니까?"
"정부 소유의 건물 중 태호 님의 작업실과 가까운 곳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서 머물 예정이니 저에 대해서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아니, 신경을 쓰시면 제가 힘들어집니다. 제가 여기 있는 이유가 태호 님이 사소한 일에 신경을 안 쓰게 해드리기 위함이니까요. 그림 이틀 뒤에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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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 태호의 작업실에 나타난 샤키르는 정말 유능했다. 30대 초반으로 뉴욕대에서 MBA를 마치고 고국인 아부다비에서 취직했는데 대통령 비서실에 배정되었다.
비서실 입사 이후 뉴욕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VIP의 방문을 지원했다고 한다. 뉴욕의 숙박부터 문화시설까지 정말 말 그대로 빠삭했다. 뒷골목의 은밀한 거래까지 완벽히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의 짧은 브리핑을 들은 태호는 왜 그가 자신보다 뉴욕에 더 익숙했는지 이해했다.
"아부다비의 대학교수들이 태호 님에게 요청하신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준비 중입니다. 사실 요청하신 내용이 대학교 교양수업 정도 레벨이기에 준비하는데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8시간 정도의 강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편하신 시간대를 알려주시면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10시 정도부터 3시간씩 3번 정도 하는 게 어떨까요?"
"좋습니다. 뉴욕의 오전 10시는 아부다비의 오후 6시니 그렇게 늦지 않은 시간으로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내일 컴퓨터 등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일단 비서실에서 준비한 자료를 잠시 설명해 드리고자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샤키르는 언제 구했는지도 모를 다양한 영문 서적들을 태호 앞에 늘어놓고 설명을 이어갔다.
"이 책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천사 가브리엘을 만날 시기에 메카에서 유행하던 의복에 대한 자료가 담겨 있습니다."
"무함마드의 열두 제자에 대한 가장 신빙성이 높다고 인정받은 논문입니다."
"이슬람 관련 모든 고대 그림 자료가 담겼습니다."
"바드르 전투와 우흐드 전투에 관련된 자료입니다. 아랍 국가의 사관학교에서 필수로 배우는 전투이기에 고증도 확실합니다."
"아이샤는 이슬람에서 여러 가지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인물입니다. 종파에 따라 평가도 갈리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자료도 많고 다양해 실증 자료만 추려서 가져왔습니다."
"기본 자료이지만 이 자료만으로 궁금하신 내용 대부분을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내일 교수들에게 브리핑을 받으시면 더욱 쉽게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전 이 근처에서 있을 예정이니 일이 있으시면 전화 주시기 바랍니다."
샤키르는 정말 브루클린 근처에 아파트를 얻어 생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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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은 3층의 작업실을 사용하기로 했다. 기존에 걸려 있던 그림은 지하 수장고로 옮겨졌다. 시간이 지나 그림을 제작하던 직원들도 얼마 없었다. 지금은 초상화 작업에 특화된 몇 명의 직원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삼일간의 수업이 끝나고 태호는 2박 3일 일정으로 사우디의 메리나와 메카의 모든 중요 유적지를 다녔다.
뉴욕으로 돌아온 태호는 찍은 사진과 자료들을 펼쳐 놓고 구상을 시작했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샤키르는 작업실에 커다란 보드 네 개 정도를 가져왔다.
보드에 사진과 메모 등을 잔뜩 붙여 놓고 그 앞의 의자에 앉아 떠오르는 것들을 스케치북에 그렸다. 한 장면의 전체 구도를 그런 스케치가 있는가 하면 부분을 세세하게 그린 스케치도 있었다.
스케치는 쌓였고 보드는 비좁아졌다. 보드 두 개를 추가로 구매하고 나서야 12 작품에 대한 스케치가 끝났다. 구상이 끝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 4개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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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키르는 일주일에 한 번 태호의 작업 진행 상황을 이메일로 비서실에 보고했다. 내용은 비서 실장까지 보고가 되었지만 비서 실장은 국왕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그 작품들을 처음 접했을 때의 감동을 위해 보고하지 말 것."
비서 실장이 처음 보고하고자 했을 때 국왕의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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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들어갈 부분 부분의 스케치를 하면서 태호의 머릿속에는 작품 전체에 대한 구상도 정리되어 갔다.
먼저 '무함마드가 천사 가브리엘을 히라 동굴에서 만나는 장면' 은 카라바조처럼 그리기로 했다.
카라바조의 정식 이름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이탈리아 화가로 1571년 태어난 40년을 불꽃처럼 살다간 당대 최고의 화가였다.
그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데, '밝음-어둠'을 의미하는 이탈리아 용어인 키아로스쿠로는 다빈치와 카르바조가 잘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기법은 명확한 색조 대비를 통해 묘사된 대상을 입체적으로 보이게 한다. 카르바지오는 작품의 극적인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했는데, 태호는 메카 근처 돌산인 히라산의 한 동굴 혹은 암혈에서 일어난 무하마드와 천사 가브리엘의 만남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고 보았다.
크기는 200cm x 300cm. 천사 가브리엘이 동굴의 위쪽에서 아래쪽에 있는 무함마드를 내려다보고 있는 구조다. 한밤중인지 동굴 안은 어두컴컴했지만, 가브리엘의 몸에서 내뿜는 빛에 가브리엘과 무함마드를 드러내기엔 충분했다.
배송된 캔버스 위에 스케치하는 한편, 같은 비율의 작은 캔버스 40cm x 60cm에는 똑같은 스케치에 채색까지 했다. 채색을 대신 해줄 화가에게 건넬 샘플이었다.
태호는 이 거대한 캔버스에 채색까지 다 할 경우, 한 작품을 끝내는데도 최소 1년에서 최대 2년의 세월이 걸릴 것으로 보았다. 12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20년의 세월을 보내야 하는데 한 작품에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