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마리아 조각상3
그림에 머물러 있던 빛의 마리아는 백삼십 년 만에 그 실제 모습을 드러냈다. 빛의 마리아의 얼굴은 은색 색조 화장품으로 옅게 칠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빛의 마리아 그림에서 볼 수 있었던 그 자애로운 표정도 그대로였다.
바람에 날려 사방으로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과 길게 앞으로 뻗은 두 손은 마리아를 방금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천사로 만들었다.
드레스는 어느 파티장에서 방금 나왔다고 믿을 만큼 화려했다. 실버 실크 드레스는 바람에 펄럭이고, 드레스 주름 사이로 보이는 화려한 자수는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하얀색 빛을 사방으로 반사하며 아름답게 빛났다.
은빛 반짝이는 빛의 마리아는 마치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천사가 저주에 걸려 은으로 변한 듯했다. 누군가 저주를 풀어 본연의 모습으로 돌리고 싶은 강한 충동을 일으켰다.
은빛 빛의 마리아 옆에는 컬러풀한 빛의 마리아도 동시에 공개되었다.
저주가 풀려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빛의 마리아 같았다. 피부는 밝은 우윳빛이었고 주름진 실크 드레스는 피부만큼이나 하얗게 빛났다.
"와"
관람객들은 탄성을 지르며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조각상으로 다가왔다. 예상했던 바이기에 윌슨은 웃으며 미리 준비해뒀던 흰색 장갑을 건넸다.
"장갑을 끼고 만져보세요."
보통은 만지지 못하게 하는데 태호가 윌슨을 설득해 이런 준비를 했다. 누구라도 이런 작품을 보면 만져보고 싶은 게 당연했다. 다만 실리콘 조각상은 만지지 못하게 했다. 괜히 파손할까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화려하게 공개된 빛의 마리아 조각상을 복잡한 얼굴로 쳐다봤다. 시니컬한 농담 같은 자신의 작품과 비교해서 여기 오늘 보는 빛의 마리아 조각상은 뭔가 진짜 예술품 같았다. 하이아트의 결정판 같았다.
자신이 늘 가슴속에 응어리져 남아있는 공포를 이 작품이 건드렸다. 갑자기 세상이 바뀌어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가 또한 바뀌어 예술가로 성공하기 전, 집도 없어 친구 가구 판매장에서 잠을 자던, 힘들고 어려웠던 시대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그런 걱정과는 별개로 집에 이 작품을 놓을 곳이 없는지 고민했다. 이 조각상의 가격이 얼마나 할지 감도 오지 않았지만, 돈이 되면 하나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가격이 내려갈 것 같지 않았다.
데브 라우터는 천이 내려가고 조각상의 머리 위에서 켜진 불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하자 계속해서 셔터를 눌렀다.
상업주의 얘기는 나오겠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아름다운 조각이었다. 적어도 태호가 욕은 먹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브는 약속된 태호와의 인터뷰 시간이 되자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 바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 공개한 빛의 마리아를 보니 그림에서 볼 수 있었던 아름다움을 작품에서도 비슷하게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일각에서 언급하던 지나친 상업주의라는 우려는 어느 정도 가실 것으로 예상합니다. 하지만 빛의 마리아라는 주제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건 아닌지 의구심을 가지실 분들도 많을 거로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태호 작가의 의견은 무엇입니까?"
"이제 막 첫 작품을 제작했을 뿐입니다. 더 다양한 작품을 제작할 계획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을 제작할 예정인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황홀경 5연작이 다음 작품이 될 것입니다. 만약 내가 좀 더 특이하고 재밌는 생각을 해낸다면 다른 작품이 먼저 나오게 되겠지만요."
"빛의 마리아를 주제로 두 종류의 조각상을 제작하였습니다. 저 실리콘 조각상은 잘 만들어진 건 사실이지만 뭔가 고귀함과는 강철 조각상보다 부족하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다른 두 형태의 조각상을 제작한 이유가 뭔가요."
"형태가 다른 두 조각상을 만든 이유는 이 두 조각상이 프로토타입이기에 그렇습니다. 앞으로 제작될 빛의 마리아 조각상은 현재 이 두 조각상의 발전형이 될 것입니다. 만약 저 실리콘 조각상이 인기가 없다면 더는 제작되지 않겠지요. 물론 난 저 실리콘 조각도 좋아합니다."
"프로토타입이라고 하셨는데, 주문 제작을 하시겠다는 얘기신가요?"
"아닙니다. 주문 제작은 받지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작품을 만들 뿐이죠."
"마우리치오 카텔란 작가가 오늘 이곳에 올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감사 인사도 건넸는데, 그가 어떤 영감을 줬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프레임에 갇혀 있던 빛의 마리아를 이렇게 프레임 밖으로 꺼내라는 제안을 해 주신 분이죠. 조각상 제작을 망설이고 있었는데 조각상을 제작해 보라고 제안해 주셨어요."
태호는 마우리치오를 한껏 찬양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
뉴썬 갤러리의 오프닝 행사는 너튜브를 통해 공개되었다. 태호의 두 조각상 역시 알려지게 되었는데 뉴욕에 이 소식이 퍼지는 데는 정말 며칠 걸리지 않았다.
빌바오 미술관은 처음부터 빛의 마리아 제작을 알고 있었기에 이미 이 조각상에 대한 태도도 명확했다.
"윌슨에게 연락해서 그 프로토타입을 우리에게 팔겠다는 확약을 받으세요."
미술관장 토마스는 얼마나 시달리다가 왔는지 얼굴이 핼쑥한 채 제이슨에게 지시를 내렸다.
"관장님.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지시인지 잘 알고 계시죠?"
제이슨도 입이 댓 발이 튀어나온 채 토마스에게 항의했다.
"휴···. 어쩌겠습니까. 그 작품을 보고 눈이 돌아간 이사들이 한둘이 아닌데."
"그 프로토타입 말고 그냥 하나 주문하면 안 되겠습니까? 가장 프로토타입과 비슷하게 만들어 달라고 하던지, 아니면 가장 화려하게 만들어 달라고 해도 되고요."
"이사들이 프로토타입이 아니면 ‘절대 안 돼’를 외치고 있어요."
"가격이 얼마가 될지 알 수가 없는데 무엇을 약속하고 작품을 산다는 말입니까?"
"모르죠. 천문학적인 가격이 될 것이 뻔한데."
"요즘 조각상들 가격도 어마어마합니다. 몇 년 전 자코메티의 조각이 1억 달러에 팔린 거 보세요. 시장이 미쳐있어요. 자코메티야 자코메티니 그렇다고 쳐도. 조만간 제프 쿤의 조각상도 5천만 달러를 할지 모릅니다."
"언제는 안 미쳐있었답니까? 얼마 전 서브 모기지 때나 주춤했지, 언제나 호황이었죠. 그리고 이 작품은···. 제이슨만 알고 계세요. 중동 왕족들도 관심을 보입니다. 간만에 자기들 취향에 맞는 작품이 나와서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 내게 물어보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이거야 원."
제이슨은 멈칫하며 놀랐지만, 곧 토마스를 위로했다.
"힘드시겠어요."
"빛의 마리아의 다른 버전은 개인 컬렉터들이 차지하라고 해요. 하지만 저 프로토타입은 우리가 차지해야 합니다. 나중에 이 작품이 경매시장에 나오는 순간 자코메티까지는 아니어도 제프 쿤보다는 고가에 거래될 확률이 있어요. 그러니 지금 비싸다고 포기하지 말고 미리 선점해 두어야 합니다."
"얼마에 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러니 가서 그쪽 생각부터 파악해 봅시다. 뭘 알아야 협상을 할 것 아닙니까."
*
뉴욕 맨해튼 5번가의 티파니 본사.
얼마 전 태호에게 작품 의뢰가 와 몇몇 팀들이 비상이 걸렸다.
"빛의 마리아 조각상의 눈을 제작해 달라는 의뢰입니다. 스틸과 실리콘 조각상 양쪽에 쓰일 눈인데 보석 종류를 원하고 있습니다."
티파니의 수석 디자이너인 토미는 매니징 디렉터인 칼에게 얼마 전 태호의 요구 사항을 브리핑했다.
"다른 건 없는가? 목걸이나 귀걸이, 반지, 팔찌, 뭐든지. 우리랑 협업할 만한 게 있냐는 말일세."
"그런 건 일절 없었습니다. 거의 자기 할 말만 하고 끊어버리기에 말할 틈도 없었습니다. 협업은 우리 쪽에서 제안해야 합니다."
"끙···. 언제 전화 오나 기다리고 있었지만, 막상 전화가 와도 골치가 아프군. 태호 작가가 요구한 눈은 제작하기 어려운가?"
"보통 빛의 마리아 V의 눈이 제일 유명하고 그리기 까다로운 것으로도 악명 높습니다. 똑같이 따라 해도 빛의 마리아의 느낌이 나지 않는다고 얘기합니다."
"그걸 보석으로 구현하는 작업이 가능한가?"
"최대한 비슷하게 해봐야죠."
"자네가 책임지고 작업해. 우리에게 먼저 와서 다행이지 해리 윈스턴에 갔으면 어쩔 뻔했어."
토미는 생각만으로도 뒷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 달짜리 프로젝트로 정의해서 팀 꾸리고 다음 주에 보고하게."
"알겠습니다."
*
며칠 뒤.
토마스는 자유의 나라 미국에 사는 미국인답지 않게 꽤 긴장한 상태였다. 굳은 표정과 단어마다 배어 나오는 높임말이 꽤 지위가 높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음을 보여줬다.
"예 국왕 폐하. 그는 애초에 도금할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프 쿤의 강아지처럼 다른 색을 넣을 계획도 있습니다. 원하시는 색이나 패턴이 있어도 적용 가능합니다."
"눈을 빛의 마리아처럼 만들 수 있냐는 질문이시죠? 가능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플라스틱보다는 보석이 좋겠죠. 이것도 태호가 시도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백금으로 작품이 제작 가능한지부터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무엇보다 익숙한 작업이 아니라면 제작 기간도 늘어날 테고 비용도 많이 증가할 수 있으니까요."
"그를 그곳으로 초대하시고자 한다면 제가 운을 띄워 보겠습니다."
전화를 마친 토마스는 피곤한 표정으로 태호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았다.
*
일주일 뒤, 한국의 한 인터넷 언론사의 뉴스 하나가 각종 포탈에 올라와 누리꾼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뉴욕에서 가장 핫한 신인 작가 - 권 태호
하이-엔드 (high-end)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 중에 그나마 작품을 보고 한 눈에 이해할 수 있는 작가. 바로 한국계-미국인 권태호 작가를 일컫는 말이다. 얼마 전 뉴욕 첼시의 갤러리에서 빛의 마리아 조각상 두 작품을 공개하는 행사를 성황리에 마쳤다.
난해한 컨템포러리 예술 작품에 지친 미술 애호가들에겐 한 줄기 빛 같은 작품으로 예술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작품을 보면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마성을 가진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스테인리스 스틸 버전과 실리콘 버전 두 작품이 공개되었는데, 태호 작가는 이번 작품이 앞으로 제작될 다양한 버전의 빛의 마리아 조각상의 프로토타입이라고 밝혔다.
뉴욕 미술계는 이 프로토타입을 누가 구매하게 될지에 대해 매우 큰 관심을 보인다. 이 프로토타입이 향후 경매시장에 나온다면 가장 비싸게 거래된 예술작품이라는 타이틀을 가져갈 확률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지금 생존 작가 중 가장 비싼 작품을 제작하는 제프 쿤을 능가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으로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는 이번 작품을 공개하며 이탈리아계 미국인 작가인 마우리치오 카텔란을 특별한 감사의 인사를 공개적으로 전했는데, 태호는 그가 이번 작품 제작에 큰 영감을 줬다고 밝혔다.
이번에 문을 연 갤러리가 위치한 건물은 시가 300억이 넘는 건물로 권태호 작가의 소유주로 알려지면서 그가 가진 재산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기사 밑에는 여러 댓글이 달렸다.
"와, 얘가 이제는 조각까지 하네."
"얘 원래 화가 아니었어."
"남들이 제작하고 자기는 아이디어를 냈으니 자기 작품이라고 하는 거 같은데?"
"인간적으로는 몰라도 예술적으로는 매우 좋아하던 사람인데 이제는 접어야 할 듯."
"인간성이야 어찌 되었든 조각은 정말 예쁘다."
"인간이 안 됐는데 작품만 예쁘면 뭐함."
"작품 얘기하는데 인간성은 왜 찾아? 그럼 카르바지오는 살인자였는데. 그림 그의 작품은 지금 다 폐기 처분되어 있어야 하네?"
"도미 미쿡인 얘기하는데 카르바지오는 오버다."
"얘 이제 건물주네? 그것도 뉴욕 예술의 거리인 첼시에 빌딩을."
"미국 재벌 딸하고 결혼하더니 벌써 빌딩을 샀어?"
"군대도 안 가고 재벌 딸인데 슈퍼 모델인 여자와 결혼도 하고. 인생 성공한 듯."
기사는 태호가 의뢰해 배포했고 밑에 달린 댓글도 작업에 들어간 결과이다. 태호는 언론을 통해 자신이 계속해서 예술계에 영향력을 크게 미치고 있다는 점을 사람들이 잊지 않게 흘렸다. 모 재벌가가 잘하는 전략으로 태호도 배웠다. 건물주 얘기는 그놈이 잘 읽어주길 바라는 소박한 마음에 살짝 친 양념에 불과했다.
아르노 회장이 말하던 영향력을 키우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