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마리아 조각상2
윌슨에게 부탁하자 빌바오의 제이슨까지 나서 괜찮은 조각가를 수소문했고 얼마 뒤 30대 후반의 조각가 안드레 마퀴스를 소개했다. 제이슨에 따르면 탁월한 실력에 비해 운이 없어 전업을 고민 중이라고 했다.
요즘 할리우드의 특수 분장이 워낙에 인기라 그쪽으로 갈까 고민하다, 제이슨의 얘기에 태호와 인터뷰를 보기로 했다. 돈보다 아직은 꿈을 쫓는 안드레였다.
제이슨이 보증하는 조각가답게 안드레는 실력이 좋았다. 한 달 동안 1/16 사이즈로 제작한 빛의 마리아 클레이 모형이 태호의 마음에 쏙 들었다. 축소 사이즈이기에 실리콘 조각상을 만들기로 하고 작업에 들어갔다. 안드레는 꽤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는데 조각상이 팔리면 판매금액의 3%를 수당으로 받는 조건이었다.
"태호, 실리콘의 경우는 아예 전문 업체에 맡겨 버리는 게 빠르고 편할 수 있어. 기간은 석 달에서 넉 달 정도 걸리겠지만 20명을 고용하느니 그냥 30만 불 정도 쓰는 게 싸게 칠 거야."
안드레는 조각상 제작을 위한 외부 협력업체를 찾을 것을 제안했다.
영국의 전문 업체 마담투소와 접촉해 두 달 뒤 방문 일정을 잡았다. 그쪽 일정도 빠듯하지만 빛의 마리아를 구체화하는 작업에는 큰 관심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로 했다.
그사이 안드레는 실물 크기의 클레이 모형을 만들었고, 태호는 안드레가 요구하는 장면을 제공해야 했다. 바로 빛의 마리아의 뒷모습이었다.
조각상은 그림보다 훨씬 커서 높이가 거의 2m에 달했다. 이 크기는 앙리 보나가 본 빛 마리아의 실제 키였다.
두 달 뒤, 앙리 보나가 본 빛의 마리아와 가장 닮은 모형이 태호와 안드레 앞에 완연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은 제마와 제이슨까지 와서 완성된 모형을 구경했다.
빛의 마리아의 클레이 모형 버전은 흙 속에 묻혀있던 돌덩어리를 꺼내 수년간 1mm씩 깎아내 다듬은 화석 같았다.
짙은 갈색의 미녀가 흙에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듯하기도 했다. 안드레마저 자신이 빚은 빛의 마리아를 보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작품을 쳐다봤다. 얼마 후, 이 흙의 미녀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줄 팀이 영국에서 도착했다.
"이번에 빛의 마리아 제작을 맡을 베넷 잭슨이라고 합니다."
마담투소의 팀장은 40대 중반 정도로 보였는데 빛의 마리아 보자 한동안 감탄을 하며 구경을 하다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이 작품을 제작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 있는 모형 그대로 실리콘으로 뽑아낸 다음, 색칠만 온전히 하는 방법이 있고. 다른 방법으로는 뼈와 살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실제 사람처럼 구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빛의 마리아가 입은 하늘거리는 옷을 실제 의복으로 구현하는 것이죠."
태호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실리콘으로 만들어 색칠만 하는 것으로 가지요. 너무 사람처럼 꾸미면 빛의 마리아의 신비로움은 사라집니다. 빛의 마리아는 빛의 마리아로 남아있어야 합니다. 신화를 깨고 싶지 않아요."
베넷과 팀원은 클레이 모형에 대한 사진을 찍고 그들이 가진 장비를 이용해 3D 스캔을 떴다. 또한, 어떻게 채색을 할지 논의를 마치고 돌아갔다. 작업의 진척상황을 보기 위해 격주로 화상 컨퍼런스 콜을 하기로 했다.
스테인리스 스틸 조각상을 만드는 업체를 찾는 건 윌슨의 몫이었다. 뉴욕 근처에는 조각가가 많았고, 윌슨은 이 업체들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알고 있었다.
빛의 마리아 제작이 매우 까다롭기에 가격은 비쌌다. 윌슨은 비슷한 주문이 최소 두 개는 더 있을 것이라며 협상을 진행했다. 30만 불이 들어야 할 빛의 마리아 제작 비용을 25만 불로 깎았다. 제작 기간은 최대 4개월을 잡았다.
윌슨은 태호가 조각상까지 제작하겠다는 얘기를 듣자 심각하게 갤러리의 위치를 옮길 것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금 갤러리도 그리 크지 않았고 위치도 별로였으며 조각상을 전시하기엔 작았다.
갤러리의 크기 외에도 윌슨은 갤러리를 옮겨야 할 다른 이유가 있었다. 지금도 맨해튼 첼시의 10번가와 11번가 사이에 있는 많은 갤러리가 태호에게 검은 유혹의 손길을 던지고 있는데 작은 갤러리는 약점이 되어 윌슨을 괴롭힐 것이다.
태호 관련 일이 너무 많아져 윌슨이 정신없이 바빠지자 몇몇 작가들은 윌슨이 태호에게만 너무 집중한다며 볼멘소리를 했고 몇 명은 이미 갤러리를 떠났다. 직원도 더 뽑고 적어도 빛의 마리아가 완성되기 전에는 이사를 끝내야 한다. 윌슨도 마음이 조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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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조각상 제작은 순조롭게 이어갔다. 태호가 업체에 강조한 것은 사람이 아닌 신의 모습을 닮은 조각상을 제작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핑크빛 피부가 아닌 우윳빛 피부, 금발이 아닌 황금빛 머리카락으로 묘사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태호는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전시나 판매를 하지 않을 각오까지 했다.
스테인리스 스틸 조각상은 색을 넣는 문제로 골치가 아팠다. 제프 쿤의 조각상을 보면 색이 다양한데 티타늄 이온 증착 기술로 색을 입히는 것이다. 태호는 일단 이번 작품은 색 없이 진행하기로 하고 다음 버전은 색을 입히고 그다음 버전은 도금까지 할 작정이었다.
조각상 완성 한 달 전에 윌슨은 첼시 웨스트 25번가에 태호와 제마가 소유한 건물에 갤러리를 열었다. 마틴의 회사가 소유한 건물 중 하나가 25번가에 있었는데, 이 건물을 태호와 제마가 대표로 있는 법인에 시가에 프리미엄을 조금 얹어서 넘겼다.
마틴이 노른자위 건물이라 그냥 단순히 시가로 넘기면 배임 혐의가 붙을 수 있기에 프리미엄까지 붙여서 판 것이다. 뉴욕의 건물은 해마다 올랐기에 마틴은 팔고 싶지 않아 했지만 이 건물이 마틴의 회사가 가진 건물 중 제일 작았고 앨리스도 끈질기게 설득했기에 비교적 저렴하게 넘겼다. 5층 빌딩이며 건물가격은 3천만 달러로 금융위기 전 가격인 5천만 달러보다는 매우 낮았다.
이 건물 1층에 윌슨이 새로 오픈한 갤러리는 꽤 컸는데 전체 크기가 기존 갤러리가 있던 브루클린보다 세배 이상 컸다.
"태호. 빛의 마리아 조각상을 많이 만들지 않으면 렌트비가 밀릴 수 있어."
윌슨은 갑자기 브루클린에 있을 때보다 10배가량 늘어난 렌트비에 앓는 소리를 했다.
내부 인테리어가 끝난 갤러리 중앙에는 스틸 버전의 빛의 마리아와 실리콘 버전의 빛의 마리아가 놓을 자리가 마련되었다. 곧이어, 런던에서 비행기로 실리콘 버전의 빛의 마리아가 배송됐고, 얼마 후 스틸 조각상까지 배송됐다.
윌슨, 태호, 제마, 안드레까지 모여 빛의 마리아가 설치되는 모습을 지켜봤다. 윌슨은 조명 전문가를 불러 조각상이 가장 아름답게 빛날 수 있도록 조명도 추가로 설치했다. 태호와 안드레는 다음 버전의 빛의 마리아를 어떻게 제작해야 할지 고민이었고, 윌슨은 이 작품을 얼마에 팔아야 제값인지 고민했다.
태호와 윌슨에게 한 가지 당부했던 건 적어도 이 작품들을 당장에는 팔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 있는 것은 프로토타입으로 남겨두고 제작 의뢰가 들어올 때 이 작품을 기준으로 다양한 제작 옵션을 붙이기로 했다. 태호는 어떤 빛의 마리아도 같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빛의 마리아는 다양한 버전으로 제작할 예정이었다. 금으로 도금한 황금의 마리아, 조그만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박은 빛이 마리아 다이아몬드, 백금으로 코팅한 플래티넘 마리아 등등. 신용카드사가 좋아할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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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은 갤러리 이전 기념으로 파티를 열기로 하고 초대장을 돌렸다. 윌슨이 아름아름 뉴욕 지인들에게 태호의 새로운 조각 작품이 온다는 소식을 알렸기에 얼마 전부터는 역으로 언제 오프닝 행사를 개최하는지 물어왔다.
뉴욕의 혹독한 겨울이 끝나고 이제 완연한 봄기운을 느낄 수 있는 4월 초 금요일 오전, 갤러리 이름을 뉴 썬 갤러리로 바꾼 윌슨은 태호의 두 작품만 흰 천으로 덮은 채 갤러리를 개장했다. 두 작품은 모든 귀빈이 참석하는 저녁 7시에 공개하기로 한 상태다.
태호는 갤러리의 전 건물주인 마틴부터 데이비드의 피앙세인 벨라까지 제마네 식구들이 모두 참석함은 물론이고 Theo 직원들과 대학 동창까지 불렀다. 미국 외 거주하는 식구와 스승, 친구들에게도 초대장을 보냈다. 꼭 참석을 바라고 초대장을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걸 핑계로 연락도 하고, 미국에 일이 있으면 뉴욕으로 와서 작품도 보고 가라고 알렸다. 물론 마우리치오 카텔란도 초대되었고, 그는 기꺼이 오겠다고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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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
두 시간 전부터 하나둘 모여든 관람객들은 가볍게 스파클링 와인과 핑거푸드를 즐기며 7시에 있을 실질적인 갤러리 오프닝을 기다렸다.
아트뉴스의 기자 데브 라우터도 6시쯤 도착해 8시쯤 있을 태호와의 인터뷰 질문을 정리하며 기다렸다. 십 분 정도의 짧은 인터뷰지만 궁금한 것을 다 얻어낼 자신이 있었다.
하얀 천에 쌓인 빛의 마리아를 보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오랫동안 실물은 못 보고 사진으로만 보던 혹은 통화만 하던 데이트 상대를 만나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연예인을 만나는 사생팬 같기도 했다. 천이 마치 아름다운 여인의 치마처럼 느껴졌다. 저걸 내리면···? 데브는 갑자기 자신이 변태가 된 것 같았다.
데브는 작품 근처에서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냄새가 났다. 상업주의와 결탁한 타락한 예술가의 냄새 같기도 했다. 돈 냄새 역시 물씬 풍겼다. 이건 의심할 필요 없는 특종의 냄새기도 했다. 이미 이번 달 잡지의 표지 모델로 두 작품 중 하나가 올라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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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 반.
짙은 회색의 더블브레스트 재킷과 정장 바지를 입은 태호와 Theo 모노그램 패턴이 담긴 원피스와 재킷을 입고 손에는 작은 탬버린 백을 든 제마가 나타났다. 주위 사람들이 모여 축하 인사를 전하고 안부를 물었다. 태호는 제마의 손을 잡고 갤러리 전체를 찬찬히 구경했다.
어제도 와서 본 갤러리지만 이렇게 손님들이 많은 곳에서 보니 전시된 작품들이 다르게 다가왔다. 빛의 마리아 그림 앞이 제일 사람들이 붐볐다. 브루클린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빛나 보였고,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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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 5분 전.
윌슨은 들고 있는 와인 잔을 작은 스푼으로 두드리며 관람객들의 시선을 모았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제 빛의 마리아 조각상을 공개하겠습니다. 중앙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데브 같은 기자는 물론, 이미 꽤 많은 사람이 빛의 마리아 조각상 앞에서 사진을 찍을 준비를 마쳤다. 조각상 앞에는 태호, 윌슨, 안드레 등 작품을 제작하는 데 관여한 많은 사람이 천을 내릴 준비를 마쳤다.
태호는 마우리치오를 조각상 바로 앞으로 이끌고 왔다.
"오늘 이 작품이 있기까지 큰 영감을 준 예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 씨에게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태호는 마우리치오에게 천을 내릴 줄을 건넸다.
"하나둘 셋 하면 같이 내리지요."
"하나"
"둘"
"셋"
천은 조각상을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태호는 순간, 이 모습이 정말 야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