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크리스티2 (146/181)

크리스티2

제마는 경매가 시작하자마자 바로 팻말을 들었지만, 그녀의 팻말은 바로 무시된 채 경매사는 다른 가격을 불렀다.

"20만 불 나왔습니다. 20만 불. 21만 불, 22만 불, 22만 불. 더 없으십니까? 저기 앉아계신 신사분. 23만 불 나왔습니다. 전화에서 30만 불 나왔습니다. 30만 불, 31만 불. 32만 불. 전화에서 33만 불 나왔습니다. 34만, 35만, 36만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36만 불. 더는 없으시죠? 그럼 36만 불에 xx 팻말을 가지고 계신 신사분에게 낙찰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태호의 그림은 시작가의 3배의 가격에 낙찰되었다. 경쟁이 붙어 가격이 오르는 경우 대개 시작가의 3배까지 오르는데 태호의 작품도 3배 정도 오른 채 마감되었다. 매우 성공적인 거래가 아닐 수 없었다.

*

처음에는 빠르고 긴장감 있게 진행되는 경매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지루해지기 사직했다.

뭔가 특별한 게 없었다. 농수산물 시장의 경매가 시장 바닥에서 열리고 예술품 경매가 록펠러 빌딩에서 열린다는 차이를 빼고는 대동소이했다.

짧게는 2시간에서 길게는 4~5시간까지 진행되는 경매를, 진행하는 경매사들조차 끔찍해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데이비드와 제마는 경매 도중 나가려고 했지만 이제 좀 알겠다는 듯한 엘리스의 표정과 끝까지 앉아있으라는 눈빛 공격에 포기하고 자리를 지켰다.

"40번 작품입니다. 197x에 제작된 와엘 샤키의 작품으로 이 시대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와엘 샤키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시작 가는 3백만 불입니다.

엘리스는 아까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쳐다보던 작품이 나오자 바로 팻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보이는 건 비단 엘리스뿐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팻말을 못 든 게 한이 된 것 인 양 여기저기서 마구잡이로 팻말이 올라갔다. 지금까지 지루하던 경매와는 다르게 갑자기 장내가 후끈 달아올랐다.

처음에 몇 번 팻말을 들었다 놨다 하며 자식들을 패닉에 빠트린 엘리스 여사는 5백만이 넘어가지 아예 팻말을 들고 내리지 않고 있었다. 자식들은 그 팻말을 내려보려고 안달이었으나 어릴 적 자기들에게 따끔하게 혼낼 때 짓던 표정을 보이며 암흑의 오로라를 마구마구 발산하고 있었다.

가격이 6백만 불을 넘어서고 8백만 불까지 이르자 하나둘 팻말을 올리는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 보였고 9백만 불을 찍자 엘리스도 더는 팻말을 올리지 못했다. 한 가닥 남은 이성이 머리에 더는 팻말을 올리는 건 미친 짓이라는 경종을 계속해서 보내왔고, 데이비드와 제마가 양쪽에서 팔짱을 끼고 팔을 들지 못하게 했다.

경매사는 무심한 눈으로 엄마를 쳐다보더니, "부인 더 하시겠습니까?"라는 멘트를 던지고 잠시 기다렸다. 그러나 엘리스가 눈을 감고 반응이 없자 당락을 결정지었다.

"930만 불. 930만 불. 네 930만 불에 여기 계신 부인에게 낙찰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작품은···."

다음 작품에 대한 경매가 한참 지난 후 붉어진 두 눈을 한 엘리스가 완전 전투 모드로 눈을 희번덕거리며 도록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아까 봐두었던 작품인데 비싸서 포기하고 있었던 경매 순서 후반대 작품들을 보기 시작했다. 핸드폰은 입구에서 회수되었기에 아빠에게 연락도 못 하고 답이 없는 두 사람은 엘리스가 고른 그림의 가격이 미친 듯이 올라가 엘리스의 예상을 초월한 가격에 낙찰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리고 두 사람의 희망대로 엄마가 선택한 그림은 시작가 4백에서 시작해서 빠르게 치고 올라가 천만 불을 찍었고, 엄마가 다시 팻말을 내리든 말든 1천2백만 불까지 올랐고 아까 엘리스를 물 먹였던 그 여자가 1천3백만 불에 낙찰을 받아갔다. 엘리스는 딱 봐도 뚜껑이 딱 열린 표정이었고 옆에 사람만 없으면 우아하게 다가가서 그 여자의 머리털을 왕창 손질해줄 게 확실했다.

데이비드는 엘리스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표정이었는데 제마가 아직은 더 머무르자는 의사 표시를 강하게 해왔다. 엄마의 기분 파악은 동생이 더 잘한다는 걸 아는 데이비드는 동생 생각에 동의했다.

"다음은 198x···. 의 작품입니다. 80년대 뉴욕 미술의 아이콘으로···. 시작가는 7백만 불입니다."

다시 정신없이 가격이 올라가기 시작했고 이제는 조는 사람은 없었다. 엘리스의 그림을 두 개나 낚아채 갔던 앞의 여자는 아예 팻말을 들고 있었고 전화로도 계속 입찰이 지속되고 있었다.

얼마 뒤, 가격은 가뿐히 2천만 불까지 올랐는데 앞의 여자도 이제 생각이란 걸 하는지 팻말을 올릴지 말지를 망설이고 있었다. 그리고 쐐기를 박듯 전화 입찰에서 2천2백만 불을 부르자 얼마 후 낙찰이 되었다.

경매가 끝난 후 데이비드는 태호 작품을 사 간 사람들을 주의 깊게 살펴봤고, 엘리스는 신경을 안 쓰는 척했지만, 그 앞에 앉아있는 재수 없는 년을 쳐다봤다. 제마도 엘리스가 머리를 뜯고 싶어 할 거라 확신하는 그 여자를 유심히 살펴봤다. 참고로 둘은 같은 여자를 보고 있었다.

제마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2시간 넘게 그 앞에 앉은 여자에 대한 품평, 험담 혹은 욕을 했다. 머리 스타일부터 구두까지 몸에 붙은 보석은 물론이며 그 와중에 어떻게 살펴봤는지 얼굴에 보톡스까지 집어냈다. 저 영악한 머리로 공부를 했으면 정말 태호랑 같은 대학교에 다녔을 것이다.

제마의 두 시간 넘는 수다로 기분이 조금은 풀어진 엘리스는 집에서 간단한 요깃거리와 와인으로 좀 더 풀어진 표정을 지었다. 그 뒤에 돌아온 마틴은 데이비드에게 경과보고를 받고 기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채 엘리스를 맞이했다.

"그래 오늘 경매가 잘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네. 그림이 마음에 드는 게 있었나 봐?"

"와엘 샤키 작품이 정말 끌렸는데 못 샀지 뭐에요."

마틴은 그 그림에 대해 아는 건 눈곱만큼도 없지만, 아내의 낙담을 풀어주기 위해 이런저런 빈말을 했다.

"좋은 작품인데 놓쳤나 봐. 태호에게 얘기해서 작품을 하나 구매하지 그래?"

이 말이 빌미가 되었는지 엘리스는 눈을 반짝이며 예전부터 봐두었던 행복 시리즈의 대형 작품을 언급했다.

"그럼 나 그 그림 중 하나를 사도 괜찮겠죠?"

"그 그림? 무슨 그림인데?"

"미술관에서 본 그림이죠."

마틴은 불안함을 느끼며 슬쩍 가격을 물어봤다.

"얼만데?"

"몰라요. 경매 시장에 나오면 그때 하나 사려고요. 난 '화창한 날씨' 그림이 좋던데. 워낙 눈여겨보던 사람들이 많아서 얼마까지 오를지는 모르겠네요."

마틴은 저절로 신음이 났다. 평소 태호의 그림값을 작가에게 직접 혹은 제마를 통해 들었더니 그림값이 얼마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경매를 통해 가격이 올라가면 정신없이 올라갈 게 확실했다.

"여보. 차라리 주문하는 게 어떨까? 태호라면 적당한 가격에 좋은 그림을 그려줄 것 같은데."

그 말에 엘리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림값부터 책정하기 시작했다.

"얼마가 좋을까요?"

이때 제마가 끼어들었다.

"엄마. 태호가 조만간 모마와 빌바오에 있는 그림들 경매에 부칠 생각인가 봐."

"그러니? 아, 그러고 보니까 태호 작품 중에 제대로 된 작품을 경매한 적이 없었구나!"

"이번이 하면 처음일 거야. 경매가가 나오면 그거 보고 작품가를 책정하면 안 될까?"

"그렇겠지? 좋은 생각이야!"

마틴은 두 사람의 대화에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딸은 남자친구에게 돈다발을 안길 생각에 여념이 없었고 아내는 딸의 남자친구에게 돈을 못 줘 안달인 듯했다.

"얼마 전에 은행 대출을 많이 받아서 현금 흐름이 안 좋아 보이더라고. 말은 안 하지만."

마틴은 남자친구 찬스를 써서 싸게 그림을 넘길 생각은 안 하고, 맨해튼에 건물 산다고 받은 대출 때문에 남자친구가 힘들어 보인다고 말하는 딸이 가증스럽기까지 했다.

"적절한 가격에 하면 어떻겠어? 굳이 경매가를 기준으로 할 필요는 없잖아."

엘리스는 마틴의 말을 이상하게 해석했다. 머릿속은 딴 생각이었고 마틴의 말은 엘리스의 두뇌 연산에 별 영향을 못 미쳤다.

"맞아요. 굳이 같은 그림을 그려달라고 할 필요는 없어요. 와서 우리 부부를 위한 특별한 그림을 그려달라고 해요. 제마, 태호에게 슬쩍 얘기해봐."

"엄마. 어떤 버전으로 작업해? 태호가 직접 다 그리면 90cm x 70cm 크기에 백만 불 정도 하거든. 그렇지 않으면 가격 차이가 크게 날거야. 많이 싸져."

"그래도 직접 다 그리는 게 낫지 않겠어? 그렇지요, 여보?"

엘리스는 타인의 손에 그림을 맡기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 그래."

"제마야, 시간 되면 태호 이곳에 방문하라고 얘기해라."

그러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혼자서 좋아하는 엘리스.

"어휴, 그림 걸리면 동네 아줌마들이 얼마나 자주 찾아올지 벌써 걱정이네. 호호."

무척이나 좋아하는 엘리스를 보며 제마는 전에 태호가 자기 식구를 모델로 해 제작한 작품 '가족과의 추수감사절 파티'는 꺼내지 않았다. 엄마가 필을 잔뜩 받으면 추수감사절 그림도 사고, 신규 작품도 제작 요청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림을 경매에 부치겠다고?"

윌슨의 한마디는 제이슨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계약 기간이 거의 다 끝나지 않았나? 우리도 슬슬 작품 팔아서 현금화해야지."

윌슨의 말에 제이슨은 계약 내용을 다시 떠올렸다. 이번 행복과 우울 시리즈는 3개월을 예상하고 시작했지만, 지금은 장소를 옮겨 상설 전시되고 있었고 관람객 수가 늘면 늘었지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특히 얼마 전 16개 벽화가 뉴욕에 설치되면서 예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한 번이라도 방문해 벽화의 원작이 된 그림들을 관람했다. 이는 곧바로 관람 수익 증가로 이어져 미술관의 부채비율을 크게 떨어뜨릴 정도였다.

이런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가로채겠다는 윌슨의 말에 제이슨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안돼!!!"

"깜짝이야! 뭐가 안돼! 내 작가 그림 가져가겠다는 건데!"

"안돼! 안돼! 이거 못 가져가!"

"계약서를 봐봐. 최장 1년이었잖아. 사실 1년 넘었지. 연장 계약까지 돈 안 받고 해줬는데 지금 와서 이러면 어떡해? 아무튼, 계약서대로 하자고. 어떤 그림 대여할 거야?"

윌슨은 그림 모두를 싹 회수한 다음 다 팔아먹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가격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주인은 정해진 그림들이 있었고 제마 식구가 모델이 된 그림은 태호가 도로 회수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알맹이는 취하고 비인기 그림을 미술관에 전시할 계획을 세웠다. 특히 '대학 졸업식'은 미술관에 남길 그림 리스트 최상단에 위치했다. 예일대에서 호시탐탐 기부받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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