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1
벽화 (mural)를 그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태호가 선택한 기법은 벽 위에 페인트로 붓칠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스텐실도 잠깐 고려해봤지만, 그 거대한 벽을 스텐실로 할 수 있는지는 차치하고 자신이 애써 작업하는 효과가 있을지 알 수가 없어 폐기한 아이디어였다.
문제는 일의 난이도. 태호는 벽에 매달려 붓으로 벽화를 그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돈이 더 들어가도 편하게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원했다.
"어떻게 하자는 거야?"
"찾아봐야지."
태호와 제이크가 낸 결론은 작업실에서 벽화를 완성한 후 벽화를 옮겨서 설치하는 방법이었다. 며칠을 여기저기 알아보고 도출한 방법은 시멘트 타일을 이용해 벽화를 그릴 캔버스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시멘트 타일을 조립한 후 그 위에 하얗게 석회를 발라 벽화를 그릴 벽을 제작한 후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다.
별도로 마련한 부둣가 작업실은 종종 미술 전시회로 이용될 정도로 공간이 넓었기에 16개의 18m x 8m의 스크린이 들어섰고 처음부터 이동과 설치가 쉽도록 시멘트 타일은 단단히 고정되었다. 파손을 방지하기 위한 다양한 장치들이 도입되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는 않겠는데?"
태호는 살롱 그림을 그리던 인원까지 총동원해 16개의 벽화를 가능한 최단기간 완성할 생각을 했다. 면적이 클 뿐이지 그림을 복잡하게 그릴 생각도 없었고, 이 엄청난 양을 혼자서 할 생각 역시 애초에 없었다. 혼자서 하면 이건 연 단위 작업이라 그럴 여건도 되지 않았다.
벽화 3개에 5명씩 달라붙어서 작업했는데 고소 작업차 대신 공사장에서 쓰는 조립식 비계 작업대를 이용했기에 작업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 그렇다고 대충 그린 것은 아니었기에 16개 그림을 모두 완성하고 나니 거의 넉 달의 시간이 지났다.
벽화가 하나하나 완성되면 대형 무진동 트레일러에 실려 경찰의 에스코트까지 받아가며 공원으로 이동된 후 설치되었다.
뉴욕 시민들은 벽화의 탄생을 무척이나 반겼다. 공원에 설치되었고 그림 크기에 공원의 시야가 가리는 문제가 생겨 벽화가 너무 크다는 불평이 없진 않았지만, 벽화의 설치 목적이 무엇인지 알려지면서 불평도 조금씩 사그라졌다.
벽화가 완성되고 설치되자 순식간에 뉴욕의 명물로 알려지면서 태호는 뉴욕을 넘어서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확실히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전에는 빛의 마리아라는 원툴 작가였다면 이제는 우울 시리즈에 이어 행복 시리즈까지 다양한 작품을 제작하고 또 성공시킨 작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 벽화를 그려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지만 모두 거절했다. 행복 시리즈만 거의 2년 가까이 구상하고 작업을 했더니 이제는 지쳐버린 탓이다.
*
벽화를 마무리하고 빈둥거리며 대충 일한 지 2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윌슨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네 행복 시리즈 하나가 이번에 경매에 나온다고 해. 들어봤나?"
태호는 꽤 놀랐다. 그림이 경매시장에 나오기에는 좀 일렀기 때문이다.
"아니요. 그 그림이 벌써 경매에 나와요?"
"소유자가 사망했고 상속 분쟁이 붙었어."
소유자의 사망 소식에 태호는 불안해하며 사망 사유를 물었다.
"자살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자살이었으면 이렇게 빨리 나오지도 않아. 경매사에서 몇 번 손바뀜을 시키고 나오겠지. 누가 자살자의 유품을 바로 경매에 부치겠는가? 저주받은 물건이라고 회피할 게 뻔한데."
"그렇긴 하겠네요."
"노환에 의한 사망이야. 특별한 건 없어. 그저 기존 소유자가 딱히 재산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나 봐. 유족들 사이에 나눠 가질 건 다 나눠 가졌고 팔 걸 정리하는데 이 그림이 그나마 경매에 올려서 팔만한 물건이라고 본거지."
"괜찮은 가격에 팔릴까요?"
"신경 쓰여?"
"안 쓰인다면 거짓말이죠. 미국에서 첫 경맨데."
"그렇지. 여기선 첫 경매지. 그럼 더 신경 쓰이겠군."
"어떤 작품이래요?"
"그 노인과 강아지 그려져 있는 그림이던데?"
"1번 작품인가 보네요."
"그래. 1-1이라고 들었어. 그림 뒤에 그렇게 적혀있었다고 하더군. 첫 그림이라 상징성도 있어서 조금은 비싸게 거래될 것 같다고 하던데?"
"1-1이라고요? 이런. 그거 제가 전체를 다 그린 유일한 그림인데 벌써 시장에 나올 줄 몰랐네요."
윌슨은 깜짝 놀랐다.
"정말 자네가 다 그린 거라고?"
"정통 버전에서 처음으로 작게 그린 그림이라 감 좀 잡으려고 다 그려봤어요. 지금까지 200점 가까이 팔았는데 전부를 그린 유일한 그림이에요."
"이건 경매사에게 알려야 하겠군. 이건 가격을 결정하는 정말 중요한 요소야."
"경매사가 어디예요?"
"크리스티!"
*
태호는 솔직히 크리스티에서 경매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감히 방문할 엄두가 나진 않았다. 이건 시장의 불문율 같은 것으로 상식 중의 상식이다. 경매장에 몰래 가본 작가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친자식이 팔려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소름 끼치는 최악의 경험으로 절대 경매장에는 가지 않는 게 좋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태호는 제마에게 경매장을 방문해 혹시 가격이 너무 낮게 나오거나 유찰되지 않게 봐달라고 부탁했다. 제마는 곧 엄마인 엘리스에게 같이 경매장에 가보자고 물었다. 엘리스는 흔쾌히 동의하며 좋아했고 마틴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고 싶은 걸 억지로 참는 것처럼 보였다.
크리스티에 의뢰하니 경매 도록 한 부를 보내줘 엘리스는 살만한 작품을 확인했다.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
Christie's (크리스티)
LOT 4A (경매번호 4A번)
Dogs with Old Couple (노부부와 개)
200X (년도)
Estimate USD 120,000 (예상가, 1억3천)
태호의 그림은 비교적 경매 초기에 거래될 예정이었다. 아무래도 가격이 싸서 그런 듯했는데 그래도 최초 거래가가 12만 불이어서 최소 체면은 유지할 수 있을 듯했다.
엘리스와 제마에 이어 데이비드도 이번 경매에 참여할 예정이다. 세 사람은 캐딜락 리무진을 타고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 도착했다. 금요일 7시에 경매가 시작되니 한 30분쯤 일찍 도착한 셈이다. 세 사람은 겉옷을 맡기고 응찰용 팻말을 집었다. 3개까지 필요는 없어 한 개만 집어 들고 경매장 안으로 입장했다.
정말 괜찮은 자리는 아니지만, 마틴의 인맥을 통해 그래도 중간쯤 하는 자리를 차지한 세 사람은 입장하면서 챙긴 도록을 겨우 무릎 위에 놓고 펼쳤다. 따닥따닥 붙은 좁은 의사는 옆 사람의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지만 해마다 늘어나는 경매 입찰자를 수용하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4번째 경매 순서는 나쁘지 않았다. 경매를 산뜻하게 시작하기 위해 분위기를 띄우기 좋은 순번이었다. 1~3번 경매 물품으로 감을 잡은 입찰자들이 본격적으로 팻말을 들어 경매 온도를 확 올리는 순서이기도 했다. 분위기가 좋고 가격도 경매 물건치고는 저렴하기에 기대 이상의 가격이 나올지도 모른다.
제마가 태호에게 부탁받은 것은 두 가지였다. 누가 응찰을 하는지와 만약 유찰될 거 같으면 최저가에 입찰해 달라는 간단한 부탁이었다. 제마는 태호가 별걱정을 다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흔쾌히 동의했다.
제마가 태호의 부탁을 받고 나왔다면 데이비드는 마틴의 부탁을 받았다.
"네 엄마가 그림을 사려고 하거든 5백만 불까지만 허용하고 더 올라가는 건 자제시켜라."
데이비드는 마틴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일축했다.
"아빠. 엄마가 우리가 말린다고 들을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하라는 얘기에요?"
"이 일에 성공하면 1만 달러를 주마."
마틴은 방법을 알려주는 대신 돈을 걸었다. 이 방법이 그에겐 훨씬 쉬웠다.
"아빠.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예요."
데이비드는 성공 수당을 올리고자 했지만, 간단히 거절당했다.
"남편은 못 하지만 자식은 할 수 있단다."
마틴은 이 한마디만 던지고 출근해 버렸다.
데이비드는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일의 난이도가 상상 이상임을 깨닫고 도우미로 제마를 선택했다. 엘리스가 화장실 간 사이 제마에게 마틴에게 부탁받은 일을 제안했다.
"그래서, 아빠한테 얼마 받기로 했어?"
제마는 이 일에서 진한 돈 냄새를 맡았다.
"그런 일 없어."
"오리발 내밀 거야? 나 엄마한테 일러버린다!"
"하···. 2천 불."
"엄마! 오빠랑 아빠가!"
"야! 야! 알았어. 3천 불."
제마는 코웃음을 쳤다.
"아빠한테 만 불은 받은 것 같은데 6:4."
"4천 불이나 달라고?"
"아니 6천 불. 지금 내가 엄마한테 이르면 엄마가 나에게 에르메스 버킨백 줄지도 몰라. 얼마 전 새로 하나 샀으니까 쓰던 건 나 줄 수 있겠지."
"이! 이! 이 마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5천 불! 아니면 없어."
"좋아."
엘리스가 멀리서 경매장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이자 데이비드는 급하게 거래를 완료했다.
데이비드는 모델 일을 해서 돈도 잘 버는 제마가 더 독하다며 투덜거렸다. 3백만 불에서는 데이비드가 말리고, 4백만 불에서는 데이비드와 제마가 같이 말리고, 5백만 불을 넘길 거 같으면 팻말을 뺏는다는 계획을 핸드폰을 이용해 세웠다. 엘리스를 가운데에 앉히고 둘이 양옆에 앉아 엄마를 저지하겠다며 자리도 조정했다.
점점 더워지고 공기도 조금씩 탁해질 무렵.
"Good evening Ladies and Gentlemen, very very warm welcome to Christie's this evening,"
"안녕하십니까! 신사 숙녀 여러분. 크리스티 옥션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로 시작한 옥션은 경매사 소개와 함께 바로 오늘의 현대 미술 경매에 대한 소개로 이어졌다.
경매 방법 등을 소개하고, 약관, 수수료, 세금 관련 사항 등이 이어졌다.
오늘 경매를 이끌어갈 캐리는 승자의 저주를 자연스럽게 끌어낼 수 있는 유능한 경매사다. 리드미컬하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복싱 경기 해설을 듣는 듯했다.
"그럼 이제 1번 작품입니다. 뒤에 보이는 작품으로 이 작품은 1986년에 제작된 상징적인 작품으로 ..의 회고전에 대표작으로 ... . 8만 불입니다. 8만 5천, 9만, 9만 5천, 10만 이미 10만 불을 찍었습니다. 11만 불 ... 12만 불. 전화로 13만 불이 나왔습니다. 14만 불 ... 15만 불 나왔습니다. 잠시만요 더 없으십니까? 16만 불 나왔습니다. ... 20만 불 나왔습니다. 20만 불. 20만 불에서 더 없으십니까? 없으세요? 없으시죠? 땅. 이 그림은 당신 겁니다. 축하합니다."
첫 번째 그림이 팔리는 데는 불과 2분 정도가 걸렸다.
"2번 그림입니다. 1992년도에 제작된··· 의 작품으로 인간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죠. 10만 달러에서 시작합니다. 11만, 12만, 12만 5천, 13만 ... "
경매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경매사는 십만 달러 선에서 거래되는 작품들은 시간을 오래 보내는 게 낭비라도 되는 듯이 거침없이 가격을 올리고 구매를 부추겼다. 마치 경쾌한 랩처럼 들릴 정도였다.
"4번 그림입니다. 뉴욕의 천재 화가로 알려진 태호의 200x 년도 작품으로 최근 센세이션을 일으킨 행복 시리즈의 미니 버전입니다. 얼마 전까지 빌바오와 모마 미술관 전시회에도 소개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최근 확인된 사실로는 이 그림은 태호 작가가 작품 전체를 직접 채색까지 했다고 합니다."
태호가 전체를 제작했다는 정보는 기존 도록에도 없던 정보로 예비 입찰자들뿐만 아니라 작품 구매에 관심이 없었던 다른 이들의 관심을 확 끌어당겼다.
"경매 시작가, 12만 불에서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