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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팅 모델 (126/181)

피팅 모델

태호는 제마에게 한 10분 가까이 동안 강도 높은 연기를 주문하며 사진을 찍었다. 그걸 지켜보던 마크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좋아. 여기까지 하지.”

의아한 표정의 태호는 마크를 쳐다보며 말했다.

“벌써요?”

“볼만큼 봤어.”

“어땠어요?” 태호가 말했다.

제마도 긴장한 듯 마크를 봤다.

“카메라 앞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던데? 보통 카메라 앞에서 긴장하고 자기 모습을 못 보여주던데, 제마는 반대야. 카메라 앞에서는 무슨 여전사 같았어. 이렇게 강렬한 인상을 준 모델을 언제 마지막으로 봤는지 모르겠네.”

마크의 극찬에 제마의 얼굴도 환해졌다.

“제마가 웃으니까 여기 분위기가 달라지네. 이거 대단한데?”

거듭된 칭찬에 제마의 귀까지 달아올라 보였다. 태호는 뭐가 제마의 본 모습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제마도 그럼 파리 가는 거지?”

그 말에 제마는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아빠 마틴이 어떻게 나올지 가늠이 안 되기 때문이다. 표정에는 가고 싶은 마음만은 간절히 묻어 나왔다. 제마는 태호를 쳐다봤다.

“제마 아빠 이름이 마틴이었던가? 마틴 로웰? 혹시 아빠가 제마를 파리에 못 보내시겠다고 하실 수도 있겠다?”

“제마가 걱정하는 게 그것처럼 보이네요.”

“그럼 문제는 간단히 해결할 수 있네!”

“어떻게요?”

“태호 네가 책임진다고 해.”

태호는 마크에게 한마디 쏘아주고 싶었는데 그 말이 제마에게 상처가 될까 말을 못 꺼내고 있었고 제마는 얼굴이 더 달아올랐다. 그걸 보던 마크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늦어도 일주일 후에 출발해야 하니까 너희가 가서 해결하고 와. 일주일이다! 큭큭. 이거 재밌는데?”

마크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얘기했고 태호는 골치가 아파졌다.

제마를 집까지 태워주려고 했으나 사양하며 맨해튼의 핼리패트가 있는 선착장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했다. 마틴과 퇴근 시간에 맞춰 같이 집에 가면 된다고 했다.

*

다음 날.

데이비드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번 주말에 집에 와 줄 수 있어? 형이랑 레이나도 올 거야."

"무슨 일 있어?"

"엄마가 말은 정확히 안 해주는데 제마 관련인 것 같던데... 무슨 일 있었어?"

태호는 제마가 루이비통의 피팅 모델로 일할 기회를 잡았다는 설명을 했다. 아울러 파리로 바로 날아가야 한다는 것도.

"마틴이 방방 뛰었겠구만."

"그렇겠지?"

"그럴 거야. 엄마 목소리가 좀 심각했거든. 너 꼭 와야겠다. 이제 거의 예비 사위 아니야? 크크."

태호는 골치가 아파졌지만 제마를 모른척할 수 없었다.

"뽀뽀 한 번 정도로 이 난리가 날 줄 알았으면 그때 제마 안 불렀다."

"이미 늦었어. 우리 식구들 너 좋아하니까 이렇게 고민하는 거지 너 없었으면 고민조차도 안 했을 걸? 오는 걸로 알고 있는다?"

"그래."

자신의 제안으로 시작한 일이라 도중에 접을 수도 없었다. 태호는 혹시나 몰라 캔버스 두어 개와 물감 등 미술도구만을 챙긴 후 토요일 점심시간에 맞춰 제마의 집에 도착했다.

데이비드, 로이, 레이나는 이미 전날에 도착한 듯했다. 태호가 도착해서 인사를 하고 분위기를 살피니 현재 안건은 딱 제마의 파리행을 어떻게 할 것인가로 보였다.

다 찬성하는데 오직 마틴만 ‘노’를 외치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거의 딸을 시집보내기 싫어하는 아빠의 투정 정도로 밖에 안 보였다. 하지만 외인인 태호가 딱히 할 말은 없기에 가만히 있었다.

점심때는 그냥 밥만 먹고 말았는데 아무래도 태호까지 왔는데 점심부터 라운드 2를 하기 싫어서 일부러 말을 안 꺼내고 있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 꾸리 한 분위기에 태호도 이게 밥인지 모래인지 모른 채 주는 점심을 얻어먹었다. 어ㄵ히기 딱 좋은 분위기였다. 인상을 펼 줄을 모르던 마틴은 저녁을 먹을 때까지 그대로였는데, 식사와 와인을 곁들여 마시기 시작하자 슬슬 불만을 표출했다.

“난 제마가 왜 파리까지 가서 피팅 모델을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태호, 제마가 파리가서 그런 모델을 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뭔가?”

“마틴도 전에 마크를 바젤에서 만나봐서 아시겠지만, 천재 디자이너로 칭해지는 사람입니다. 그가 이번 루이비통 SS시즌 준비를 위해 파리에서 패션쇼를 준비해야 되는데 그에게는 피팅 모델이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옷을 디자인 할 때 영감을 주는 역할을 피팅 모델이 하죠. 루이비통의 수석 디자이너인 그의 영향력은 패션업계에서 절대적이며 그의 한마디로 제마의 모델 경력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지난번 오디션 때 마크는 제마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어요. 마크에게 영감을 주는 모델이라는 뜻이죠. 그러니까 제마는 마크에게 뮤즈 같은 존재입니다.

이번 파리에서만 잘 풀리면 피팅 모델 뿐만 아니라 루이비통의 다양한 모델로 활동할 수도 있고요. 화보나 광고 모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로 중요한 기회에요. 제마로써는 놓쳐서는 안 되는 기회죠.”

“자네가 마크를 부추긴 건 아닌가?”

태호는 마틴의 말에 삐딱하게 반문했다.

“마크와 제가 공과 사를 구분 못 한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건 아니네. 말이 헛나왔군.”

“제마는 지금까지 왜 모델로 성공을 못 했는지 이해를 못 할 정도로 마땅한 기회를 잡지 못했습니다. 제 생각엔 제마 주위에 제마를 이해하고 이끌어줄 능력 있는 조력자를 못 만났다는 결론이 나더라고요.”

“하긴 자네도 옛날부터 제마가 모델로 크게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해왔지.”

“맞습니다. 이번에 한 3개월 정도 파리에 머물면서 패션쇼를 배우면, 사실 제마가 루이비통 패션쇼 무대에 서는 것도 절대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마는 무대를 휘어잡을 카리스마가 있어요. 조금만 연습하면 그 능력이 확 살 겁니다.”

“딸 아이를 그렇게 극찬하니 내 기분은 좋다만, 그렇다고 내 불안감이 가셔지지는 않는군.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는가?”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만, 마틴이 감내할 수 있으면 됩니다. 하시겠어요?”

“말해보게.”

“그렇게 제마가 걱정이 되면 엘리스를 같이 보내시면 됩니다. 한 석 달 정도니 긴 기간도 아니고요. 어떠세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멍하던 마틴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눈에 불이 날 듯 부릅뜨며 태호를 쏘아보고 말했다.

“하나를 놓던 둘 다 놓던 양자택일 하라고 하는군. 자네 정말 사악해.”

“다 큰딸을 그렇게 안 놓아주려고 하시니까 그렇죠.”

옆에 로이와 데이비드도 그 방법이 좋겠다며 맞장구를 쳤다. 한쪽에 쭈그려있던 제마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기세였다. 태호는 제마에게 괜찮다는 손짓을 한 다음 마틴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자네도 이번에 파리에 간다지?”

“네. 저도 그쪽 디자이너로 묶인 몸이라. 이번에는 꼭 와 달라고 요청을 하네요.”

“그럼 자네가 책임지고 제마를 보살펴 주게. 나도 그리 꽉 막힌 사람은 아니야. 이제 제마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게 둘 때가 되었지. 사실 이 말을 하려고 자네를 여기에 부른 거야. 같이 가니까 자네가 제마를 좀 챙겨주게 알았지?”

태호도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데 저쪽에서 제마가 사슴 눈을 하고 태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태호는 차마 다른 말을 못하고 신경 써서 제마를 돌보겠다는 말을 했다. 그제야 만족한 표정의 마틴이었다.

“그래? 언제 가는 건가? 비행편은? 제마 짐 많을 텐데 내가 전용기 띄울까? 마침 다음 주에 쓰는 사람도 없는데?”

어찌 되었든 마틴이 딸 바보는 맞았다.

딸을 객지에 보내야 된다는 건 맘에 안 드는 상황이지만 이제는 딸의 독립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복잡한 마음에 마틴은 끝도 없이 와인을 들이켰고, 태호를 마치 막내 사위 대하듯 옆에 앉혀놓고 같이 술을 먹였다.

그 옆에서 제마도 홀짝거리고 술을 먹고 있었는데 딱 봐도 주량이 보통은 넘었다. 그 옆에 데이비드과 로이, 레이나도 앉아서 마틴이 꺼내온 값 비싼 와인을 같이 물 마시듯 마시고 있었다.

호텔 주방 못지않은 데이비드네 주방에서는 햄과 소시지를 각종 치즈가 종류별로 다채롭게 쏟아져 나왔다. 딱 맞게 디캔팅 되어 나오는 각종 와인들은 경이로울 정도였으며, 거기에 딱 맞는 안주는 더 환상적이었다.

비싼 와인 일수록 목 넘김이 좋고 알콜을 마신다는 느낌이 적은데, 그런 와인을 한병 두병 여러 사람들과 마시다 보면 금방 주량 이상을 마시게 되고 그러다 필름이 끊기게 된다.

태호도 그 다행히 자신의 주량은 알아서 어느 순간인가 템포를 조절하고 있었지만 알딸딸한 상태였고, 주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다들 먹을 만큼 먹고 마실 만큼 마신 다음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레이나는 아예 대놓고 로이의 방으로 들어갔고, 데이비드은 데이비드 방에, 제마도 제마방으로 향했다. 태호도 게스트 룸에 들어가 옷만 대충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서 곧바로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 목이 말라 눈을 떠보니 제마가 자신의 옆에서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는 게 보였다.

순간 놀래서 봤는데 자신이 옷을 다 제대로 입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별일은 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언제 제마가 들어왔는지 알 수는 없었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제마도 깼는지 눈을 뜨고 태호를 빠안히 쳐다보고 있었다. 제마가 보내는 시그널을 알았지만 태호는 못 본 척 제마의 등만 토닥여 준 후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술도 덜 깼고, 술김에 뭔 짓을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친구 집에서 친구 여동생과 사고를 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제마는 태호의 볼에 키스한 후 방을 나섰다.

*

월요일 저녁 비행기로 파리로 향했다. 모델은 보통 계약직이기에 시급 기준 같은 일당이 주어지는 데 비해 마크의 피팅 모델에 대한 처우는 일반 모델과 달랐다. 거의 정규직에 준하는 계약직이었다. 그래서 파리에서의 숙소도 5성급 호텔을 잡아줬다.

다음날 점심때부터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인간 포토샵 태호가 마크의 콘셉트에 맞춰 드로잉을 하면 벨라 등 직원들이 옷을 제작하고 그걸 제마가 입고 나오면 태호가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제마와 모니터 사진을 번갈아 보며 옷에 대해 평가를 하고 그 자리에서 수정하던지 얼마 후 현상된 사진을 보고 추가 수정을 했다.

그러다 보니 제마에 살짝 맞춰진 옷들이 나오는데 이 방법이 좋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마크가 이걸 허용하고 있었다. 나중이라도 수정을 할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번 패션쇼를 아예 제마의 스타일에 맞춘 것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았다. 태호는 마크가 제마의 스타일에 맞춘 옷을 제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리에서의 두 달은 그야말로 강행군의 연속이었기에 호텔로 돌아온 둘은 그대로 뻗어 버렸다. 제마는 30cm가 넘는 힐을 거의 온종일 신고 있어야 했기에 발이 붓고 종아리에 통증도 있어 그 비싼 호텔 스파 서비스를 거의 매일 받았다.

덕분에 기운이 나는 건지 그래도 태호와 진도를 나갈 기회를 엿보는 것 같긴 했지만, 태호는 뉴욕에서 날아온 보고까지 받고 의사 결정을 해야 하였기에 시간이 없었다.

가끔 같이 스파를 가서도 태호는 전화를 받거나 이멜을 확인하며 생각에 잠기기 일수 였다. 태호는 두 달 가까이 뉴욕을 비워야 했기에 초상화 제작은 중단했다.

태호는 교육 삼아 영화 소품으로 쓸 그림을 스케치 해 놓았고 직원들을 통해 채색을 시작했다. 지난 6개월간의 교육으로 다들 태호의 그림 스타일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해를 한 상태였기에 진행할 수 있었다. 물론 태호가 돌아오면 추가 수정이 들어가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9월 파리 패션위크가 다가오고 마크의 거의 고정인 런웨이 모델들이 섭외되었다. 그리고 거기엔 제마도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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