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나리오 (feat 피팅 모델)
전시회 이후 한동안 태호는 낮에는 초상화 작업을 하고 밤에는 가끔 에이전트에게 전화를 걸어 왜 자신의 책이 잘 팔리지 않는지 계속해서 캐물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자신의 작품을 판매하는데 고생을 해본 적이 없는 태호로서는 자신의 책이 팔리지 않는 게 도저히 이해 불가였다.
얼마 전에 출판한 책은 시장에서 별 반응이 없었는데 에이전트는 자신의 첫 실패를 두려워하는 천재를 달래느라 태호와 통화를 할 때마다 진땀을 흘려야 했다.
출판에 대한 실망감이 너무나도 컸던 나머지, 태호의 머릿속에 또 다른 망상이 피어올랐다.
출판사에서의 반응이 그렇게 밋밋했던 이유가 자신의 책에 음모나 서스펜스가 없기 때문이라는 비교적 정확한 판단을 한 후, 음모와 서스펜스가 판치는 영화 시나리오를 제작해보자는 희한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태호가 생각한 서스펜스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Faceless가 한 작품이 아닌 쌍둥이 작품으로 제작되었으며, 첫 작품은 폭격에 파손된 채 미국으로 넘어갔고, 다른 한 작품은 현재 위치를 파악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앙리 보나는 그 작품의 위치에 대한 힌트를 그가 그린 그리스도와 12사도라는 총 13점의 그림에 담았는데 지금 프랑스 전역의 성당에 흩어져 있다는 설정이었다.
다분히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를 패러디한 수준의 영화 시나리오를 제작하겠다고 맘먹은 것이었지만, 태호 인생에서, 아직 실패는 아니지만 거의 실패한 것으로 생각되는, 출판의 실패에 눈이 돌아가 보이는 것이 없었다.
막상 전체 시나리오에 대한 큰 줄기를 생각해 놓고 나니 딱히 시나리오 작업이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이미 500페이지에 가까운 소설을 한 편 쓰고 나니 글 실력도 많이 늘었고, 그 19세기 중반의 프랑스의 시대상은 이미 머릿속에 그림책을 펼쳐지듯 선명하게 남아 있기도 했다. 심지어 그 19세기 옛 불어로 시나리오를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머리속은 Faceless의 쌍둥이 작품만 집에서 어떻게 작업을 해야 좋을지 고민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그림 제작에 들어갔다.
Faceless 는 머리 위에 광원이 있어 세상을 밝게 비춘다면 쌍둥이 작품에서는 손에 광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더 큰 차이점은 표정이 훨씬 밝고 미소가 있었으며 여유로워 보였기에 더 포근하고 친숙하게 다가왔다.
그림을 그리는데 소요된 시간은 3개월이었다. 처음에는 콘셉트만 잡기 위해 시작한 그림이었지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니 온갖 정성을 다해 그렸기 때문이다. 거의 매 주말을 그림을 그리는데 오롯이 투자했는데, 그림 크기가 Faceless 와 거의 같을 정도로 컸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낮에는 윌슨이 소개해 주는 초상화 고객을 만나 의상을 디자인하거나 그림을 그리고 밤에는 집에서 Faceless 쌍둥이를 그렸다. 제마는 키스 이후에도 특별히 태호를 구속하지 않았다.
가끔 전화하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같이 극장이나 뮤지컬을 보러 갔으며 그런 날은 제마를 집에 데려다 주고 다음날 제마네 식구들과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제마는 태호를 유혹하려 했지만 태호는 어느 정도 선을 긋고 행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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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는 쌍둥이의 모습이 어느 정도 가시화되자 시나리오 작업도 병행했다. 머리속에서 스토리를 하나하나 조합을 했다. 쌍둥이 그림의 위치는 현재 숨겨져 있다. 숨겨져 있는 방법은 옛날에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본 다큐멘터리를 빌렸다.
그 다큐멘터리 내용은 베네치아 어느 귀족 가의 집에서 그림이 발견되었는데, 보수를 위해 뜯은 벽 안쪽에 다른 벽이 있었고 거기에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16세기 당시 유럽에선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기에 이런 일이 19세기에 일어난다고 해서 특별한 것은 없다.
그리스도와 13제자는 프랑스에 산재한 각 교구에 흩어져 있다고 가정했다. 주인공으로 한때 예일대 미술사학과 학부 과정 때 썸을 탄 적이 있는 미혼의 남자 교수 올리버와 돌싱의 여자 교수 줄리아를 설정했다.
악역 혹은 안타고니스트로는 이탈리아 화상인 엔리코 카루소라 설정했다. 그는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감각으로 숨겨져 있거나 정당한 평가를 못 받고 있던 이탈리아 작가들의 작품을 재해석하여 거장의 반열로 올려놓은 후 미리 매점해 놓았던 작품들을 슬슬 푸는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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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는 이렇다. 한때 초미의 관심사였던 Faceless의 원작자가 누군지 밝혀지면서 그동안 관심을 못 받았던 앙리 보나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가 진행되고 관련 자료가 우후죽순으로 튀어나오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줄리아와 그의 동료 그리고 엔리코 카루소는 비슷한 시기에 Faceless의 쌍둥이 그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루브르 연구 자료에서 알아내고 그림을 찾아 나선다.
그림을 독점하려는 엔리코 카루소가 사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괴한에 의해 줄리아의 동료가 피살되자 줄리아는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다, 얼마 전 학회에서 만나 연락처를 교환한 옛 친구 올리버에게 전화를 걸어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처음에 거절하려는 올리버에게 거듭 부탁을 해 결국은 올리버를 불러온 줄리아는 둘이서 파리와 프랑스의 전역을 다니며 쌍둥이 작품을 찾기 위해 노력을 하는 가운데 사랑에 빠진다는 스토리였다.
그 와중에도 올리버와 줄리아는 엔리코와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이며 그림을 찾아 나섰지만 결국은 최종 힌트를 엔리코에게 빼앗긴 채 낯선 곳에 감금당한다. 두 사람은 언뜻 본 힌트를 바탕으로 쌍둥이 그림이 있는 최종 장소를 추론하게 된다.
가까스로 탈출한 후 두 사람은 그림이 위치한 장소에 가 엔리코를 발견하게 되고 둘은 작품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마지막 퍼즐을 놓고 다시 한번 두뇌싸움을 벌인다.
그 사이 줄리아가 부른 프랑스 형사 루이스와 지원을 나온 다른 경찰들이 들이닥쳐 엔리코를 체포하게 된다. 되찾은 쌍둥이 그림은 루브르로 향하게 되었다.
여기서 반전이 있는데 줄리아가 다시 파리로 돌아가고 그 동안 썸을 타던 올리버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올리버는 줄리아를 거부하고 떠나버린다.
너무나 서운한 줄리아는 마음을 다잡고 자기 일에 집중하려 하지만 얼마 뒤 충격적인 뉴스를 접한다. 올리버와 찾은 성당에 걸려있던 앙리의 그림들은 하룻밤 새 모두 도난당했고, 쌍둥이 그림은 파리의 루브르에 온 적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떠올리는 회상 장면을 통해 올리버와 형사 루이스의 이상한 행동들이 하나둘 기억이 나게 되고, 자신의 동료를 죽인 것이 엔리코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뒤에 날아온 올리버의 편지에는 줄리아 덕분에 수월하게 그림을 찾았다며 고맙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고, 추신에는 줄리아가 자신을 버리고 전 남편에게 간 사실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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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는 나름 만족하며 시나리오를 완성해 이 시나리오를 다듬어줄 사람에게 보냈고, 돌아온 답변은 스토리를 이렇게 꼬아 놓으면 관객들이 헷갈릴 것이 뻔하기에 플롯을 단순화시켜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태호는 유주얼서스펙트에서 볼 수 있었던 반전의 짜릿함을 기억하며 스토리는 두고 다른 것 중에 수정할 필요가 있는 것들을 수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받은 시나리오는 다시 에이전트를 통해 각 영화사에 보냈다.
태호는 이 시나리오가 어느정도 먹힐 것으로 생각했는데, 쌍둥이 그림을 사진으로 첨부했으며, 태호 자신이 직접 그림 소품을 다 제작할 예정이라고 부연 설명 해 놨기 때문이다.
태호가 시나리오 제작이라는 삽질을 거의 끝마칠 무렵 마크에게서 연락이 왔다. 올해 SS시즌은 아무래도 태호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으니 도와달라는 요청이었다.
그 외에도 마크의 작업실에서 피팅 모델로 일하던 세실이 아이를 가져 당분간 나올 수가 없든지 아니면 아예 못 나올 거 같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면서 피팅 모델을 지금 구하고 있는데, 태호 보고도 추천을 하든지 아니면 와서 누가 좋을지 봐 달라는 얘기를 했다.
“피팅 모델이 그렇게나 중요해요?”
“디자이너마다 다르긴 한데, 난 피팅 모델을 되게 중요시해. 예술가로 치면 뮤즈 같은 존재하고 해야 하나? 나에겐 그래.”
태호는 이 기회에 모델업계에서 겉돌고 있는 제마가 안정적인 직장을 갖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혹시 제마 어때요?”
“걔? 지난번 스위스 바젤에서만 봐서 모르지. 무대에 세워 봐야 알 수 있잖아.”
“마크, 아직 뉴욕에 있죠?”
“아직 여기 있어. 그렇지만 얼마 뒤 프랑스로 가야 해. 너도 같이 가야 하고.”
태호는 마크에게 제마를 데려가 보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제마! 언제 맨해튼으로 나올 수 있어? 마크가 제마 오디션 보려고 하는데?”
“무슨 일인데? 모델?”
“피팅 모델.”
“피팅 모델? 난 런웨이 모델을 원하고 있는데?”
“마크의 피팅 모델은 좀 경우가 달라서 말이지. 잘 되면 런웨이 모델뿐만 아니라 루이비통 화보 모델도 될 수 있을걸?”
다음 날, 태호 앞에 나타난 제마를 데리고 맨해튼에 있는 마크의 작업실로 향했다. 아트바젤에서 만나 이미 구면인 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준비에 들어갔다. 검은색 미니스커트에 흰색 셔츠를 입은 제마는 작업실 복도를 런웨이 삼아 워킹을 시작했는데 마크는 제마의 얼굴을 보고 갸우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제마가 뒤돌아 걸어가자 태호를 향해 말했다.
“얼굴에 주근깨 다 없앴네?”
“레이저로 지웠더라고요.”
“으이구. 아팠겠다.”
제마가 뒤돌아서자 인상을 펴고 제마에게 몇 번 더 런웨이 워킹을 해보라고 했다. 한참을 지켜보던 마크는 옆에 벨라에게 말해 최근에 만들다 만 옷을 입어보게 했다. 벨라는 시동생 살피듯 정성을 다해 제마를 데리고 피팅룸에 들어갔다.
“제마 오빠가 데이비드이고, 데이비드가 벨라 남자 친구지? 지난번 스위스에서 같이 봤고. 또 너와 대학 4년 동안 같은 방 썼고.”
“맞아요.”
“이게 무슨 인연이야. 여기 다 네가 데리고 온 사람들이네?”
“내 주위에 재능이 넘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가 보죠.”
그 말에 피식 웃는 마크다. 그러자 태호가 물어봤다.
“괜찮아요?”
“나쁘지 않아. 그런데 더 봐야겠어. 느낌이 오다 말다 이러니까.”
“기준이 있어요?”
“기준은 없지. 정말 주관적인 거긴 한데 말이지. 넌 제마의 뭘 보고 나에게 추천하는 거야?”
“사진을 찍어보면 확실한데, 정말 표정이 좋아요. 다채롭고. 그리고 제일 좋아하는 건 그 표정에서 묻어나오는 강한 의지에요. 사진을 찍어놓고 보면 무슨 내면연기를 하는 전문 배우 같아 보일 때도 있고.”
“네 말은 사진을 찍어봐야 한다는 얘기네?”
“그렇게 해야 확실하다는 얘기죠.”
“그럼 한번 찍어보자. 네가 사진 찍어봐봐. 그럼 제마의 표정도 바뀔 테고. 난 그 순간을 찾아서 볼 테니까.”
태호는 일부러 마크의 작업실에 남겨둔 자신의 카메라를 들고 제마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제마가 나오자 태호는 제마에게 아까처럼 계속 워킹을 하라고 한 후 쫓아다니며 구도를 잡았다.
괜찮은 위치가 잡히자 제마를 그 장소에 서 있게 하고 계속 포즈를 취하게 했다. 그러는 동안 입으로는 쉬지 않고 포즈와 표정을 바꿔가라는 주문을 정신없이 했다.
왠만한 베테랑 모델 정도가 되어야 무리 없이 소화하는 태호의 요구사항을 제마도 가뿐히 소화했다. 그 작업을 옆에서 마크는 이체를 띄며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