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트 바젤4 (118/181)

아트 바젤4

어젯밤, 천만 달러짜리 거래가 완료되었지만, 다음날 바젤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전시관은 여전히 사람들로 바글거렸고, 윌슨의 부스도 사진을 찍기 위한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어제와 달리진 것이 있다면 더는 갤러리들은 가격을 물어보지 않았다. 이제는 누가 얼마에 샀는지를 물어봤다. 도는 풍문들은 이런 것이었다. 첫날은 스티브 코언이 둘째 날은 론 로더가 구매했는데 둘 다 천만 불을 넘은 건 확실하다.

첫 번째 그림보다 두 번째 그림이 더 비싸게 팔린 것 같다. 세 번째 그림은 아르노 회장이 산 것으로 추정되는데, 근거로는 웬 여자가 밤 12시에 고성방가를 해서 어떤 여자인지 확인했더니 LVMH 아르노 회장의 비서였더라. 그 여자가 밤에 환호할 일이 뭐가 있겠느냐? 그림을 그 여자, 아니 아르노 회장이 산 거라는 말이 돌았다.

윌슨은 이 사실들을 철저히 함구했다. 공개해서 태호가 실존 작가 최고 거래가를 갱신했음을 자랑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직까지 실존 작가 작품에 대한 심리적 가격 상한선이 천만 달러 근처에도 가지 않았기 때문에 당분간 비밀에 부치기로 한 것이다.

케빈은 거래가 끝났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단숨에 달려와 윌슨에게 인터뷰 신청을 했지만, 윌슨은 이미 계약을 마무리하기 위해 아침 첫 비행기로 파리로 향하고 없는 상태였다.

윌슨은 아르노 회장과는 파리에서 론 로더와 스티브 코언과는 뉴욕에서 계약을 진행하기로 하고 그 지긋지긋한 바젤 생활을 끝냈다. 케빈은 제시카에게 윌슨의 동향을 물어봤지만, 전화기를 꺼둔 상태이기에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론 로더와 스티브 코언 같은 구매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수소문했지만, 그들도 모두 아침 자신의 비행기로 모두 스위스를 뜬 상태였다. 뉴욕으로 돌아가면 프런트에 대판 깨질 게 뻔했기에 케빈은 덜 깨지기 위해서라도 지난 3일간의 거래의 행적을 샅샅이 조사한 후 스위스를 떠났다. 케빈은 자신을 물 먹인 윌슨을 대차게 까기 위해 이를 바득바득 갈며 특집 기사를 써 내려갔다.

*

며칠 전.

윌슨이 거래를 위해 동분서주할 때 태호는 마크, 데이비드 가족들과 전람회를 맘껏 즐겼다. 쓸만한 그림들은 첫날 오픈한 지 두 시간이면 다 팔렸기에 남은 그림은 별로 없었지만, 태호는 일행을 데리고 다니면서 부스에 자신이 보지 못한 참신한 시도를 한 작품이 있으면 들어가 작품에 대해 하나하나 꼬치꼬치 캐물어 봤다.

"혹시 이 작품의 작가가 누굴까요?"

"언제 만들었고 어떤 계기로 제작한 작품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림에 배치된 오브제들이 무척이나 독특합니다. 개인의 경험에서 나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집단의 경험인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하거든요."

"이 오브제들이 작가의 배경과 어떤 연관 관계가 있을까요?"

만약 갤러리 직원이 대답을 못하면 작가에게 직접 연락을 해서라도 해답을 파악하였으며, 만약 새로운 시도가 작가가 정확하게 의도하고 시도한 작품이라면 태호는 그 자리에서 그 작가의 작품을 마크와 데이비드 가족에게 구매를 권하며 자신도 하나 샀다.

웬 허여멀그리 한 동양인이 와서 자기 갤러리 소속 작가의 작품에 대해 정말 그림에 찍힌 점까지 그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취조하듯 캐묻자 당황하고 나중에는 짜증까지 났다.

하지만 옆 갤러리를 통해 요새 가장 핫한 작가인 뉴욕의 태호라는 것을 알자 표정을 싹 바꾸고 명품 매장에 대기하는 종업원처럼 최선을 다해 다양한 질의에 성심성의껏 응했다.

응대에 만족한 건지 작가와의 통화가 맘에 든 건지 태호는 물론 같이 온 일행들까지 태호가 선택한 작가의 그림을 싹쓸이하듯 사서 갔다. 너무 정신이 없어 그 부스 직원은 태호 일행 중에 마크 제이가 껴있는지도 나중에 알았다.

대박은 그다음이었다. 개장 전부터 태호를 알아보는 갤러리들이 하나둘 태호 일행의 뒤에서 골프 갤러리처럼 따라다녔는데, 태호가 쓸고 지나간 부스에 들어가 남은 작품이 있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매했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호기심을 느낀 다른 갤러리들이 다시 태호 주위로 모여 점점 더 갤러리는 늘어났다.

그렇게 모인 갤러리들은 작품을 급하게 구매했고, 작품을 구매하지 못한 갤러리들은 갤러리 사장을 닦달하여 작가의 도록을 넘겨받아 그 자리에서 눈에 띄고 제일 나아 보이는 그림을 책 속의 사진만 보고 구매했다.

태호와 일행은 그렇게 돌아다니며 2층에서만 부스 두 개를 털다시피 쇼핑을 했고 이 층에서 더 이상 볼일이 없어진 태호와 일행은 1층으로 내려왔고 다시 쇼핑을 시작했다.

2층에서 태호의 간택을 받지 못한 대다수 부스는 처음에는 뭔지 몰랐다가 나중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고 분통을 터트리며 발만 동동 굴렀고, 간택을 받은 두 개의 부스는 표정 관리에 여념이 없었다.

당장에 뉴욕의 태호가 선택한 작가라는 광고를 하며 그림값을 바로 두 배는 올릴 생각에 싱글벙글이었다. 이미 거래하는 뉴욕과 런던의 갤러리에는 전화를 한 지 오래다.

1층에 내려간 태호는 다시 부스를 돌며 그림을 하나하나 관찰했다. 그 뒤에는 2층에서 따라온 갤러리들이 한가득이었다. 주식 도사가 구매 목록을 추천해 주는 것을 받아 적는 수강생처럼 그들은 태호가 점지해 준 어떤 작가라도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2층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벌써 1층에도 소문이 쫙 돌았는지 백화점 명품 매장 아침 조회 받는 직원들처럼 부스 직원들이 부스에서 고개를 쑥 빼내고 태호가 어디쯤 왔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술시장에 거대한 폭군이 등장한 것 같았다. 오늘이 태호의 아트 바젤에서의 첫 나들이였지만, 과거부터 지금까지 미술 시장을 쥐고 흔들었던 찰스 사치도 이 정도의 영향력은 아니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무시무시한 행보였다.

저 뒤에서 병아리처럼 태호를 쫓아다니는 천만장자 억만장자들의 미친 구매력을 생각하면 작가들은 물론 갤러리에게도 이건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점심도 먹지 않고 네 시간을 돌아다니자 허기가 졌는지 일행은 늦은 점심을 먹었다. 태호네가 식사를 위해 앉은 식당 주변 역시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간단히 식사를 하고 오늘 구매한 그림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가 슬슬 자리에서 일어서 남은 부스를 돌아보기 일어서려고 할 때쯤, 한 갤러리가 태호에게 다가와 질문을 던졌다. 아까 태호가 1층에서 구매한 그림에 대한 질문이었다.

“아까 1층에서 거액을 주고 베아트리스 밀라제스 그림을 사셨는데 한때는 매우 유명했지만, 지금은 한물간 화가 취급을 당하는 작가입니다. 왜 구매하셨는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브라질 억양이 강한 한 갤러리는 살짝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어봤다.

“오늘 봤던 그림 중에서 가장 에너지가 넘치던 작품이었어요. 배치가 대충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구조적이기도 했고요. 그림 하나로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수 있는 재미있는 그림이에요. 혹시 왜 한물간 화가 취급을 하는지 아시나요?”

“그녀가 그 스타일을 유지한 지가 좀 오래되어서 사람들이 식상하다고 느끼는 게 원인일 수 있는 거 같아요.”

“과거 그녀의 그림을 보지를 못했기에 뭐라 할 말은 없는데, 만약 젊은 시절에 그린 그림이 지금보다 에너지가 더 넘친다면 한물 간 게 맞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런 그림들은 그리면 그릴수록 발전을 하는 게 보통이라 지금의 그림이 더 에너지가 넘치지 않을까 생각해요. 뭐가 맞을지는 옛날 그림을 봐야 알겠네요. 그럼 이만.”

태호는 일행과 함께 다시 전시관으로 들어갔고, 질문을 한 그 남자도 브라질로 전화를 걸어 팔려고 내놓은 그녀의 작품을 긴급 회수하라고 지시하고는 태호를 뒤따라 들어갔다.

그 뒤로 이어진 태호와 일행의 쇼핑은 1개 부스를 더 털어먹고서야 끝이 났다. 그리고 이 소식은 삽시간에 바젤뿐만 아니라 미술계 전체에 속보로 퍼졌다.

태호가 선택한 작가의 그림을 팔려고 내놓은 사람들은 회수를 했고, 그림이 없는 사람들은 ‘여기 내 돈을 받고 그림을 내놔’라며 화가가 속한 갤러리에 테러를 가했다.

반대로 오늘 간택을 받지 못한 대부분의 작가들과 그 딜러들은 오늘 태호의 만행에 대해 한목소리로 성토하기 시작했는데, 그 기세가 얼마나 흉흉했던지 바로 그 다음날 태호에게 녹음기를 들이밀며 인터뷰를 요청하는 바젤 지역 신문 기자의 질문마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아트 바젤에 부스를 낸 많은 갤러리가 태호 씨에 대해 테러를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지금 분위기가 많이 안 좋습니다. 이에 대한 태호 씨의 의견은 무엇입니까?”

기자의 질문을 받은 태호는 살짝 놀란 눈으로 기자를 쳐다봤다.

“왜 분위기가 안 좋다는 거죠?” 태호는 정말 모른다는 눈빛으로 기자에게 물었다.

“어제 태호 씨가 구매하지 않은 부스가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껴서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또 태호 씨의 심미안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고요."

태호는 어이없고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제 그렇게 그림들을 구매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내가 세운 그림을 감정하는 기준에 맞춰서 산 것이기에 그렇지요.”

태호는 자신이 그림을 선택하는 기준을 기자에게 설명했다. 그걸 들은 기자는 반대로 태호에게 묻는다.

“그런 기준은 매우 흔한 기준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고요."

태호는 약간은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 기준들은 평범하긴 하죠. 난 거기다가 다른 가중치를 두고 보는데, 그때그때 다르기도 하고 또 내 눈에 확 띄는 작품이 있으면 저 가중치를 무시하기도 합니다. 결론은 내 맘대로 고른다는 건데, 이건 온전히 내 기준이며 내 취향입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고르고 살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만, 왜 이에 대해 성토를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그만큼 태호 씨의 미술계에서의 영향력이 커졌다고 이해하시는 게 맞지 않을까 합니다.”

“그 정도의 영향력을 피부로 느낀 적이 별로 없어서 몰랐군요. 어제의 제 행동으로 혹시나 피해를 입으신 분들이 있다면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 이런 물의를 다시 일으키지 않기 위해 아트 바젤에 당분간 참석하지 않겠습니다. 피악(FIAC)에만 다녀야겠군요.”

태호는 기자에게 정중한 말투로 사과하고 일행과 호텔을 빠져나와 공항으로 이동했다.

“보면 은근히 악취미야. 정말 못됐고.” 마크가 태호에게 말했다.

“누가요? 제가요? 왜요?”

“아트 바젤에 오지 않겠다고 폭탄 던졌잖아. 그냥 다 엿 먹으라고 한 말이고.”

그 말에 피식 웃는 태호.

“다른 그림들이 정말 별로였어요. 물론 제 취향 기준으로요. 그 수백 개 부스 중에 겨우 네 작가 건졌다는 게 말이 돼요? 어차피 내년에 들어올 작가들도 신규 작가들은 거의 없을 테니 몇 년은 더 볼 필요 없는 거죠. 다음에는 마이애미를 가야 되나? 거기가 더 나았던 것 같아요. 확실히 미국 아티스트들 작품이 더 재밌기도 하고.”

“그건 언제 생긴 거야?”

“2년 전에 생겼는데 미국 젊은 작가 위주의 전시라고 하더라고요."

“그래? 그럼 내년에 같이 가자.”

“안 바빠요?”

“바빠도 가서 봐야 돼. 아니면 뒤처져."

데이비드 식구들은 공항에서 뉴욕으로 향했고, 태호와 마크는 파리로 향했다. 태호는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마트는 패션쇼 준비를 위해서 말이다.

제마는 헤어지기 전 태호에게 뉴욕으로 나중에 돌아오면 자신을 도와달라고 했다. 아무래도 모델 일이 잘 안 풀리는 듯했다. 태호는 그 말을 듣고 파리에 가는 도중에 마크에게 슬쩍 제마가 모델로 어떠냐고 물어봤다.

“나쁘지 않아. 독특한 분위기가 있어. 키가 좀 작다는 게 흠이긴 한데 분위기가 키를 커버할 수 있을 않을까 생각이 들긴 하고.”

“그렇죠?” 태호는 마크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게 기뻤다.

“둘이 사귀어?” 마크가 물어봤다.

“아니요. 그냥 친구 동생이죠.”

“큭큭. 그러다 자기 여보 아빠 되는 거지.”

“마크 씨나 걱정하시죠?”

그 뒤로 비행기는 파리에 도착했고 둘은 마지막 허그를 한 후 공항에 마중 나와 있는 각자의 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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