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루이비통과 협업2
마크의 작업실은 72 스프링 스트리트의 건물 8층으로 200평이 넘는 층에는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제품 디자인부터 샘플 제작까지 한 층에서 가능한 구조였으며 여기에서 패션쇼 전체 준비가 가능했다.
당장 시작하자고 난리를 쳐서 작업실에 출근을 했지만, 첫날의 작업은 실제로는 정말 루스했다. 단 태호만 빼고.
마크 사단은 동업자 해리, 조수 빌과 새로 합류한 벨라, 수석 재봉사 낸시, 수석 가방 디자이너 소피아로 이루어졌는데, 지금은 마크까지 포함해 모두들 태호가 그리는 그림만 뒤에서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발단은 이랬다.
“태호, 이게 우리가 생각했던 다음 시즌 옷들 일러스트들이고, 이건 내가 골라둔 천 들이고, 이건 소피아가 준비 중인 가방이고, 저건 빌이 준비한···” 마크는 작업실 한쪽에 작업 중이라며 옷과 가방과 온갖 디자인을 다 들고 와서 태호 앞에 펼쳐놨다.
태호는 ‘그래서요?’라는 표정으로 마크를 쳐다봤고, 마크는 한껏 기대한 표정으로 태호와 벨라가 만든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렇게 그려줘. 뭘 고민한 는지 알겠는데, 저 패턴은 태호 네 거라고 등록해줄게. 우리가 빌려 쓰는 거라고.”
이렇게 시작된 강제노동은 처음에는 스케치북에 스케치를 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툭툭 나무에서 낙엽 떨어지듯 캔버스에서 옷이 한 벌씩 그려지자 마크는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이맘때쯤 마크의 작업실은 비수기였는데 지금은 태호의 그림을 기반으로 옷감 제작을 하려고 분주한 빌, 태호의 그림을 기반으로 옷 패턴을 제작하려는 벨라, 그림에 맞는 가방을 고민하는 소피아, 그림을 놓고 마크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해리 등 모든 게 갑자기 바쁘게 돌아가고 확 달아오르는 분위기였다.
태호는 하루에만 3-4점의 그림을 그렸고 그렇게 2주가 지나자, 비록 캔버스에 그렸다 뿐이지 일러스트와 다름없긴 하지만, 거의 40점이 넘는 그림을 완성했다.
*
태호는 급히 밤 비행기로 영국으로 향했다.다음날 테이트 미술관에서 있을 터너상 수상자 발표를 위해서였다. 사실 조금 일찍 출발하려고 했었다. 마크는 그런 태호를 잡았다.
"태호야. 너 터너상이라는 영국 미술상 후보라며. 미안미안. 내가 그런줄 몰랐어. 상 받을 수 있는거야?"
정말 진실된 질문에 태호도 찔끔하고 사실대로 말했다.
"아마 못 받을거에요. 변태력이 부족해서..."
태호는 자신과 자신의 작품이 페리와 채프먼 형제와 비교하여 화제성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깔끔히 인정했다. 그러고 나니 한결 맘이 편해졌다.
"변태력?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상은 못 받는다는거지? 그럼 갔다 언제 올거야?"
"빨리 올게요."
...
200x년도 터너상은 그레이슨 페리에게 돌아갔다.
*
1월 초, 태호가 개학하기까지 며칠 남지 않은 날. 태호와 벨라가 출근하기 한 달 전보다는 작업실에 훨씬 더 사람도 많았고, 실제 태호의 그림을 바탕으로 제작된 옷감으로 옷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과 별개로 마크의 조수 빌은 태호의 각종 치수를 재고 있었다. 마크는 태호가 옷 두세 벌만을 입고 출근한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처음에는 기성복을 몇 벌 주려고 하다가, 계획을 바꿔서 옷을 몇 벌 맞춰 주기로 한 것이다.
“너 정말 핏이 좋은데 왜 옷을 그렇게 입고 다녀?”
“마크도 만만치 않은데. 왜 나만 가지고 그러나요.”
“난 지금 이렇게 입고 다니는 게 내 스타일이라 그런 거고. 넌 그냥 신경 안 쓰고 입고 다닌 거고! 내가 너 가기 전에 옷 좀 해줄 테니까, 저기 놓인 그림들 여기다 놓고 가라.”
“옷 몇 벌이면 수지 타산이 안 맞는데.”
“내가 잘 해줄게. 우리 신상 다 챙겨줄 테니까 저것들 다 놓고 가. 알았지?”
이렇게 시작한 태호 스타일 챙기기와 옷 챙겨주기는 태호가 뉴욕을 떠나 학교로 돌아가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빵빵한 겨울옷부터 한여름 티셔츠까지 잔뜩 챙겨줬다.
학교로 돌아온 태호는 받은 옷을 확인했더니 거의 몇 박스 분량이라 맞춤 옷들과 일부 기성복은 챙기고 나머지 기성복들은 방돌이들에게 풀었다.
"이게 다 루이비통이야?"
"아니. 대부분 마크 제이 일 걸?"
"마크 제이도 명품이니?"
"아닐걸? 타미힐피거나 폴로 정도 브랜드 아니야?"
"걔들 보다는 높을텐데?"
"그런가? 다른 건 잘 모르지만, 루이비통이랑 마크 제이를 같은 선상에서 놓으면 안 되지."
"가방은? 루이비통은 가방이 유명한 거 아니야?"
"신발은? 패션쇼하면 신발도 만든다고 들었는데?"
이 녀석들은 어떻게 아는 건지 패션쇼가 끝나면 옷, 가방, 신발들이 발에 챌 정도로 남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야! 공짜로 주면 그냥 '감사합니다'하고 입으면 될 것이지 뭔 말들이 그리 많아."
"네가 버리는 거 가져가는 거 아니야?"
"중요한 걸 줘야지. 패션쇼에서 실제로 쓰인 진짜를 줘야 할 거 아니야?"
"그건 나도 못 들고 나온다고."
"담에라도 구해줘."
"그래 노력해 볼게."
태호는 다음에는 국물도 없다고 다짐했다. 차라리 한국 들어갈 때 잔뜩 들고 들어가서 교수님들에게 뿌릴 생각을 했다.
*
태호가 떠나는 날, 마크의 작업실 기둥에는 태호가 일러스트 용으로 그린 그림들이 액자에 넣어진 채 기둥마다 걸려 있었다. 빌 (마크의 조수)은 태호의 일러스트가 담긴 액자 앞에서 한참을 서있었다. 마크가 다가와 빌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대단하지?"
"대단해.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그냥 빠져들게 돼. 그 녀석의 다른 그림에 비하면 정말 간단한 그림인데도 내 눈에는 어떤 명작보다 와닿아."
"내가 올해 한 일 중 제일 잘한 일이 그 녀석 고용한 거하고 이 그림을 받아낸 거야."
마크는 키득거리며 다른 그림을 보러 자리를 옮겼다.
*
뉴욕은 봄부터 본격적인 아트페어가 시작되는데 아모리 쇼를 시작으로 아트쇼, 아트 온 페이퍼, 볼타 뉴욕, 스코프 뉴욕, 인디펜던트 등이 3월에 몰린 아트페어고, 프리즈가 5월에 열리는 등 주로 봄에 행사들이 집중되어 있다.
The Amory Show (아모리쇼), 3월
SCOPE (스코프), 3월
Art on Paper (아트 온 페이퍼), 3월
Volta (볼타), 5월
Independent Art Fair (인디펜던트 아트 페어), 5월
Frieze (프리즈), 5월
뉴욕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아트 페어를 개최하는 도시이며 미국 내에서 뉴욕과 견줄만한 곳은 LA가 있는데 두 도시 사이에는 격차가 좀 있다. 윌슨은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아트페어인 아모리 쇼와 프리즈에만 집중하기로 하고 사전 등록을 마쳤다.
아모리는 어디까지는 갤러리들의 잔치인 만큼 작가들이 잘 찾아오는 않지만 태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크와 벨라 그리고 데이비드와 행사장을 누비고 있었다.
넷이 모이게 된 이유는 뉴욕까지 혼자 가기 심심했던 태호가 데이비드를 부추겼고, 데이비드가 오케이를 하자 마크에게 연락해 벨라도 데리고 나오게 했다.
지금 태호와 마크는 희히낙락 거리며 앞서 다니고 있었고, 벨라는 데이비드와 정말 어색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그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이번 뉴욕 패션위크에서 마크밖에 안 보였다고 난리던데, 축하해요.”
“축하는 네가 받아야 될 거 같은데? 내가 보인 게 아니라 태호만 보였다고 신문에 나와있던데 무슨 소리야?”
“아닌데? 아니 그 무대에서 태호라고 이름 적힌 게 하나도 없었는데 어떻게 내 이름이 나왔다는건지 모르겠네요.”
“그거야 내가 인터뷰에서 밝혔으니까.”
“그럼 그냥 콜라보같이 한 작가 정도지 뭐 대단하다고.”
“그 작가가 태호니까 다른 얘기가 되더라. 마크는 안 보이고 태호만 보인다는 얘기도 들리고.”
“말도 안 되는 얘기 같은데. 옷감에 패턴 들어간 게 단데?”
“옷에서 제일 중요한 게 패턴인데, 그 작업을 네가 했으니 그 소리가 나오지. 그뿐만이 아니잖아. 네 콘셉트로 디자인해서 무대에 선 옷이 100벌 중 반이 넘어.”
“아, 몰라요. 내 책임도 아니고. 그래서? 반응은 어떤데요? 마크 맘에 안 들면 담부터는 빠지면 되니까.”
“패션쇼야 다들 좋다고 하지. 그게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으니 문제지. 지금 신문이나 잡지사에서 하는 소리는 말 그대로 소리일 뿐이고, 평가는 매출로 받는 거야.
호평이야 누구나 하는 거고. 그리고 내가 언제 맘에 안 든다고 했어? 우리는 앞으로 계속해서 콜라보를 해야 돼.
패션쇼 이후에 그러니까 너랑 콜라보 한다는 얘기 나오고 나서 루이비통 주가가 올랐어. 아마 조만간 회사에서 공식적인 보도자료 나갈 거야.
그리고 하나 더. 너 웬만하면 니가 디자인한 옷이 나오는 패션쇼는 참석해야 되는 거 아니야?"
마크는 눈은 웃고 있었지만 입으로는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아니, 패션쇼가 중간고사 기간에 잡힌 걸 어떻게 하라고요?"
"그럼 SS 시즌에도 참석하기 힘드냐?"
"9월이니까 그때는 괜찮을 거예요."
“다행이네. 그럼 SS 시즌 작업은 5월부터 해 줄 수 있어?”
“마크. 나 학생이에요. 기말고사 기간이라고요.”
“좋아. 좀 늦은 감이 있지만, 기말고사 끝나면 바로 뉴욕으로 넘어와. 그럼 언제 넘어올 수 있는데?”
“빠르면 5월 말 아님 6월 초 정도에는 가능할 거예요."
“그 정도라도 감수해야지. 자그마치 위대한 태호를 부려먹을 수 있는 기회인데.”
“그냥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정말 태호의 옷이라는 얘기가 나왔어요?”
“당연한 거 아니야? 그림에 들어간 패턴이 다 Faceless 하고 빛의 마리아에서 나온 건데. 누가 봐도 명확하지.”
“그렇게 해도 돼요?"
“뭐? 네 이름이 더 언급되는 거? 당연히 되지. 말이 나와서 해는 말인데, 네 덕분에 내가 요새 좀 사람답게 산다. 지금까지 무대가 너무 많았어. 참 그리고, 너 나랑 같이 6월에는 파리로 가야 돼. 갈 수 있지?”
“파리는 왜요?”
“옷은 뉴욕에서 제작해도 되는데 핸드백은 파리에서 해야 돼. 루이비통은 옷보다는 가방이지. 안 그래?”
“무라카미 씨는요?”
“같이 파리에서 일할 거야. 무라카미 씨는 지난번에 뉴욕에 온 게 예외적인 경우였고 보통은 파리에서 작업해.”
화기애애한 마크와 태호와는 다르게 벨라와 데이비드는 매우 어색한 분위기에서 대화가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했다.
“루이비통 디자이너가 된 거 축하해.”
“고마워. 운이 좋게도 그런 기회를 얻었네.”
“네가 재능이 있었으니 가능했던 일이겠지.”
“재능이 있어도 못 피고 지는 곳이 이 업계라.”
“···”
“패션쇼 잘 끝났다며?”
“난 조수의 조수로 참석한 거라 크게 한일이 없어.”
“태호에게 듣기로는 네 손을 거친 옷들도 꽤 있었다고 하던데?”
“이 업계에서 그 정도를 못하면 살아남지를 못해.”
“···”
조금 시니컬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예쁘장한 얼굴에서 나오는 신랄한 자기 평가는 데이비드를 좀 불편하게 했다.
오랜만에 다시 본 벨라는 첨에 봤을 때보다는 지쳐 보였지만 그럼에도 얼굴에서 빛이 났다. 이게 데이비드를 설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