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루이비통과 협업1
기말고사가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태호의 겨울방학 계획은 파블로를 따라 멕시코를 놀러 가는 계획과 데이비드를 따라 롱아일랜드 가는 두가지 중 하나였다.
파블로가 집안일을 핑계로 멕시코 여행에 난색을 표하자 바로 계획을 취소했고, 곧 이어 데이비드는 롱아일랜드가 아니라 캐나다로 스키 여행을 가자는 제안을 해왔다.
데이비드의 제안에 따르면 가족 여행으로 이미 일정 및 숙박은 다 잡았고 태호는 몸만 오면 된다고 했다. 가족 여행에 이방인으로 끼고 싶지 않았고, 겨울 스포츠를 매우 좋아하지 않는 태호는 친구가 뉴욕에 왔고 같이 작업을 할 일이 있다며 데이비드의 제안을 고사했다.
하지만 실제 두 제안을 모두 거절한 진짜 이유는 얼마 전 무라카미에게 안부 전화 때문이었다. 루이비통과의 협업을 위해 뉴욕을 방문하는데, 뉴욕에서 잠시 보자고 했다.
마크 제이가 태호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얘기도 했다. 태호는 며칠 호텔에서 지내다가 여의치 않으면 한국으로 가겠다는 생각을 하고 뉴욕으로 향했다.
무라카미와는 로워 맨해튼 뉴욕 72 스프링 스트리트 근처의 커피숍에서 만났는데 바로 옆 건물에 마크의 작업실이 있었다.
“태호, 이게 얼마 만이야? 한 5년은 된 거 같은데? 그때도 잘생겼는데 지금은 얼굴에서 아주 빛이 나는군.”
둘은 전화 연락은 종종 했어도 실제로 만난 건 일본에서 본 이후 처음이었다.
“무라카미 씨도 신수가 훤하신데요? 잘 지내신 거 같네요. 뉴욕에 벌써 오신 줄은 몰랐어요.”
“지난번 초대했는데 못 와서 미안해. 도저히 일본에서의 일정을 뺄 수가 없었지 뭐야. 뉴욕도 지난 5년 사이에 몇 번 왔는데 일주일 이상 머문 적이 없어. 일본 작업장으로 빨리 돌아갔거든."
"저도 일본 한번 안 가봤는데요 뭘."
둘은 서로의 근황을 물은 후 무라카미의 루이비통에서의 작업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디자이너로 영입된 거 라구요?”
“그렇다고 뉴욕에서 계속 작업하는 건 아니고, 지금이 일 년 중 마크가 제일 한가할 때니까 일부러 시간을 내서 여기에 오는 거지.”
“얼마나 바쁘길래 무라카미 씨가 뉴욕까지 와요?”
“마크는 뉴욕과 파리를 오가며 생활하는데 일 년에 패션쇼만 12개를 한다더군. 전에 와서 잠깐 패션쇼 준비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렇게 많은 일정을 소화하는 건 미친 짓이야.”
무라카미는 생각만으로 질린 다는 표정이었다.
“마크는 어떤 사람이에요?”
“쾌활하고 매력적인 사람이야. 그래서 사람도 쉽게 사귀기도 하고. 리더십도 있어서 주위에 일하는 사람들에게 동기 부여를 잘해서, 특출한 성과를 이끌어 낼 줄 아는 사람이야.
그리고 정말 똑똑한 사람이고. 기억력도 좋고. 하긴 그러니 35살부터 루이비통의 수석 디자이너를 하고 있겠지.”
“진짜 마크 게이에요?”
“몰랐어? 꽤 유명한데.”
“전에 후배한테 듣긴 했는데 관심이 없었죠.”
“행동에서 살짝 드러나긴 하는데 아무에게나 들이미는 사람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무라카미 씨는 결혼 안 해요? 혹시?”
“아니야! 뭘 상상하든 아니야.”
“그런데 왜?”
“결혼을 안 하냐고? 복합적인데 나중에 술 한잔하면서 얘기하자. 이제 미국에서도 술 먹어도 되는 나이 아닌가?”
“맞아요.”
*
사무실에서 만난 마크는 주황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었고 175cm 정도의 키에 갈색 머리를 길지는 않았다.
두껍고 색이 안 들어간 투명한 안경을 쓰고 한 손에는 담배를 한 손에는 커피잔을 들고 있었다. 안경으로 가렸지만 눈 밑은 온통 다크서클이어서 판다와 친구를 해도 좋을 듯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드디어 뉴욕에서 제일 핫한 아티스트를 만나게 되는군요. 난 정말 운이 좋은가 봐. 이쪽은 도쿄에서 제일 핫한 아티스트. 이쪽은 뉴욕에서 제일 핫한 아티스트.”
“마크 씨는 전 세계의 패션 아이콘이잖아요.”
이 말을 듣고 마크는 정말 좋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릴. 이 바닥에 나보다 잘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제 신참인 난 그런 소리를 들으려면 멀었어요. 태호가 온다는 소리를 듣고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를 거예요."
게이라는 선입견이 살짝 작동하면서 이 문장이 무슨 의미인지 해석하는 태호였지만 마크의 말 자체가 워낙에 젠틀했기에 일단 순수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친구가 마크 만나러 간다고 하니까 부러워 죽으려고 하더군요.”
태호가 말한 친구는 데이비드였다.
“그 친구도 데리고 오지 그랬어요.”
“오늘 처음 뵙는 거라. 다음 기회에 데리고 오죠.”
“태호 친구라면 언제든 환영할 테니 데리고 와요. 자 손님이 왔는데 서서 이러지 말고 앉아서 차라도 마시며 얘기해요. 뭐 마실래요? 커피, 차, 주스 등등 뭐든지.”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하는 세 사람. 마크는 그냥 태호에게 말을 놨다.
“루이비통 핸드백에 무라카미 씨가 디자인한 캐릭터가 들어간다고요?"
“어. 환상적이지 않아? 무라카미 씨가 디자인한 캐릭터는 귀엽고 사랑스러워 (Lovely). 얼마나 대단하냐면 루이비통의 그 따분한 갈색 가방도 무라카미 씨의 캐릭터가 프린트되면 완전히 새로운 가방으로 변신을 해. 이건 혁명이라고.”
한참을 무라카미의 디자인에 대한 기대감을 표출하는 마크.
“태호는 팝아트적인 작품은 없는 거야?”
“제 그림들이 좀 클래식 하죠. 컨템퍼러리 한 작품도 있긴 한데 패션 브랜드에서 쓸만한 그림은 아니고요."
태호는 호박 시리즈에 대해 마크와 무라카미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거기다가 인터넷에는 지난번 태호가 오프라 쇼에서 소개한 그림을 찾을 수 있어서 그걸 두 사람에게 보여줬는데, 마크는 감탄사를 연발하더니 뭔가를 결심을 한 듯 태호에게 말했다.
“오늘 초면에 이런 요청을 하는 게 좀 무례한 걸로 들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작품 중 하나 나한테 팔 수 있을까? 태호가 하나 골라줬으면 정말 좋겠어. 혹시 그림이 다 팔리거나 한건 아니지?”
“아마 아직 들고 있을 거예요. 올해 안 팔고 내년에 팔려고 들고 있는 게 하나 있었어요. 잠시만요.”
태호는 윌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윌슨 씨, 호박 시리즈 중 넘버 3 그거 아직 안 팔렸죠? 여기 그 그림을 사고 싶다는 사람이 있는데?”
“아직 안 팔렸어. 누군데?”
“루이비통의 마크 제이요."
“맙소사. 마크라고? 알았어. 그건 홀딩해 놓을게. 시간이 되면 언제든지 오시라 그래.”
윌슨과 전화를 끊은 태호는 마크에게 윌슨과의 대화 내용을 그대로 전했다.
“굉장해. 그리고 태호 정말 고마워. 나도 뭔가 선물을 주고 싶은데... 그래, 여기 보이는 가방 중에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아무거나 들고 가. 쇼가 끝나서 더 이상 필요 없는 물건들이야.”
“나중에 필요한 거 아니에요?”
“패션쇼에 나온 가방 모두가 다 상품화가 되는 건 아니니까. 정말 중요한 것들은 이미 본사에서 들고 갔어. 그러니 부담 갖지 마.”
“그럼 하나만 골라갈게요."
“줄 사람 있으면 더 골라. 엄마만 주고 여자친구 안 주면 나중에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셋이서 한참을 예술과 패션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 태호의 과거 경력들에 대한 얘기도 나왔다. 마크는 태호가 얼마 전 의상을 디자인한 적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라서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어했다. 그러자 태호는 의상을 아예 가져와 보겠다며 벨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 오랜만에 전화하네. 죽은 줄 알았어.”
“지금 57번가인데 와 줄 수 있어?”
“짐 싸고 있어서 바쁜데 다음에 하면 안 될까? 내일 아침 비행기라고.”
“내가 있는 곳이 루이비통 본사 20층이고 옆에는 마크 제이가 있고 무라카미 다카시도 있어. 안 올 거야?”
“처음부터 그렇게 얘기를 했어야지. 바로 갈게."
“올 때 전에 제작한 드레스를 들고 와야 돼.”
“알았어.”
“서둘러. 마크 제이 씨 기다리게 하지 말고.”
“알았다고!”
“여자 친구야?” 마크가 물어본다.
“아니요. 동업자예요. 아, 그리고 마크 씨 후배에요.”
여자가 서두르면 남자 못지않다는 걸 이번에 벨라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루이비통으로 도배를 하고 나타난 벨라는 전화 끊은 시간을 기준으로 한 시간 만에 도착했다. 그러면서도 그 특유의 매력은 그대로였다. 잠시 인사를 나누고 난 후 마크는 슬쩍 농담을 던졌다.
“난 우리 회사 화보집 보는 줄 알았어.”
“마크를 만나러 오면서 대충 올 수가 있나요. 학교 학생들이 제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 1순위인데요.”
“베네 커 교수님은 안녕하시고?”
“작년에 은퇴하셨어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졸업하신지 좀 되셨으니까요.”
“흠... 그렇지. 벌써 10년이 넘었네. 그래 작품을 좀 볼까?”
“잠시만요. 여기 탈의실이 어디에 있나요?”
“벨라가 직접 입어야 돼?”
“제 사이즈 기준으로 디자인된 옷이어서요.”
잠시 후 옷을 갈아입고 나타난 벨라는 도발적인 표정과 시크한 눈 웃음을 선보이며 사무실 안 그 얼마 안 되는 공간을 모델 워킹으로 종횡무진 다녔다.
작업장이 순식간에 패션쇼 런웨이로 바뀌었다. 곧은 시선, 도도한 워킹과 찰랑이는 치마 끝, 육감적으로 흔들리는 가슴, 그리고 그 모든 걸 흰색과 황금빛으로 포장한 옷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진지하게 쳐다보던 마크는 친구이자 조수인 찰리를 불러 직원들을 회의실로 불러 모았다.
“벨라, 한 번 더 부탁할게."
벨라는 다시 다시 워킹을 하며 사무실을 한 바퀴 돌았다.
“괜찮지?” 마크는 찰리에게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후 마크는 다시 벨라와 태호에게 말했다.
“프린트는 빛의 마리아랑 유사하게 보이는데 맞지?”
“맞아요.”
“저런 옷은 디자인은 차치하고, 실제 제작하기가 무척 까다로운데 정말 잘 만들었어.”
잠시 고민하던 마크는 태호에게 얘기했다.
“이거 우리가 쓰면 안 될까?”
‘!!’ 어떻게 쓴다는 건지 감이 안 온 태호는 궁금한 표정을 가득 담은 채 마크를 쳐다봤다.
“지금 이 옷을 기본으로 해서 다른 옷들도 제작해 보고 싶어서. 난 이 프린트가 베르사체 고유 패턴보다 훨씬 좋거든. 더 세련되었고.”
태호는 곧 승낙했다. 지금 당장은 초상화 사업보다 이게 훨씬 더 자신에게 중요한 일이라 생각됐다.
벨라에게는 다른 제안을 했다.
“벨라는 지금 4학년이라고? 그럼 졸업하고 나서 어디서 일할 건지 결정된 거 있나? 없으면 나랑 이거 같이 해볼래?”
벨라는 경악하는 얼굴로 마크를 쳐다보다가 얼마 후 간절한 표정으로 태호를 쳐다봤다.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하던 내용은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이 담긴 표정이었다.
“몇 년 뒤로 늦추면 돼.”
태호가 긍정하는 답변을 주자 벨라는 기뻐하며 말했다.
“졸업이 내년 5월 말이니까 그때부터 일할 수 있어요.”
그러자 마크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FW 시즌 준비라 바로 시작해야 되는데?”
그 말을 듣자 벨라는 평소와 다르게 정말 바보 같은 표정으로 질문을 했다.
“언제부터 해야 되는데요?”
“오늘부터 하면 좋지만, 오늘 일과 시간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내일부터 하자. 아침에 11시까지 로비에 와 있으면 우리 쪽 인사과 직원이 관련 서류 작업 처리해 줄 거야.”
당황한 벨라는 자신이 졸업할 수 있는지까지 물어봤다.
“난 딱히 졸업이 의미가 없다고 보지만 벨라가 졸업을 원한다니 내가 학교에 전화 할게. 가능하면 수업 다 빼달라고 말이야. 그럼 될까? 졸업 발표도 여기서 작업할 것 중에 벨라가 골라서 내도 될 거야."
그리고 곧 태호를 보고 얘기했다.
“호텔 회사 근처로 옮기고 태호도 내일부터 나와줄 수 있어?”
태호와 벨라는 나란히 집에 가는 비행기 표를 취소했고, 얼떨결에 마크와 협업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