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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슨스의 여왕벌4 (feat 페어 웰 엘리) (91/181)

91. 파슨스의 여왕벌4 (feat 페어 웰 엘리)

“혹시 폴라로이드 사진기 가진 사람 있어?” 태호가 물어봤다.

“내가 가지고 있어. 근데 차에 있어서 가지고 와야 돼.” 헤나가 대답했다.

“그럼 유스케가 같이 나가서 가져와줄래?” 태호가 말했다.

‘왜 나야?’라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유스케에게 ‘다른 애들은 바빠’라는 눈치를 줬다.

한 15분쯤 후에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가지고 왔다. 다행히 헤나는 여분의 필름까지 다 들고 와 한 70장 정도로 찍을 분량이 되었다.

“일단 전체 사진부터 찍자고. 다들 모여봐. 우리 프렌즈처럼 사진 찍는다고 생각해 보자고.”

태호는 자신을 제외한 채 6명의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헤나의 폴라로이드로 예약 촬영은 무리다.

“담에 올 때는 사진기하고 삼각대를 가지고 와야겠어.”

태호는 구시렁거리면서도 열심히 찍었는데, 소파를 배경으로 하거나 6명이 다 서서 나란히 포즈를 취하게 한 후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10장 정도의 사진을 찍은 후에 독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알아서 모델 포즈를 잘 취했지만 남자들은 차려 자세로 멍만 때리고 있길래, 태호가 마치 전문 사진작가인 것처럼 다양한 포즈를 요구해 겨우 사진을 찍게 만들었다.

그나마 조지아는 사진을 찍으니 모델 느낌이 물씬 풍기게 잘 나오는 편이었다. 그 뒤로 남녀를 배치해 커플 사진을 찍었는데 여자들이 적극적으로 포즈를 취하고 남자들이 숙맥처럼 서 있는 분위기였는데, 곧 여자들이 리딩을 하자 연인 같은 분위기의 사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조지아를 보고 첫눈에 반한 아이린은 조지아와 사진을 찍을 때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는데 엘리에게 느끼한 멘트를 던진 그놈이 맞나 싶게 아이린의 구애를 적절히 받아주었다.

아, 받아만 주었다. 조지아는 분위기를 안 망치려고 아이린을 배려하는 게 보였다. 이게 벨라의 친구여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조지아와 벨라는 서로 싫어해서 안 찍었고 벨라와 데이비드, 벨라와 유스케는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유스케는 벨라가 자신의 취향은 아니라고 했지만 찍혀 나온 사진은 정말 좋아했다. 아무래도 미녀와 서 있는 자신이 돋보여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헤나도 태호와 사진을 찍었다. 조지아가 헤나와 태호 사진을 한 장 찍었고 벨라와 아이린과도 찍었다. 70장 사진을 다 찍고 난 후 바닥에 사진을 놓고 기다리니 사진들이 서서히 현상이 되었다. 태호는 그중 벨라 사진을 집어 들고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태호가 소파에 등을 기댄 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벨라가 옆에 와서 그걸 보기 시작했고 곧 데이비드도 벨라 옆에 앉았다. 반대쪽에는 헤나가 앉았고 유스케는 그 옆에 서서 구경을 했다.

태호는 단숨에 벨라의 외형을 스케치하고 얼굴을 그리고 난 후 드레스를 그렸다. 드레스는 어깨 끈이 없는 탑 리스 이브닝드레스였는데 거기에는 흰색과 황금색으로 된 빛의 마리아 형상이 온몸을 휘감듯 감싸고 있었다.

가슴 부위에는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친 빛무리를 기준으로 아래에는 마리아의 얼굴이 있었고 그 밑에는 마리아가 입고 있는 옷이 바람에 펄럭이듯 묘사되어 있었다.

유화로 그리면 훨씬 분위기가 살지만 그걸 지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색연필로 만족하는 태호다. 그림에 콘셉트가 충분히 담기자 태호는 스케치북을 뜯어 벨라에게 전달했고 벨라는 그걸 방에 가져다 놓으려고 했다.

“잠깐 벨라. 잠깐 더 구경해도 될까?” 헤나가 말했다.

벨라는 그림을 구경하기 편하도록 벽의 선반에 올려놓았고, 벨라와 태호를 제외한 5명은 그 앞에서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태호는 스케치북 다음 장에 아이린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시스루 블라우스에 패션 브라를 했고 초 미니스커트를 입은 모습이었다.

패션 브라에는 Maria라는 로고와 빛의 마리아의 얼굴이 살짝 묘사되어 있었다. 다음은 헤나였는데, 긴팔에 핫팬티에 가죽 장화를 신었는데 maria라는 로고와 빛의 마리아 얼굴이 탑에 그려져 있었다.

벨라의 그림에 비하면 좀 대충 그렸다는 느낌이지만 태호도 오랫동안 그림을 붙잡고 있을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서운하지 않아 할 정도로만 그려줬다. 그러자 데이비드, 유스케, 조지아가 자기는 왜 안 그려주냐는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태호는 그냥 쌩했다.

아, 귀찮아라. 너희들이 여자로 태어나던가.

그 뒤로도 7명은 술을 마시고 떠들고 놀다가 대충 쓰러져 잠이 들었고, 아침에 깨어보니 10시였다. 밖에서 불륜을 즐긴 파블로에게도 연락이 없었고 아랍의 힘을 한껏 뽐냈을 세토스도 연락이 없다.

태호는 브런치만 먹고 학교로 돌아갈 계획이었기에 둘에게 간단히 2시까지 안 보이면 알아서 학교로 돌아오라는 문자를 남겼다. 그리고 대충 집을 치우고 보니 벨라와 데이비드가 안 보였다.

벨라야 자기 침대에서 잔다고 치고 데이비드는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안방 문은 닫혀 있었고 누구도 감히 문을 열고 들어갈 담력은 없었기에 뒷정리만을 집중해서 했다.

근처에 한국식 사우나라가 있으면 좋겠건만 뉴저지나 가면 있을까, 이 맨해튼에 있을 리가 없다.

당연히 새 칫솔도 없어, 자고 있는 헤나를 깨워 밖에 나갔다. 헤나 말을 들어보니 여기서 자주 노는 네 여자들은 칫솔이 있으나 여분의 칫솔은 없을 것이라 했다. 칫솔을 사고 커피를 7잔을 사들고 올라갔다.

방에 들어가니 아직까지 방에 알코올 향이 도는 것 같아 커튼을 걷고 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유스케가 흐느적거리며 일어나 화장실에 가서 변기를 잡고 곡을 했고, 그 소리에 하나 둘 깨어나 태호가 사 온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유스케가 나오자 아이린이 들어갔고, 그녀의 통곡에 헤나가 들어가 등을 두드려 주었다.

“아침 먹으러 갈래?” 태호가 물어봤다.

"속이 메슥거려서 도저히 뭘 못 먹겠어."

유스케가 거부했고, 조지아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보니 다들 좀 더 쉬어야 되는 게 확실해 보인다. 그러길 잠시, 여자들은 곧 어제 가지고 온 가방에서 세면도구를 챙기더니 샤워를 하고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때쯤 되어서야 데이비드가 안방에서 흐느적거리며 나왔는데 모두가 '어제 너희들 뭔 짓을 한 거야?'라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러자 데이비드는 ‘아무 일도 없었어’라는 몸동작을 하며 식탁 의자에 앉아 커피를 홀짝거렸다.

“너 볼에 키스 자국 있어” 유스케가 말했다.

그러자 데이비드가 놀라며 손으로 자기 볼을 닦아 루즈자국을 확인하는 행동을 했다. 그리고 모두 빵 터졌다.

“없잖아!”

“키스 자국은 네 마음속에 있겠지.” 태호가 말했다.

“아니라니까.”

데이비드는 발뼘 했는데, 정말 억울한 표정이었다.

그 뒤 벨라가 샤워를 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그 뒤에 젖은 머리를 말리며 나왔는데 노브라 면 티에 잠옷 바지 차림이었다.

19금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데이비드가 넋을 놓고 쳐다봤고, 유스케도 흘깃 흘깃 쳐다보는 눈치였다. 벨라도 그제야 자신이 모습이 어떤지 눈치를 채고 휙 돌아서 방안으로 사라졌지만 당황한 게 걸음걸이에서 보였다.

그 뒤로 20분이 지나서 다시 꽃단장을 하고 나왔는데, 얼굴에 취기까지 가린 완벽한 모습이었다. 다만 입에서 나는 어제 마신 알코올 냄새는 이빨을 닦아도 제거를 못했는지 급히 커피를 들이켰다.

“이 커피 누가 샀어?” 벨라가 물었고.

“태호가” 유스케가 대답했다.

“고마워. 술 마신 다음날 집에서 커피는 처음 먹어보네.” 태호는 그걸 듣는 순간 왠지 데이비드가 불쌍했다.

그 뒤로 한 시간을 앉아서 술을 깬다고 정신이 없었다가, 좀 지나자 점심은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차이나 익스프레스’란 배달 중국집에 밥과 면 요리에 탕수육 같은 고기가 들어간 튀김류에 짬뽕처럼 보이는 국물이 들어간 요리까지 주문했다.

처음엔 생각이 없어 보이던 애들까지 태호와 헤나가 국물을 마시며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다가와서 같이 먹기 시작했고, 그렇게 7명이 조용히 점심을 해결하자, 태호는 슬슬 출발하자는 시그널을 보냈다.

이미 꽤 시간이 흘렀지만 둘에게서는 연락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 넷은 학교로 돌아갈 준비를 했고, 여자들 역시 자기들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벨라는 일행이 돌아가기 전에 사진을 회수해서 정리해 두고 모두에게 단단히 당부를 했다.

“What happens in here stays in here. OK?” (여기서 일어난 일은 여기서 묻어두고 가는 거야. 알았지?)

라스베이거스가 캐치프레이즈로 쓰면 좋아할 말이었다.

둘은 태호의 차가 뉴헤이븐으로 가는 95번 도로를 타고 나서야 연락이 왔는데 왜 자기는 빼놓고 가냐고 징징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호의 차는 학교로 계속해서 달려 학교로 도착했고, 다들 샤워하고 바로 뻗어버렸다.

*

태호가 뉴욕을 갔다가 돌아온 지 2주가 채 흘렀을까, 엘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차분하게 시작한 전화였지만, 곧 목소리는 울음기가 가득했고, 나중에는 통곡으로 이어졌다.

다행히 애나에게 들은 내용과 차이는 없었는데, 외무부 고위직에 있는 엘리 아버지가 프랑스의 모든 연줄을 다 동원해서 그 에이전트를 압박해 들어갔다고 한다.

에이전트가 언론 플레이로 맞서자, 조용히 해결하려는 걸 포기하고 여당 국회의원과 법무부 인맥까지 동원해, 사회적 약자로 남아 있는 직업군에 대한 불공정거래를 방지하는 법의 개정안까지 이끌어냈다고 한다.

그 와중에 에이전트를 가루가 되도록 깐 것은 덤이었다. ‘직업 외교관이그런 힘이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엘리가 자신의 집안에 대해 더 설명을 해주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큰 아버지가 여당의 4선 국회의원이셔. 어릴 때부터 날 친 딸보다 더 이뻐해 주셨거든. 큰 엄마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으셔서."

"큰 아버지가 그렇게 화내는 걸 처음 봤어. 내가 미국에 건너간 것부터 마음에 안 드셨나 봐. 당분간 자중하라고 간곡하지만 강하게 요구하셨어. 당분간 조신하게 있으려고.”

아빠와 아빠 같은 큰 아버지는 엘리가 미국에 간 것이 이 모든 사단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엘리에게 당분간 자중할 것을 요구했다. 거기엔 태호와 관계를 정리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태호는 자신과의 관계까지 정리를 요구했다는 말에 펄쩍 뛰었다.

"그냥 그러겠다고 했어. 그렇다고 너와 내가 달라지는 건 없잖아."

"엘리. 왜 지금까지 연락을 안 한 거야? 내가 정확히 알아야 나도 대응을 할 수 있었잖아."

"이해 못할 수도 있지만 이건 내 문제야. 파리를 떠나 미국에서 널 만나게 된 것도 내 선택이었고, 뉴욕에서 다시 모델 활동을 시작한 것도 내 선택이었어.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고, 난 그 책임을 너와 공유하고 싶지 않았어."

"내가 듣고 판단해도 되었던 문제잖아."

엘리의 울음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미안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방법을 몰랐어. 너무 부끄럽고 나 자신이 한심하고 어디 숨고 싶고 그랬어. 내가 가진 정말 나쁜 버릇인데 이런 부끄러운 일이 생기면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고 회피해. 파리에서 미국으로 넘어간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는데, 또 이런 일이 벌어지니까 감당이 안 되었어."

엘리의 통곡이 한참이나 이어졌고 그 울음소리를 듣는 태호의 눈에서도 눈물이 고였다.

“그래... 앞으로 뭐 할 거야?”

“학교 복학 신청했어. 이번 주부터 학교 가고 있고.”

“내가 파리로 갈게!"

“아니야. 너도 하는 일이 있는데... 지금은 아니야. 나중에 우리가 더 준비가 되었을 때 와. 넌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안됐어. 이건 나도 가끔 드는 생각인데 우리가 조금만 늦게 만나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그럼 지금보다는 훨씬 달랐을 텐데."

"참, 네 새로운 그림은 방송으로 봤어. 정말 아름답더라. 다음에 꼭 보러 갈게."

“고마워. 빨리 오면 좋겠고 오면 꼭 연락해.”

“그래. 아마 이번 학기 마치고 졸업하고 나면 외교관 시험을 준비할 거야. 그러면 아마 더 바쁘겠지. 그러니까 나 신경 쓰지 말고 태호는 거기서 학교 잘 다니고 재밌게 보내. 괜찮은 사람이 나타나면 만나고. 알았지?”

“그렇게 얘기하지 마.... 또 너보다 괜찮은 사람이 있을까?”

“하하, 고마워. 나 같은 실수를 안 할 사람은 분명히 있겠지. 태호야. 정말 보고 싶은데, 이제는 참아보려고. 너 없는 생활에 익숙해야 되기도 하고. 내 걱정은 하지 마. 지금 파리에서 날 건드릴 사람은 없어. 하하. 그럼 잘 지내. 안녕”

“엘리야, 너도 잘 있어. 우리 완전히 헤어지는 건 아니다. 잠시 떨어지는 거지!”

"그래. 당연하지."

차라리 얼굴을 보며 작별 키스라고 하며 헤어지는 게 낫지, 이 전화로 하는 이별은 정말 최악이었다.

롱디는 죄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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