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슨스의 여왕벌3 (90/181)

90. 파슨스의 여왕벌3

차는 맨해튼을 빠져나와 브루클린의 웬 폐업한 공장가에 도착했다. 도착하자 이미 기다리고 있던 일행들과 티케팅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북쪽의 벽면에 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그 앞으로 댄스홀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 앞에는 약 8개의 기둥이 나란히 남아 있었다.

그 기둥 위에 있는 봉 같은 것은 천정의 뭔가를 떠받치고 있었다. 사방의 벽면은 레이저 빔에 의해 알록달록 색깔이 변했고 더불어 지붕도 같이 색이 변하는 스타일이었다.

추운 1월 중순의 날씨에도 야외무대가 춥지 않고 사람으로 바글거렸는데 보니 지붕을 비닐로 아예 덮어버려 온도를 유지하는 듯했다. 하지만 벨라는 일행을 끌고 중앙 무대를 지나 옆 건물로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 한 시간에 천 불이나 하는 프라이빗 룸을 빌린 것이다.

이래 놓고 알아서 놀자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 옆에서 뭘 하든 관심 끄고 놀라는 의미였나 보다. 부비부비를 하던 키스를 하던 배를 맞추던 말이다. 그리고 처음에 벨라가 남자들 보고 밥값을 쏘라고 한 건 결과적으로 보면 벨라의 배려였다. 몇 시간을 놀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가 훨씬 비쌀 테니 말이다.

태호는 견적을 계산하다가 곧 접었다. 같이 온 친구들이 돈이 없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냥 엄마에게 걸리지만 않으면 되는 녀석들이었다. 안되면 자기가 쏘고 천천히 받아도 되고 말이다.

프라이빗 룸 안에는 야외의 무대를 실시간으로 초대형 TV로 중계했고 그 옆의 대형 보스 스피커에서는 무대 DJ들의 음악이 바로 옆에 있는 듯 울려 퍼졌다.

야외 분위기는 그대로 느끼면서도 남들과 부대끼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안성 맞춤한 장소처럼 보였다. 그러면서도 무대 쪽 벽면은 투명한 유리로 되어있어 안에서 밖이 보였다.

여기 두세 번 와본 혜나도 이 프라이빗 룸은 처음인지 두리번거리며 구경을 했다. 혜나뿐만 아니라 벨라를 제외한 모두가 신기한 듯 내부를 살펴봤다.

“세 시간 결제했으니까, 우리 딱 3시간만 놀자. 더 뒤에 더 놀고 싶으면 그건 알아서들 하고. 혜나야. 안주하고 맥주하고 맥주잔과 샷 잔 달라고 했는데 맞게 시킨 거지?”

“어 맞아." 혜나가 대답했다.

남자들은 이게 뭔 소리인가 쳐다봤는데 곧이어 들어온 술 상에는 밸런타인 21년과 밀러 맥주가 깔렸다. 혜나는 실력 부족으로 샷잔이 맥주잔에 빠지는 쇼는 보여주지 못했지만, 또 빨간색 플라스틱 잔이기에 가능하지도 않았지만, 나름 최선을 다해 폭탄주를 말기 시작했다.

제조 시간이 오래 걸리길래 태호도 혜나 하는 걸 보고 따라 하며 몇 잔 말았다. 11잔이 다 마련되자 벨라는 술잔을 들고 ‘원샷’이라고 외치며 술을 마셨고 여자들이 마시길래 남자들도 얼떨결에 파도를 타기 시작했다.

그게 투 샷 쓰리샷이 들어가고 나서야 파도가 멈췄다. 여자들은 ‘그래 이 맛이야’라는 표정으로 원 모어 샷 (One more shot, 한 잔 더)을 외쳤고, 남자들은 ‘이걸 왜 마시지’ 이란 표정으로 맥주로 입가심을 했다.

태호는 얼핏 벨라가 씩 웃는 표정을 봤다. 태호는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폭탄주가 왜 폭탄주인가? 취기가 한 번에 쫙 올라와서 폭탄주 아니겠는가? 조금만 지나면 다들 술김이 확 올라올 거다. 그걸 벨라가 노린 건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뭘 위해서?

벨라 옆을 보니 데이비드가 다소곳이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 이놈들은 양주를 깠는데 안주도 안 시키는 것들이지. 조만간 다들 뚜껑이 열리겠군 싶었다. 그 뒤로는 자리를 바꿔가며 웃고 떠들며 얘기를 시작했고, 곧 알아서들 술을 마시며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태호는 춤은 출 줄도 모르고 관심도 없었다. 이런 곳에 와보는 건 처음이고, 꽤 재밌는 경험이지만, 술이 들어가도, 미친 듯이 음악이 온몸을 때려도, 마음 한구석에는 엘리가 전화를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태호는 신경을 안 써서 몰랐지만 혜나가 나가고 얼마나 벨라도 따라나갔다. 그리고 얼마 뒤 벨라가 들어와 태호 옆에 앉아 치어스를 하며 컵의 맥주를 단숨에 비웠다.

“니가 빌바오 미술관의 Faceless 복원 자야? 빛의 마리아인가? 그것도 네가 그렸다고 하던데.”

“맞아. 여러 버전을 그렸고 한달 전까지 비슷한 버전을 그렸었지.”

“여자친구도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 있는 거야?”

“어떻게 안거야?”

“네 사생팬이 하나 있어서.”

“여기 애들도 다 아는 거지만, 엘리는 프랑스에 있어. 교환학생으로 예일에 와 있다가, 시간이 되니 돌아간 거지.”

“힘들겠네.”

“익숙해지겠지.”

“혜나에게 니가 실력 좋은 디자이너를 찾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 패션쇼를 리딩 한 경력도 있다고 들었고. 한국에서는 꽤 유명한 얘기라고 하던데.”

“어릴 적 얘기지. 13살 때고. 어린애가 뭘 알겠어? 주위에서 많이 도와줘서 끌고 간 거지. 그래봐야 한 번이고.”

“어··· 음··· 너 지금 정말 재수 없었던 거 알아?”

“글쎄. 하도 들어서 새삼스럽지도 않아.”

“디자이너는 왜 찾는 거야?”

“협업.”

“협업?”

“응.”

“어떻게 협업을 하겠다는 거야?”

“난 사람을 보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어. 내 머리엔 지난 5백 년의 미술사는 다 들어있으니까, 그중에 하나를 꺼내서 매치시키는 거지. 그러고 나서 그걸 그림으로 옮겨."

"난 그걸 실체화를 해줄 사람이 필요해. 난 내가 상상한 걸 그림으로 그려줄 수는 있지만, 그걸 옷으로 제작하는 건 다른 얘기니까. 또 그 와중에 내가 놓친 걸 찾아줄 수 있는 센스도 필요하고.”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능력인데?”

“디자인과 교수님들이 정말 부러워하셨지. 나처럼 작업하면 일 년에 옷을 수백 벌도 만들겠다면서. 네 능력도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네 재주에 비하면 보잘것없긴 하지만, 그래도 이 바닥에서는 쓸만하지. 난 뭐랄까 색을 잘 봐. 색들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걸 잘 한다고 해도 맞을 거야."

"기억력도 좀 좋고. 너처럼 500년은 뒤지지는 못해도 최근 30년은 머릿속에 담고 있지. 본론으로 돌아와서, 어떤 그림을 그릴 건데?”

“초상화. 전신 초상화고, 그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모습으로 꾸민 후에 그걸 그림으로 남길 거야.”

“사진으로는 안돼?”

“느낌이 안 살지.”

그게 돈이 되겠냐고 물어보려다가 질문을 목에서 다시 삼키는 벨라. 앞에 있는 남자는 혜나의 설명대로라면 이미 뉴욕 미술계의 가장 핫한 작가다. 이걸 어떻게 활용해야 좋을까 잠시 생각하는 벨라.

“혹시 언제부터 시작할 생각이야?”

“같이 일을 할만한 디자이너를 찾으면 그때서부터 할 거야. 디자이너들은 이제 찾아봐야지.”

“기성 디자이너에서 찾아도 되지 않아?”

“내가 마음에 들만한 디자이너 면 이미 어디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겠지. 난, 성공에 목마른 다크호스를 찾는 거야.”

“네가 몰라서 그러는 거야. 괜찮은 디자이너들은 세상에 널렸어. 다만 기회를 못 잡은 것일 뿐이지.”

“그런 디자이너들이 옆에 있다면 난 바로 시작할 수 있을 거야. 혹시 알려줄 만한 디자이너가 있어?”

“글쎄.”

하긴 실력이 있다고 해도 갑자기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어린 작가 밑에서, 아무리 천재로 유명하다지만, 의상을 제작한다? 과연 누가 할까?

“어려운 문제긴 하군.” 벨라가 얘기한다.

“내가 그래서 대학생 중에서 찾고 있는 거지."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긴 한데···”

“그런데?”

“내게 별 메리트가 없네.”

“그럼 네 메리트까지 생각났을 때 얘기해.”

태호는 등을 소파에 기댄 체 팔짱을 끼고 벨라를 쳐다봤다. 벨라는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느낌에 기분이 묘했다.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말을 하고도 했고. 늘 남을 평가하기만 하다 평가를 받는다는 기분도 들었다.

태어나서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본 적이 없어서 이런 느낌이 든 것일 수도 있었다. 기분이 나빴어야 했는데 또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왠지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을 대하는 느낌까지 들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일생의 기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 밑이나 가문 회사에 종속되어 일하는 것도 아닌 자신의 브랜드로 시작할 수 기회 말이다.

샷잔에 양주를 부어 마신 벨라가 말을 이었다.

"나를 모델로 해서 네가 옷의 콘셉트를 잡으면, 난 그걸 네 콘셉트 이상으로 구현해 낼 수 있어. 솔직히 난 제봉 기술은 별로야. 내 평생 재봉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옷 제작의 센스는 있지. 그 결과물은 니가 판단해. 만약 네 마음에 들면 그다음 스텝은 같이 논의해 보자고."

태호도 샷잔에 양주를 따라 마신 다음 곰곰이 벨라를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여기서 더 나가야 되나 아니면 옷만을 확인해야 되느냐 결정해야 되었다.

"벨라. 혹시 옷 이외의 액세서리도 돼?"

"가방이나 신발 보석 이런 거?

"그래."

"그쪽이 사실 내 전문이야." 벨라는 환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근처에서 우리 얘기를 듣고 있던 조지아가 오히려 놀라서 벨라를 쳐다봤다. 벨라가 저렇게 웃는 걸 오랜만에 봤기 때문이다.

*

처음에는 술을, 그다음에는 춤을 추며 논다고 뛰어다녔더니 예약한 3시간이 다 되어었다. 그리고 술들은 어지간히 깬 상태였다.

집에서 한 잔 더하기 위해 벨라의 집에 돌아와 보니 파블로와 비비안, 세토스와 조안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세토스야 원나잇 스탠드로 괜찮은 픽이지만 파블로와 비비안의 부재는 태호를 살짝 불안하게 만들었다.

파블로,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아이린은 조지아에게 뽕 간 상태로 눈에서 하트가 뿡뿡 뿜어져 나왔지만 조지아는 시크하게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데이비드는 벨라와 부비부비 춤을 좀 추더니 머리에 살색만 가득한 거 같았다.

다만 조지아가 옆에서 눈을 부라리며 경고를 날리자 자제를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어지는 벨라의 눈 웃음에 이성의 끈이 날아갈 듯말듯한 위험한 상태였다.

딱 봐도 벨라는 자신의 무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처럼 보였고, 그걸 이용해 남자를 유혹할 줄 알았다.

태호가 혜나는 오는 길에 리퀴드 스토어 들려 와인과 치즈, 위스키와 맥주, 칩과 육포 같은 안줏거리를 사서 벨라의 집으로 왔기에 3차를 하기엔 부족함은 없었다.

혜나가 그 집엔 7명이 앉아서 먹으며 놀기엔 접시나 술잔도 부족하다고 하기에 그것까지 구매해서 들고 왔다.

혜나가 퍼트린 게 분명한 술 문화는 정말 다채로운 게임으로 가득했다. 11명이었으면 산만했을 텐데 7명이니 게임하기도 딱이었다.

처음은 할머니 게임. 치아가 보이지 않게 주어진 주제에 맞는 단어를 말하면 되는 게임이었는데, 웃거나 치아가 보이면 벌칙을 받았다. 물론 벌칙은 술이었고 간단히 위스키 한 잔이었다.

할머니 게임으로 어색함을 완전히 깬 다음, 그 뒤 배스킨라빈스 31, 눈치 게임에 007 빵까지 가자 다들 필름의 끝을 잡고 이걸 놔야 되나 말아야 되나 이러고 있었다. 스피드가 장난이 아닌 탓에 술 먹는 속도가 그만큼 빨랐던 까닭이다.

그쯤 되어서 게임은 접고 태호는 벨라에게 집에 스케치를 할만한 도구가 있는지 물어봤다. 곧 벨라가 A4 크기의 스케치북과 2B/4B 연필과 지우개, 그리고 색연필을 들고 나왔다.

태호는 지우개는 필요 없다는 듯 치워놓고 남자 셋에 여자 넷이 나란히 서있는 모습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물론 술로 떡이 된 모델들을 두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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