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예랑과 EBC 일행이 돌아간 지 한 달 후. (67/181)

67. 예랑과 EBC 일행이 돌아간 지 한 달 후.

EBC는 저녁시간에 특집 방송을 잡고 태호의 다큐멘터리를 상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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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초상화 박물관에서의 BP 초상화 대회에 대한 시상식이 거행되고 있다.

"1999년도 best young artist는 권태호입니다. 축하합니다."

태호가 굳은 표정으로 수상 소감을 발표하는 장면과 더불어 양준만 작가의 모습이 담긴 수상작이 화면에 나가고 있었다.

"런던 초상화 박물관은 해마다 전 세계에서 수천 명의 작가들이 초상화를 작품으로 경쟁하는 상을 수여한다. 올해 수상자 중 30세 미만의 화가에게 수여하는 상은 한국의 권태호 작가가 수상했다. 그의 나이 19살. 수상자 중에서도 제일 어릴 뿐만 아니라 작품을 제출한 작가 중에서도 제일 어리다. 그는 어떻게 어린 나이에 이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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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은 빌바오 미술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태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태호가 그림을 그리는 곳 옆에는 십여 명의 미술관 관람객들이 태호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는 뉴욕의 한 미술관. 태호가 세계 3대 걸작이라고 부르는 'Faceless'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미술관에서 그림을 그리는 행사는 이 미술관 개관 이후 처음 있는 행사로 미술관에서 이번 행사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미술관의 분위기를 통해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번 행사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오 과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호는 'Faceless' 복원 작업에 참여한 실력 있는 작가로서 '빛의 마리아'라고 하는 자신 나름의 Faceless의 복원 작품을 제작하였습니다. 현재 빛의 마리아 I, II, III 이 Faceless 옆에 전시되어 있으며 태호가 작업 중인 그림은 빛의 마리아 IV입니다."

에이미의 설명이 이어졌다.

"태호는 빛의 마리아 시리즈를 통해 'Faceless' 원작 복원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현재 빛의 마리아 III는 뉴욕 시민이 생각하는 가장 Faceless 원작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Faceless 만큼이나 사랑받는 작품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지금 제작하고 있는 빛의 마리아 IV는 전문가들이 사이에서 가장 Faceless 원형에 가까운 작품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는 작품입니다." 에이미가 부연 설명했다.

이어지는 관람객들에 대한 인터뷰.

"빛의 마리아가 가지는 특별함이 무엇일까요?"

"빛의 마리아를 볼 때마다, 이 작품이 Faceless의 원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빛의 마리아가 Faceless 보다 더 잘 그려진 그림이라고 생각할 정도예요."

"지금 빛의 마리아를 그리는 작가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태호라는 한국인 작가로 알고 있어요. 여기 사람들은 Faceless 원작자의 재림이라고 흔히들 부르죠. 뉴욕의 젊은 작가 중 아마 제일 핫할 거예요. 주위 사람들이 태호 작가를 알아보고 시작했어요."

"태호가 미국에 온 지 이제 3개월. 작년에 머물렀던 시기를 합쳐도 6개월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런 그가 뉴욕에서 주목받는 신인 작가에 우뚝 썼다. 그가 미국에 오기 전까지의 발자취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내레이션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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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은 대구 동화사의 사 암자 중 하나인 염불암을 보여주는 것을 시작한다.

내레이션으로 염불암이 보유한 각종 보물에 대한 설명이 들어간다. 그중에서 문화재로 등록은 되지 않았지만 그 독특한 구도로 널리 인정받는 극락구품도를 자세히 줌인하며 설명을 해준다.

곧 카메라 앵글은 극락전 뒤에 있는 마애여래 좌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뀌는 카메라 앵글. 염불암을 지난 30년간 지켜온 보살과 인터뷰하는 장면이 들어간다.

"보살님. 혹시 예전에 저 마애여래좌상 앞에서 절을 하던 초등학생 기억이 나세요?"

"기억나지요. 태호라고. 동화사 오래 다니신 보살님 손자가 있어요. 그 학생이 여기서 한두 달 정도 살다시피 했었지에. 지금은 많이 컸겠네요."

"그 태호라는 학생이 여기에 있었을 때 어떤 행동을 했었는지 기억나는 게 있으세요?"

"그때 그 학생이 팔공산에 암자라는 암자는 다 돌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렸어요.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면서 계속 스케치를 했어요. 거의 두 달 동안."

"무슨 그림을 그렸는지는 기억이 안 나시겠어요."

"그때는 스케치만 열심히 하는 걸 알았지 뭐를 그렸는지는 몰랐지요."

"그 태호라는 학생이 만든 탱화를 아시나요?"

"알다마다요. 언제더라. 그때가 아마 성철 스님 입적하시고 얼마 안 되어서, 그 학생 그림 세 점을 짧게나마 동화사에서 전시를 했었어요. 그때 대구에서 절 다니는 사람들은 다 보고 갔을 겁니다."

"그림이 어땠는지도 자세히 기억나시나요?"

"기억나요. 하나는 성철 스님 초상화고 하나는 탱화였는데, 얼마나 잘 그렸는지 지금도 기억에 선하네요. 절에서는 다들 부처님이 내려주신 재능이라고 소문이 자자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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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은 다시 성철스님의 막내제자로 알려진 원영 스님과의 인터뷰 장면으로 바뀌었다.

"스님 혹시 태호라고 하시나요?"

"성철 스님과 오랫동안 왕래하던 정숙 보살님 손자입니다.

"그 태호 학생이 성철 스님의 초상화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어떤 일화가 있었는지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태호 학생이 10살 때 성철 스님을 만난 적이 있었고 그때 기억으로 스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은 성철 스님이 말년에 가까이 두고 보시던 그림입니다."

화면에는 다움 미술관에 보관 중인 성철 스님의 초상화를 띄웠다.

"혹시 스님이 그림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셨는지도 얘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스님은 그 그림을 좋아하셨지만 한편으로는 경계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절에서 치우라고 하셨지요. 이유는 그림을 보면 아실 겁니다."

"알려주실 순 없는 내용인가요?"

"평가는 관객의 몫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스님은 그림을 보여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림 뒷면에 시를 한편 적으셨습니다. 그림은 큰 스님을 그린 것이지만 당신과의 인연은 더 이상 없으시다고 하셨습니다."

화면에는 '최초 공개'라는 문구와 함께 그림 뒤편에 적힌 스님이 쓴 한문 시가 올라왔다.

화면은 다움 미술관으로 바뀌었다. 그림 세 점이 전시되었는데 한 점은 초상화고 옆에 두 점은 태호의 탱화가 있었다. 카메라에는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큐레이터가 그림에 대한 설명을 진행했다. 아래는 단장이라는 자막이 떠올랐다.

"이 세 작품은 9x년도에 권태호 작가로부터 미술관에서 구매한 작품으로 그해 입적하신 성철 스님과 동화사 염불암의 마애여래좌상에서 모티브를 얻어 그린 작품입니다."

그 뒤로도 그림의 특징을 설명하고 그에 대한 평가에 대해 설명했다. 종종 당시 종로에 모인 인파를 소개하는 뉴스가 짧게 소개되었다.

"현재 미술관의 태호 작가에 대한 평가는 어느 정도인가요?"

"옛날 얘기를 좀 하면, 19세기에는 이 정도의 대작이라면 여러 사람들이 분업을 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태호 작가가 이년에 걸쳐서 자신의 손으로 그림 전체를 직접 그렸습니다. 이런 고된 노동을 요하는 작품은 앞으로 쉽게 나오기는 힘들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종교적 열정에 힘입어 제작한 대작이기 때문에 미술관에서 매우 소중히 관리하고 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우리 미술관에서는 루브르의 모나리자 같은 대접을 받는 작품입니다."

"다움 미술관은 국보와 보물도 여러 점 보유하고 있는 국내 최고의 사립 미술관입니다. 그럼에도 이 그림이 그런 국보나 보물보다 소중하다는 얘기이신가요?"

"국가의 문화재와 직접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떤 작품에 더 애착이 가느냐고 물어보시면 전 주저하지 않고 이 그림들을 고르겠습니다. 이건 작품을 감상하신 분들이라면 모두가 공통적으로 하시는 얘기에요."

"만약 현재 이름이 잘 알려진 작가들의 작품과 이 작품을 교환하자는 제의가 들어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클림트나 반 고흐의 작품을 들고 오지 않는 한, 고려 대상조차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 그림들이 가지는 위상은 그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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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은 다시 바뀌어 한국에서 한창 유행 중인 시스루 의류에 대한 소개로 넘어갔다. 동대문에서 시스루 의상을 구경하는 20대 여성들과의 인터뷰였다.

"이런 시스루가 언제부터 유행했는지 아시나요?"

"의상 콘셉트가 소개된 것은 오래되었는데 한국에 소개된 것은 몇 년 안된 걸로 알고 있어요.

"자세하게 아시는데 이쪽 업계에서 일하세요?

"전공이 의류 쪽이어서 알고 있어요.

"혹시 언제부터 한국에 정식으로 소개되었는지 아시나요?

"연도는 정확히 모르는데 몇 년 전부터 갑자기 확 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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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패션쇼 현장. SS 시즌을 마친 여성 의류 시스템의 수석 디자이너인 안 만준과의 인터뷰.

"언제부터 한국에 시스루 유행했는지 아시나요?"

"94년도 가을 뉴 월드 백화점에서 진행된 자선 패션쇼 이후부터입니다.

"어떤 패션쇼였는지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렇게 단정하실 수 있으신가요?"

"여러 가지로 센세이셔널 한 무대였습니다. 순수 미술과 의류와의 협업을 진행한 한국 최초 무대였으며 한국 의류시장에 적지 않은 변화를 준 무대이기도 합니다."

편집된 패션쇼 장면 일부가 약 3분에 걸쳐 소개되었다.

"태호 작가의 역할은 무엇이었나요?"

"패션쇼에 대한 최초 기획자이며, 패션쇼의 전체 콘셉트를 정의했습니다. 한복이라는 형식을 빌렸지만, 프랑스에 60년대에 소개된 시스루를 한국에 재 접목 시킨 장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화면으로는 당시 패션쇼의 녹화 장면이 재생되었고 안 민주 디자이너의 해설이 걷들여졌다.

"보통의 패션쇼와는 다르게 무대 장치가 굉장히 화려했습니다. 저 뒤에 보이는 달이 발해대 강재범 교수의 작품입니다."

장면이 바뀌고 한복이 보이기 시작했다. 태호가 섭외했던 가장 뜰 것 같던 신인 배우 15명이 차례로 한복을 입고 런웨이를 지나쳤다.

"지금 최정상급 배우를 한 무대에서 볼 수 있었던 거의 최초 무대였습니다. 태호 작가가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서 찾은 가장 가능성 있는 신인 모델과 배우를 섭외했습니다."

마지막 피날레에 태호는 런웨이 맨 앞까지 나와서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저기 보이는 어린 학생이 태호다. 그의 나이는 이제 14살. 학교를 갔다면 중학교 1학년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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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은 베이징의 한 공방.

아이웨아웨아의 약력이 소개되고 있다.

그는 한창 외국 언론사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인터뷰가 끝난 후 EBC와의 짧은 인터뷰가 이어졌다.

"한국에서 EBC 방송국에서 나왔습니다. 권태호 작가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자 한국에서 찾아왔습니다."

"태호는 어린 나이지만 엄청난 그림 솜씨와 예술에 대한 뛰어난 안목과 철학을 있습니다. 그의 최근 작품 활동도 굉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태호의 작품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난 그가 어릴 적 그린 탱화와 최근에 뉴욕에서 그린 빛의 마리아를 봤습니다. 탱화만 해도 그 아름다움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데 빛의 마리아는 그저 감동이었습니다. 몇 년 전 그를 베이징에서 만난 게 행운이라 느껴질 정도더군요."

"내가 만난 태호는 17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이미 그림을 그리는 능력 면에서는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가장 완벽한 화가라고 생각합니다."

"태호군이 어떻게 예술에 대한 철학과 안목을 기를 수 있었는지 아시나요?"

"태호에게 두 명의 스승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 명은 김창기 교수고 다른 교수로 강재범 교수죠. 어렸을 때부터 두 사람에게 예술 분야에 대해 사사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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