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159화 (159/165)
  • 제 159화

    결말 (1)

    차원의 열쇠와 자물쇠. 그리고 무명왕의 검까지 얻어낸 이후.

    시간은 정말 속절없이 빠르게 흘러갔다.

    “어…. 서원아. 나 옷부터 좀 갈아입으면 안 될까?”

    “…이대로 갈아입어.”

    “찰싹 달라붙어 있는데, 어떻게 갈아입어….”

    “진서원! 오빠 아직 씻지도 않았잖아…! 당장 안 떨어져!?”

    “…몰라.”

    “얘가 진짜…!”

    뜨거웠던 날씨도 점점 식어 가는 10월.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다사다난했던 로테이션 제도도 어느덧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언니. 가슴 좀 치워.”

    “뭐…? 가슴을 어떻게 치워…!”

    “…오빠가, 답답하데.”

    “어…. 아닌데?”

    “흥! 오빠는 가슴 엄청 좋아하시거든?”

    “…짜증 나.”

    “나는 작아도 괜찮…. 아니, 서원아. 네가 작다는 말이 아니라….”

    서로 부딪치거나 껄끄러워하기 바빴던 지난날과는 다르게, 점점 이 생활에 적응해나가며 나름 친근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밀키트가 뭐 어때서!”

    “직접 해먹으면 훨씬 맛있는데, 왜 그런 걸 사먹냐구…!”

    물론 그 와중에도 매번 부딪치는 조합도 있었다.

    주로 설주희와 임아린 뿐이지만.

    “얘들아? 나는 둘 다 좋은데….”

    “하나하나 손질할 시간에 딴 거 하면 얼마나 좋아! 서로 좋자고 하는 일인데, 자꾸 이딴 식으로 사사건건 태클 걸래?”

    “태클 거는 게 아니라, 네가 자꾸 말도 안 되는 걸 우기니까 그렇지…! 나는 지혁이랑 같이 장 보고 싶단 말이야…!”

    “인터넷으로 시키면 되잖아!”

    그동안 대체 어떻게 참아왔는지, 설주희와 임아린은 로테이션이 겹칠 때마다 으르렁거리기 바빴다.

    서로가 싫어서 그렇다는 느낌보단, 그냥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거. 어떻게 해?”

    “다 했어? 왼쪽 냄비에 다 넣으면 돼. 손 조심하고.”

    “…응.”

    의외의 조합도 있었다.

    “서원아. 여기, 간 좀 봐줘.”

    “…응.”

    바로 진서원과 홍유라의 조합이었다.

    “어때?”

    “…맛있어.”

    “다행이다. 이거…. 지혁이한테도 갖다 줄래? 가서, 간 좀 어떤지 물어봐.”

    “…응.”

    원래 홍유라가 부드러운 성격을 지닌 덕에 누구와도 크게 부딪치는 일이 없었는데, 막내인 진서원을 살뜰히 챙겨주자 그녀도 자연스레 홍유라를 따르게 됐다.

    마치 젊은 엄마와 딸을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모두와 함께 동거하면 할수록, 홍유라의 매력만 유독 도드라지는 기분이었다.

    “와…. 벌써 다음 달이면 연말이에요!”

    “진짜 시간 빠르네요. 야, 지혁아. 우리 연말에 뭐하냐?”

    “하긴 뭘 해. 일해야지.”

    “…쯧. 그치. 일해야지….”

    그리고 어느덧 찾아온 11월.

    푸르렀던 나무들이 모두 갈색으로 물들어, 본격적으로 날씨가 차가워질 즈음.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한창 결전을 준비하던 도중, 문득 불안감이 덜컥 닥쳐왔다.

    솔직히 지금의 삶이 내게 너무 과분한가 싶기도 하다.

    결전 준비와 함께 다 같이 동거를 시작한 이후, 나는 하루하루 충실하고 매일매일이 색다른 나날을 보내고 있다.

    말 그대로 내일이 기다려지는 삶을 살고 있단 말이다.

    ‘과연 내가 이렇게까지 행복해도 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 한편에 불쾌한 불안감이 덕지덕지 쌓여갔다.

    지금의 행복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

    조만간 벌어질 마왕과의 전투에서, 불의의 사고로 누군가 죽어버릴 수도 있다.

    물론 그런 불상사를 방지하고자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이지만, 사람의 불안감이란 쉬이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잃을 게 많을수록 불안하다고 하더니.

    지금 딱 내 꼴이 그랬다.

    양손 가득 쥔 것 중에, 그 무엇하나 잃을 용기가 없었다.

    분명 처음엔 그저 설주희만 살려보자는 생각으로 임했는데….

    어느 순간 모두를 지키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 어느 때보다 ‘책임감’이라는 단어가 강렬하게 와 닿는 순간이었다.

    “우와…!”

    그리고 순식간에 훌쩍 다가온 12월.

    “눈이에요…! 이거, 첫눈 아닌가…?”

    “…진짜네.”

    여느 때와 같이 방한나와 함께 식사하려는 찰나. 우리는 창밖에 흩날리는 새하얀 눈과 마주하였다.

    “오빠랑 첫눈을 맞을 줄은 몰랐는데…. 헤헷….”

    아직 풋풋한 감성이 살아있던 그녀는 냉큼 휴대폰으로 창밖을 찍어댔다.

    작은 것에도 행복해하는 그 모습이, 내 눈에는 너무나 예뻐 보였는데….

    “…….”

    정작 나는 그녀의 행복한 모습을 마냥 순수하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오빠…! 우리 셀카…! …오빠?”

    “…어? 어어….”

    “무슨 일 있으세요…?”

    눈치 빠른 그녀는 살짝 심각한 표정으로 지그시 시선을 보내왔고,

    걱정을 끼치기 싫었던 나는,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며 적당히 얼버무렸는데….

    “일은 무슨….”

    “오빠.”

    방한나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솔직히 말해주세요.”

    “아무 일 없다니까?”

    괜히 피식 웃음을 흘리며 다시 한번 얼버무리려 했으나, 그녀는 외려 단호한 얼굴로 나를 추궁해왔다.

    “자꾸 이러시면…. 다 이를 수밖에 없어요.”

    “이르긴 뭘 일러.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되세요?”

    “…어?”

    허를 찔려 멍하니 시선을 주고받길 잠시.

    나는 벌거벗은 채로 속내를 모두 드러낸 것처럼, 묘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조심스레 입을 열어보았다.

    “…티나?”

    그러자 방한나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왔다.

    아무래도…. 감정을 제대로 숨기지 못한 것 같았다.

    팀원에게 걱정을 끼친 관리자라니, 관리자 실격이라 해도 할 말이 없으리라.

    “…하아….”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의자에 몸을 기댄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넌지시 말을 꺼냈다.

    “…솔직히. 내가 제대로 준비하고 있는 것들이, 제대로 된 건지 확신이 안 서.”

    “확신이요…?”

    “그냥. 괜히 불안한 거 있잖아. 그런 기분이야.”

    엄연히 부하에 해당하는 그녀에게 이런 말을 꺼내는 건 좋지 않은 행동.

    하지만 왠지 모르게 방한나에겐 속내를 터놓게 됐다.

    “예전엔 안 그랬거든. 무조건 내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엔 잘 모르겠어.”

    “…확실히. 오빠는 항상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있긴 했죠….”

    도지혁에게 자신감 빼면 뭐가 남을까.

    나는 그녀의 맞장구에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리곤 시선을 옮겨 넌지시 눈을 마주쳤다.

    어딘가 포근함이 느껴지는 그녀의 눈빛.

    나도 모르게 기대고 싶어지는, 그런 기분이었다.

    “한나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게…. 맞겠지?”

    그녀는 내 마음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곤 확신에 찬 얼굴로 대답해주었다.

    “아마 맞을 거예요. 저는 오빠가 틀려도 정답이라 믿을 거거든요…!”

    “…너무 맹목적인 거 아냐?”

    “그치만…. 오빠는 항상 정답이라고 절 설득하셨잖아요. 저도 가스라이팅 당한 거라구요…?”

    내가 가스라이팅을 했다니.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나는 괜히 입맛만 다셨고, 방한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해맑게 이야기해왔다.

    “오빠는, 오빠가 할 수 있는 걸 해왔잖아요. 그러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 순간.

    “…….”

    그녀의 한마디가 가슴에 날아와 꽂혔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했다고…?’

    불현듯 떠오르는 오래된 기억.

    퀸즈에서 쫓겨났던 나는, 방한나의 조언 아닌 조언에 힘입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자 팀 서울시청에 입단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차근차근 해치우며 여기까지 다다랐다.

    ‘…할 수 있는 것….’

    갑자기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역시, 한나는 멋있구나.”

    “네…?”

    “그냥…. 갑자기 멋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 여자친구가 이렇게 멋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왜 잊고 있었을까?”

    “가, 갑자기 그런 칭찬은 좀 부끄러운데요….”

    방한나는 입을 오물거리며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고,

    나는 한동안 잃어버렸던 자신감을 되찾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예쁘네.”

    우울하게만 보였던 올해의 첫눈이, 왠지 아까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월 1일.

    어느덧 찾아온 새해의 첫날, 모두가 행복해야 할 그 시각.

    도지혁은 사뭇 비장한 모습으로 텅 빈 사무실을 바라보았다.

    ‘내가 여길 다시 올 수 있을까.’

    앞서 임아린은 마왕이 1월 2일에 쳐들어올 것이라 예언하였다.

    공교롭게도 원작에서 설주희가 마왕과 싸웠던 날도 1월 2일.

    도지혁은 임아린의 예언을 확신하며 모든 걸 준비해왔고, 바로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었다.

    “안 나오고 뭐 해?”

    그때,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설주희가 나타났다.

    “준비 다 끝났어. 다들 너 기다리고 있다고.”

    “미안, 바로 갈게.”

    도지혁은 그녀의 독촉에 곧장 몸을 일으켰고, 한쪽에 챙겨뒀던 짐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는….

    ‘꼭 돌아와야지.’

    마치 당장이라도 일할 수 있도록 깔끔히 정리된 사무실 책상을 슥─ 쓰다듬곤 사무실을 나섰다.

    그렇게 도지혁과 설주희가 헬기를 타고 강원도 동해시로 날아가던 도중.

    “…아래 좀 봐봐.”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도지혁은, 헤드폰에서 들려오는 설주희의 목소리에 창밖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

    창밖에 드리워진 도시엔 한눈에 보일 정도로 수많은 인파가 모여있었고, 도지혁은 묘한 기분을 느끼며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서 와.”

    이윽고 임시 본부에 도착한 도지혁과 설주희.

    앞선 서해 침공 당시처럼 강무진과 함께 현장을 지휘하던 이혜리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상황은?”

    “모든 병력이 해안에 집결해있어. 예정대로 연합군이 북쪽. 우리가 남쪽이야.”

    각 정부들이 모여 기획한 연합군과 도지혁의 주도로 뭉친 방위대는 각자 구역을 나눠 작전을 수행하기로 하였다.

    기성 헌터를 위주로 모집한 연합군은 성과를 올리는 것에 조금 더 무게를 두었고, 방위대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에 바짝 힘을 주었으나.

    양측 모두 마족의 섬멸을 기본 목표로 하고 있다.

    “우리도 바로 출발할게. 괜찮지 주희야?”

    “어.”

    “그럴 줄 알고 다 준비해뒀으니까, 천천히 해.”

    “…고맙다.”

    그렇게 도지혁과 설주희가 각자 탈의실에서 챙겨온 장비를 착용하는 사이.

    촤르륵─

    도지혁의 탈의실에 갑자기 누군가 들이닥쳤다.

    “무슨….”

    이혜리였다.

    “혹시 도와줄 건 없나 해서.”

    “…어?”

    뻔뻔한 그녀의 말에 살짝 당황했던 도지혁은, 이내 괜찮다는 대답과 함께 계속해서 장비를 착용해나갔다.

    철컥─ 철컥─

    그러던 그때.

    “지혁아.”

    벽에 살짝 기대있던 이혜리가 넌지시 말을 건네왔다.

    “다치지 마.”

    강렬한 진심이 담긴 짧은 한마디.

    철컥─ 철컥─

    그러나 도지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그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이혜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는 슬쩍 벽에 기대있던 몸을 떼더니, 탈의실을 나서며 한마디를 넌지시 툭 내던졌다.

    “이기고 와. 늘 그랬던 것처럼.”

    “…그래야지.”

    도지혁은 그제야 그녀의 마음에 응해주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두 사람 모두 큰 활약 기대하겠네.”

    “조심히 다녀와.”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본부를 나선 도지혁과 설주희는 곧장 미리 배치받은 구역으로 향했는데….

    “도지혁이다!”

    “설주희 님! 너무 예뻐요!”

    “오빠!! 잘생겼어요!”

    “누나아!!!”

    미리 전열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지나치는 두 사람을 발견하곤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흐응…. 인기 많네?”

    “인기는 무슨.”

    세진과 백일의 헌터들을 제외하면 방위대 대부분은 설주희와 도지혁을 보고 모여들었다.

    말 그대로 구국의 영웅인 두 사람과 함께 나라를 지키겠단 의지로 연합군을 마다한 것이다.

    “절대 다치지 마십시오.”

    “여기서 죽으면 개죽음인 거 알죠? 눈치껏 살아남아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도지혁과 설주희는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씩 건네며 전열을 가로질렀다.

    “설주희…. 진짜 멋있다….”

    “도지혁도 엄청 강해 보이던데?”

    소문이 말보다 빠르다고, 두 사람의 등장으로 추위에 떨던 방위대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아. 프로듀서님…!”

    그렇게 최전방에 다다른 두 사람. 방위대의 최전방엔 주요 전력인 퀸즈와 팀 서울시청이 자리하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강인해 보이는 갑주와 몸집만 한 방패를 등진 방한나부터.

    “오셨구나?”

    평소와 다르게 비장한 모습으로 갑주까지 착용한 김나래.

    “…늦어.”

    날렵해 보이는 장비와 지극히 아끼던 암흑룡의 건틀릿을 착용한 진서원.

    “지혁아…! 어서 와…!”

    매번 착용하던 협찬 장비가 아닌, 도지혁의 선물로 치장한 임아린.

    “잘 도착해서 다행이야.”

    그리고 끔찍이 아끼던 도지혁의 선물을 모두 꺼내온 홍유라까지.

    “저기. 나도 왔거든?”

    설주희가 도지혁만 바라보는 그녀들의 반응에 못마땅해하며 볼멘소리를 흘렸으나….

    “지혁아…! 컨디션은 괜찮아…?”

    “프로듀서님! 저랑 같이 스트레칭해요…!”

    팀원들은 그런 그녀의 반응을 가볍게 무시하곤 도지혁에게 쪼르르 모여들었다.

    “…개 같은 년들.”

    이래 봬도 나름 합을 맞춰온 동료들이었다.

    ‘준비는 모두 끝났다.’

    그렇게 최후의 전투를 앞둔 도지혁은 멤버들과 대화를 나누며 작전을 되새겨보았다.

    “연습해온 대로. 침착하게….”

    바로 그 순간.

    쿠구구구구구궁───────

    천지를 울리는 정체불명의 굉음이 울려 퍼졌다.

    “!”

    곧 게이트가 열린다는 징조이자….

    곧 싸움이 시작된다는 예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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