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8화
과정 (7)
‘아무리 봐도 사람이 사는 거 같은데.’
오두막에 가까이 다가선 도지혁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숨을 죽이곤 근처를 슥 둘러보았다.
입구 주변에만 잔디가 없는 것도 그렇고, 근처에 놓인 나무 밑동도 그렇고.
무엇보다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분명한 사람의 흔적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마 꿈속의 나도 여길 들렀겠지.’
도지혁은 자신이 아마 오두막에 들어서는 게 정답이리라 생각했다.
주변을 돌아본 결과, 검은커녕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마치 게임에서 강제적으로 이행해야 하는 퀘스트처럼, 오두막에 들어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진행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
혹여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챙겨온 아공간 주머니에서 검을 꺼낸 도지혁은, 검을 치켜든 채로 조심스레 오두막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슬쩍 손을 뻗어, 헐겁게 닫힌 오두막의 문을 조심스레 두드려보았다.
똑똑─
그러자.
끼이이익──
낡은 경첩의 비명과 함께 문이 열리더니, 어두운 집안에서 낯선 목소리가 도지혁을 맞이해주었다.
“손님이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늙은 노인의 목소리.
도지혁은 정체불명의 목소리에서 묘한 기쁨을 느끼며 검을 내리곤 슬쩍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말씀 좀 여쭤보려고 찾아뵀습니다.”
그 순간.
화악──
밝은 햇빛이 집안에 스며들며 내부를 밝히기 시작했다.
“허허.”
집안이 밝혀지며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노인의 정체.
그는 녹은 슬지 않았으나, 오래되어 군데군데 흉터가 남은 갑옷을 두른 채로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강한 사람이다.’
도지혁은 능력을 켜지 않았음에도 눈앞의 노인이 강한 존재라는 걸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설주희의 강함과는 다른…. 뭔가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서 들어오시오! 보아하니 우리 손녀랑 나이가 비슷한 거 같은데…, 말동무나 해주면 고맙겠구려. 아, 여기 앉으시게.”
갑옷을 절그럭거리며 호쾌한 웃음으로 인사를 받아 주는 노인.
도지혁은 감사의 뜻을 표하며 근처에 놓인 의자에 슬쩍 자리를 잡곤, 보기보다 훨씬 넓은 오두막 내부를 훑어보았다.
“여기, 밖에서 볼 땐 그렇게 안 컸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까 엄청 넓어 보입니다. 뭔가 마법이라도 사용하신 겁니까?”
“알아주니 고맙소! 우리나라의 자랑이었던 공간 확장 마법이라네! 이 마법이 어떻게 개발된 겨냐 하면…!”
노인은 이때다 싶었는지, 자신이 살던 세계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는데….
‘검의 무덤은 다른 세계에서도 존재하는 개념이었나?’
도지혁은 새삼스레 신기함을 느끼며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 딸이 마법사 놈이랑 결혼했는데…. 그놈이 글쎄…!”
어느덧 집안 이야기로 접어들기 시작한 노인의 이야기.
“저번에 우리 손녀랑 비슷한 아이가 왔었는데, 제 엄마랑 똑 닮아서 아주 곱게 생겼더라지! …둘이 잘 지내고 있을지 모르겠구먼.”
드디어 노인의 이야기가 슬슬 끝을 보일 즈음, 도지혁은 자연스레 끼어들며 슬쩍 정보를 구했다.
“혹시 저 말고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그리 많진 않소. 누구나 들어올 수 있지만, 아무나 들어올 순 없기 때문이오.”
“그렇습니까?”
“으음…? 이번에는 좀 아는가 싶었더니, 아니었나 보군.”
노인은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도지혁을 보며 가볍게 입맛을 다시곤 천천히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곳은 검의 무덤. 수많은 검이 잠들었고, 또 세기의 명검이 태어나기도 했던 곳이오.”
“…검의 무덤….”
그때, 은근한 눈빛을 띤 노인이 넌지시 바라보며 슬쩍 말을 건넸다.
“이곳은 강렬한 숙원을 품은 자들이 찾는 곳이오. 여기까지 왔다는 건 뭔가 이유가 있다는 건데…. 그대는 어떤 연유로 이곳을 찾았소?”
도지혁은 팔짱을 꼬며 노인의 질문을 곰곰이 되새겨보았다.
자신이 품고 있는 숙원이 무엇인지.
그리고 긴 고민 끝에 답을 내놓았다.
“살고 싶습니다.”
“살고 싶다고?”
“예. 그리고…. 살리고 싶습니다.”
“누구를 말인가?”
“제가 사랑하는 여자…들을요.”
“…으응? 여자들?”
노인은 또다시 찾아온 범상치 않은 사연에 살짝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이고 말았다.
*
“그러니까…. 그대의 연인이 총 다섯이란 말이오?”
“예.”
“허어….”
얼떨결에 도지혁의 복잡한 여성 관계를 듣게 된 노인은 놀라움이 담긴 탄식을 내뱉었다.
복잡한 사연으로 얽혀 한 남성을 공유하는 다섯의 여인이라니.
꽤 오랜 시간을 살아오며 한 남자를 두고 싸우는 모녀의 이야기만큼 놀라운 게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또다시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나중엔 모두 아내로 들일 작정 아니오?”
“…그럴 예정이긴 합니다.”
“고생길이 훤하구려.”
“사내대장부가 그 정도는 감당해야지 않겠습니까?”
“흐흐. 무릇 사내라면 그래야지.”
그렇게 적당히 이야기를 끝맺은 노인은, 화제를 돌려 도지혁에게 질문을 건넸다.
“검의 무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소?”
“거의 모릅니다. 정말 이름만 듣고 찾아왔습니다.”
“흠흠…. 그렇다면 내 설명을 해주리다.”
큼큼 목을 가다듬은 노인은 갑옷을 절그럭거리며 검의 무덤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곳은 ‘검’을 벼리는 곳이오. 어디에서도 올 수 있고, 어디로든 나갈 수 있지.”
검의 무덤은 어느 세계에도 묶여있지 않다.
그렇기에 어떤 세계에서도 올 수 있고, 반대로 어떤 세계로든 나갈 수 있다.
말 그대로 모든 차원과 통하는 장소인 것이다.
“그만큼 수많은 검사가 이곳에 찾아왔으나…. 안타깝게도 검을 벼리는 데 성공한 검사들은 많지 않소.”
물론 검의 무덤을 찾은 모든 이가 깨달음을 얻은 건 아니다.
검의 무덤이란 이름답게, 수많은 검들이 부러지거나 무뎌지며, 검으로서의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즉, 검의 무덤은 철저한 능력제라는 뜻이다.
“검은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조차 베어낼 수 있소. 그게 육신이 될 수도 있고, 마음이 될 수도 있지. 무엇을 베어낼지 택하는 건 오로지 그대의 몫이오.”
검은 무엇이든 벨 수 있다.
검에 관한 능력을 지니진 않았지만, 도지혁은 그게 어떤 의미인지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어르신은 무엇을 베셨습니까?”
도지혁의 물음에 노인이 허허 웃더니, 사뭇 자랑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베어내지 못했소.”
“못한 게 아니라, 안 베어낸 거 아니십니까?”
“눈썰미가 꽤 좋구려. 소인은 차마 가족을 포기할 수 없었소.”
가족.
도지혁은 앞서 노인이 자랑했던 내용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곤 차분히 입을 열었다.
“어르신. 외람되지만, 저는 검에 뜻이 없습니다.”
“역시. 그렇게 보이오.”
“…알고 계셨습니까?”
“이래 봬도 꽤 오래 살아왔소. 처음 그대가 검을 들고 들어오던 순간부터 대강 알아채고 있었지.”
흥미진진하게 웃는 노인의 모습에 살짝 입을 다물었던 도지혁은, 이내 사실대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저는 검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당장 사용할 무기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요컨대, 검을 달란 이야기였다.
“검을 들고 있지 않소?”
“공장에서 찍어낸 양산품입니다.”
“실력자는 무기를 가리지 않는단 말을 아시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실력자가 아닙니다.”
“수련을 통해 검술을 연마하면 실체가 없어도 검을 휘두를 수 있소.”
하지만 노인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은근히 수련을 권하였고,
도지혁은 수련할 정도로 재능이 없음을 어필하며 다시 한번 부탁하였다.
“안타깝게도 저에겐 그런 재능이 없습니다. 무슨 검을 써야 좋을지도 모르는 초짜입니다.”
“재능이 없는데 여기까지 왔단 말이오?”
허허 웃음을 흘리며 지그시 바라보는 노인.
마치 속내를 들여다보는 듯한 그의 눈빛에 짧은 한숨을 내쉰 도지혁은, 이내 노인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무명왕이시여.”
이름 없는 왕. 무명왕(無名王).
“호오.”
도지혁이 그 이름을 부른 순간, 노인이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 이름을 그대가 어찌 아는가?”
갑옷을 절그럭거리며 묘하게 달라진 말투를 내뱉는 노인.
앞서 능력으로 노인의 정보를 알아냈던 도지혁은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특별한 재능은 없지만, 특별한 재주는 있습니다.”
“그 재주가 여간 특별한 게 아닌가 보지?”
“제 몸 하나 지킬 정도는 됩니다.”
노인은 도지혁의 대답에 끌끌 웃음을 흘리곤 자신의 주름진 손을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들어보는군. 그 이름.”
그리고는 슬쩍 시선을 옮겨 도지혁을 쳐다보았다.
“아쉽지만, 내 그대에게 도움을 줄 만한 게 없다네. 내가 쓰던 검은 이곳에 없거든.”
“아닙니다. 아마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을 겁니다.”
도지혁은 진심으로 무명왕의 검을 바라지는 않았다.
모든 차원을 통틀어 검의 신이라 불리던 무명왕이다.
애초에 남을 흉내 내는 게 전부였던 도지혁이였기에, 그런 과분한 무기까진 생각도 안 했다.
“흠흠…. 그게 아무나 쓸 수 있는 검이 아니긴 하지. 그렇다고 손님을 빈손으로 보낼 순 없는 일인데….”
무명왕은 갑옷을 절그럭거리며 집안을 쓱 둘러보았다.
“아, 저게 좋겠군.”
그리고는 이내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천천히 몸을 일으켜 한창 타오르던 벽난로로 다가갔다.
“아마 이 정도면 충분할 걸세.”
그가 호언장담하며 집어 든 물건은, 장작을 쑤시는 용도의 오래된 쇠막대기.
“오랜만에 알아봐 준 손님이라 더 좋은 걸 주고 싶네만….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군.”
“……!”
도지혁은 어느 순간 노인의 손에 들린 검을 확인하곤 살짝 놀라고 말았다.
분명 쇠막대기였을 터였던 물건은, 어느새 고급스러운 장식이 곁들여진 검으로 변해있었다.
“받게나.”
무명왕으로부터 검을 받아낸 도지혁은 침을 꼴깍 삼키며 자세히 검을 들여다보았다.
겉으로만 보면 그저 고급스럽게 생긴 검일 뿐이지만,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보물 그 자체.
‘최소 S급. 아니, 적어도 Ex급이다.’
도지혁은 흐뭇한 얼굴을 한 무명왕을 바라보며 차분히 말을 꺼냈다.
“제가 제대로 다룰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자네가 생각할 일이지. 애초부터 이런 걸 받으러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뭣하면 좀 휘둘러보고 가는 게 어떤가?”
무명왕은 기껏 검의 무덤까지 왔으니, 이참에 수련 좀 하고 가라며 은근히 머무를 것을 종용해왔고,
도지혁은 비로소 ‘황제’라고 불리던 꿈속의 자신이 왜 일주일씩이나 걸렸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무려 검의 신이라 불리던 무명왕을 사사하며 수련할 수 있는 것이다.
검을 다루는 자였다면, 아마 절대 거절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괜찮습니다.”
지금의 도지혁에겐 무명왕의 가르침조차도 과분했다.
그는 ‘황제’가 아닌 프로듀서였기에.
“당장 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 아쉽지만 먼저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흐음…. 얼마나 바쁜 일이길래, 이 외로운 노인네의 바람도 거절하는가?”
“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늦으면 바가지 긁힐지도 모릅니다.”
프로듀서인 도지혁으로선 검을 수련하는 것보다, 그 시간에 가족들을 챙기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가족이라….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군.”
일찍이 가족을 위해 검을 포기했던 무명왕은 충분히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도지혁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선물 받은 검을 챙겨 넣곤, 자신이 사용하던 공장제 검을 슬쩍 내려두었다.
“장작 쑤실 때 이거라도 사용하시지요. 공장에서 만든 거라 나름 튼튼합니다.”
“잘 쓰겠네.”
무명왕은 썩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오두막을 빠져나와, 출구로 돌아가는 길.
잠시 걸음을 멈춰선 도지혁은, 무명왕에게 선물 받았던 검을 꺼내 들었다.
“…….”
그리고는 언젠가 홍유라로부터 훔쳐온 검술을 떠올리며 살짝 자세를 낮추었고, 잠잠한 벌판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사아아악───!
마치 바람이 분 것처럼 일렁거림이 퍼져 나가는 벌판의 잔디.
‘강하다.’
도지혁은 한층 더 가까워진 해피엔딩에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