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방으로 도망친 설주희는 다급히 두꺼운 이불에 몸을 숨겼다.
‘…뭐, 뭔가…, 뭔가 잘못됐어….’
어린아이처럼 이불을 펄럭이며 뒤집어쓰는 그녀의 손길엔 진득한 강박이 묻어있었고,
그녀는 누구도 볼 수 없도록 몸을 숨긴 뒤, 몸을 잔뜩 웅크리며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내, 내가…. 도지혁을 싫어해…? 마, 말도 안 되잖아…. 그럴 리가 없다고…!’
오랫동안 그녀의 머릿속을 잠식했던 암시는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풀렸으나,
그동안의 기억까지 함께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내, 내가 지혁이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불행히도 설주희는 그간 자신이 저질러온 짓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한낱 동영상 따위에 손바닥 뒤집듯 사랑하던 이를 의심하고.
믿음은커녕 더러운 배신자라 단정 지으며 폭언을 일삼고.
벌레보다 못한 취급으로 경멸한 것도 모자라, 끝끝내 추한 모습을 보이며 절교를 당했던 기억까지.
자신이 도지혁에게 저질렀던 모든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 수많은 기억들 중에서 그녀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건….
바로 그녀를 바라보던 도지혁의 눈빛.
실망스러움이 담긴 눈길로 무심히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아, 아니야….’
설주희는 실성해버릴 것 같은 감각에 머리카락을 콱 움켜쥐었다.
할 수만 있다면, 뇌와 머리를 뜯어 분리해버리고 싶은 기분.
이 끔찍한 시간을 지워버릴 수만 있다면….
정말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건 다 꿈이야…. 그래…. 다 꿈이야…!’
그녀는 차마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자신이 도지혁을 혐오하고 경멸했던 과거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가 자신에게 질려버렸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했기에.
그래서 그녀는 필사적으로 현실을 부정했다.
‘…꾸, 꿈에서 깨는 거야…. 이 좆 같은 꿈, 깨기만 하면 돼…!’
설주희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조금이라도 빨리 꿈에서 깨어나길 빌었다.
빨리 꿈에서 깨어, 여느 때와 같이 도지혁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
당연하게도 이것은 꿈이 아니었다.
무슨 짓을 해도 돌이킬 수 없는, 비정한 현실이었다.
“…흐읏….”
결국, 현실의 벽과 마주한 그녀는 눈물을 왈칵 쏟아내며 생각했다.
아무리 끔찍한 암시에 걸려있었다고 해도, 자신이 저지른 짓은 도저히 용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사랑하는 이에게 그런 짓을 저질러놓고, 어찌 사랑을 말하고 사과를 입에 담는단 말인가?
“흑….”
더더욱 가슴 아픈 사실은, 지금까지의 실수를 되돌릴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다는 것.
도지혁은 그런 수모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퀸즈를 버리지 않았다.
정말로 마음이 없었다면, 아예 연락을 피하거나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설주희는 그런 도지혁의 미련을 남김없이 뿌리 뽑아주었다.
마지막 기회까지 직접 걷어찬 걸로 모자라, 커다란 실망까지 덤으로 안겨 준 것이다.
“끅….”
서러운 눈물을 흘리던 설주희는 정신이 점점 망가져 가고 있다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몸을 일으켜 약을 먹는다면, 아마 조금은 나아지리라.
그러나….
그녀는 다시 약으로 도망칠 용기가 솟아나지 않았다.
약의 효과는 일시적.
지금 약을 먹어도, 언젠가는 약의 효과가 떨어지고 만다.
그러면 다시 현실이 찾아올 테고, 슬픔에 몸부림을 치며 차디찬 현실과 마주해야 하는데….
설주희는 차마 지금의 감정을 다시 느낄 자신이 없었다.
“…….”
어쩌면 좋을까.
어떻게 해야 좋을까.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싹싹 빌며 사과를 해야 할까?
암시가 풀렸다고, 암시 때문에 정말 어쩔 수 없었다고 간절히 빌면 받아주지 않을까?
…그러다 받아주지 않으면?
도지혁은 냉정한 편이다.
한번 마음이 뜬 상대에게는 짧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이미 마약에 손을 댄 걸로 크게 실망해버린 상태인데,
사과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마지막의 마지막 기회라고 혼자 착각하여, 더더욱 실망케 해버린다면?
“…히, 히익….”
극도의 공포감에 빠져버린 설주희는 더더욱 몸을 둥글게 웅크리며 벌벌 떨어댔다.
지뢰밭을 걷는다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무엇을 선택해도 죽는다는 두려움.
죽음의 딜레마가 또다시 그녀의 마음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미, 미안해요…. 제,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미안해요….”
설주희는 끊임없이 사과를 중얼거리며 용서를 빌었다.
이것이 나락의 끄트머리에 선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기에.
그러나 당연하게도 사과를 들어주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녀는 정신을 잃을 때까지 사과와 발작을 반복하며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들어 갔다.
*
뒤풀이 파티는 날이 바뀔 때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이미 헤어지고 남을 시간이었으나, 시즌이 끝났다는 해방감 덕분인지 다들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는데….
“어어! 도지혁 이 자식, 술 대신 물 마신다!”
“아앗…! 푸로두서니임…! 물 같은 거 마시면 몸에 안 좋아요오…!”
“맞아요! 여기, 물 대신 이거 드세요!”
“자아 자아, 어서 잔 받으세요.”
아예 나를 죽일 기세로 쉴 틈을 주지 않으려는 김준형과 잔뜩 혀가 꼬여버린 방한나.
그리고 은근슬쩍 보드카를 한 가득 붓는 김나래와 넘실거리는 잔을 들이미는 한규리까지.
굴러다니는 술잔만 봐도 빵빵 웃음을 터트리는 그들의 모습은, 멀리서 보기만 해도 알코올 향기가 풍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정신 나간 인간들…. 나는 물 마실 거야!”
“어어!? 도망친다아!”
“잡아랏…!”
당장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팀원들과 가까워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지시를 내려야 하는 입장에서, 팀원들과 너무 가까워지면 서로 불편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항상 팀원들과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지내왔고, 감정적인 교류가 필요한 멤버들에게만 조금 더 거리를 좁히며 팀을 운영해왔다.
그런데….
이곳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어느새 내 가치관도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
팀 서울시청은 정말 보기 드문 케이스의 팀이다.
어리다는 이유로 일을 떠넘겨 받은 김준형부터.
좌천되듯 등 떠밀려 부서를 옮기게 된 한규리.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은 능력으로 헌터가 되기 위해 단신으로 상경한 방한나.
별 볼일 없는 D급 헌터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김나래.
유일했던 보호자를 잃고, 잔혹한 살인귀가 될뻔했던 진서원.
그리고….
10년간 몸담았던 팀에게 버림받아, 술독에 빠져 방황하던 나.
우리는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채로 팀 서울시청에 모였고, 하나의 팀을 이뤄 성공적인 시즌을 보내는 동안, 딱딱하게 경직돼있던 나의 가치관도 점점 변해가기 시작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그때 김준형의 전화를 받은 순간부터, 바뀌기 시작한 게 아니었을까.
“…오빠.”
“어, 서원아. 잠깐 안 보이더니…. 어디 다녀왔어?”
“…응. 화장실.”
“계속 화장실에 있었어? 술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냐…?”
나는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진서원의 모습에 무심코 걱정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아냐.”
그러자 그녀가 무심히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이 멀쩡하다고 주장해왔는데….
꾸욱─
난데없이 내 옷깃을 붙잡은 그녀는, 텅 빈 라운지 안쪽을 가리키며 나지막이 동행을 요구해왔다.
“…오빠. 잠깐 저기.”
“응? 갑자기?”
뜬금없는 그녀의 행동에 잠시 의아해하던 그때.
“어, 서원이다아!”
방한나가 새로 만든 칵테일을 홀짝이며 은근슬쩍 끼어들어 왔다.
“…언니는, 가서 나래 언니랑 놀아.”
“으응…? 왜 나는 상대 안 해줘…?”
묘하게 불만스러운 눈빛을 띠며 방한나를 응시하는 진서원.
마치 계획했던 게 일그러져 못마땅한 느낌이었다.
“나랑도 놀아줘어…!”
“…싫어.”
“왜에…!”
“…저리 가.”
‘귀엽네.’
나는 진짜 자매 같은 두 사람의 모습을 잠자코 감상하며 시원한 물을 홀짝였고,
모두가 취해버렸던 광란의 밤은, 거의 해가 뜰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막을 내렸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흘러….
여느 때와 같이 찾아온 출근 날.
“좋은 아침.”
“오셨어요!”
나는 먼저 출근한 한규리와 인사를 나누며 사무실에 얼굴을 내비쳤다.
“준형이는요?”
“아. 준형 씨는 인사팀에 볼일 있다고 잠깐 가셨어요.”
얼마 전. 광란의 뒤풀이 파티를 마친 후.
자체적으로 일일 포상 휴가를 누린 우리는, 본격적으로 새로운 시즌을 맞이하기 위한 업무에 들어섰다.
“오퍼 들어온 건 있어요?”
“한나랑 서원이한테 각각 한 건, 나래한테는 두 건 있었어요.”
이적 기간이 찾아오자 우리 팀에도 슬슬 입질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세진 길드가 든든히 버티고 있어서 그런지, 찔러보듯 들이미는 제안을 제외하곤 이렇다 할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나래가 인기가 많네.’
현재 우리 팀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건 김나래.
아무래도 전략적으로 한정적인 진서원이나 방한나보다는,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김나래가 훨씬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오퍼 다 쳐내시고…, 준형이 오면 개편 회의부터 시작하죠.”
“알겠습니다!”
그렇게 김준형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한창 업무에 빠져있길 잠시.
탓탓탓탓──
갑자기 복도에서 급하게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벌컥─!
“도, 도지혁 왔어요!?”
누군가 다짜고짜 사무실로 들이닥치며 나를 찾아댔다.
‘응?’
인사팀에 볼일을 보러 갔던 김준형이었다.
“뭔데 그렇게 급하게 나를 찾아?”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곤 몸을 일으킨 나는, 파티션 너머로 그에게 슬쩍 말을 건네보았다.
그러자….
“…지혁아….”
김준형이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내게 한가지 소식을 들려주었다.
오늘 새벽.
설주희가 자살 시도를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