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93화 (93/165)

살다 보면, 언젠가 한 번쯤은 꼭 그런 날이 있다.

없이는 못 산다 표현할 정도로 항상 손에서 놓지 않던 휴대폰을, 유난히 쳐다보지도 않게 되는 그런 날이.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한나야, 좀 괜찮아?”

“괘, 괜찮아요…! 그냥 살짝 접질린 거라….”

박해린과 협의를 마치고 돌아온 훈련장은 유독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방한나가 발을 헛디디며 작은 부상을 입고 만 것이었다.

“어디 좀 봐봐.”

“…아, 아니, 그, 괘, 괜찮은데….”

나는 부츠를 벗고 벤치에 앉아있던 방한나의 발목을 붙잡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으으으….”

맨발을 보이는 게 부끄러운지 살짝 움츠러드는 그녀.

‘다행히 심한 건 아닌 거 같네.’

발목 부위가 빨갛게 부어오른 게, 겉으로 봐선 크게 다치지 않은 것처럼 보였는데….

“통증은 어때?”

“어…. 그냥 참을만한 정도에요…!”

방한나는 훈련을 이어가려는 듯 애써 밝은 모습을 보여왔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조용히 그녀의 발을 붙잡고 살짝 움직여보았다.

꾸우욱-

그러자.

“읏….”

얼굴을 일그러뜨리곤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몸을 움찔거리는 그녀.

아픈 걸 억지로 참는 게 분명했다.

“안 되겠다. 병원부터 가자.”

“벼, 병원까지는 안 가도 괜찮아요…! 그냥 파스만 좀 바르면….”

끝내 병원에 들르자는 이야기가 나오자, 방한나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치기 시작했지만….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볼 팀원들이 아니었다.

“한나야. 우리는 괜찮으니까, 어서 갔다 와…!”

“그래, 큰 거 아니더라도, 가서 붕대라도 감고 오면 좋잖아.”

“이럴 때 쉬어야지. 적당히 처리해 줄 테니까, 아예 오늘은 먼저 퇴근해버려.”

“…빨리 가.”

“지, 진짜 괜찮은데에….”

김나래와 한규리. 거기에 김준형과 진서원까지 가세하여 등을 떠밀자, 방한나도 강력하게 주장할 수가 없었다.

“그, 그럼…! 진짜 빨리 다녀올게요…!”

가까스로 방한나의 병원행이 결정된 뒤.

나는 방한나를 데리고 훈련장 인근에 위치한 세진 길드 소속 주치의에게로 향했다.

원래라면 김준형이 따라갔어야 했으나, 하필 김준형에게 할 일이 있던 바람에 내가 따라나서게 됐다.

‘빨리 직원을 더 뽑든가 해야지….’

그렇게 영세한 팀 상황에 내심 아쉬워하며 병원으로 향하던 길.

“…프로듀서님….”

조수석에 앉아있던 방한나가 나지막이 말을 걸어왔다.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잔뜩 풀이 죽은 게, 아무래도 마음을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괜찮아.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럴 수 있지.”

“그, 그래도요…. 쓸데없이 시간이나 뺏고….”

솔직히 크게 다친 게 아니니, 딱히 문제가 될 것도 없다.

물론 며칠 뒤에 토벌이 예정돼있긴 하지만….

염좌 정도의 부상은 충분히 비약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

막말로 겨우 이 정도로 다친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볼 수 있다.

“난 시간 뺏기는 것보다 네가 다치는 게 더 싫어.”

“…네?”

“솔직히 나는 되게 안심했어. 네가 더 크게 다치진 않았나 싶어서 엄청 걱정했거든.”

“…그건….”

때마침 신호에 걸려 차를 세운 나는, 조수석에 앉은 그녀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녀는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녀와 지그시 시선을 마주치며 단호히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팀은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정상적으로 굴러갈 수가 없는 팀이야. 너뿐만 아니라, 나래나 서원이도 그렇고. 규리 씨나 준형이가 빠져도 곤란해.”

“…….”

“그래서 너희한테 무리한 훈련도 안 시키는 거고, 너무 어려운 게이트도 들여보내지 않을 거라고 말했지?”

“…네….”

“하지만 사람이 아픈 건 어쩔 수 없잖아. 나도 언제 갑자기 아파서 팀에 폐를 끼칠지 몰라. 만약 내가 아파서 훈련을 못 봐주면, 너는 내 탓 할 거야?”

“아, 아뇨…! 절대 안 그래요!”

“나도 그래. 아마 다른 팀원들도 그럴 거고.”

“…아….”

신호가 바뀌자, 움직이는 차들.

나는 방한나에게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이곤 시선을 거두며 도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어느덧 도착한 세진 길드 소속 병원.

보호자로 참석한 나는 방한나의 진료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주사 한 방이면 되겠네요.”

의사가 살펴본 결과 다행히 가벼운 염좌 정도로 진단이 내려져, 한결 마음을 놓았는데….

“주, 주사요…? 다, 다른 건 없나요?”

방한나가 유독 주사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음…. 주사가 싫으면 약을 도포하는 방법도 있는데. 이건 완치까지 꽤 걸릴 겁니다.”

“어, 얼마나요? 많이 걸릴까요…?”

“대충…. 일주일 정도?”

“…이, 일주일이요!?”

일주일.

당장 며칠 뒤에 토벌이 예정된 상황이기에, 일주일까지 기다릴 여유는 없다.

“주사로 해주세요.”

나는 곧바로 슬쩍 끼어들며 의사에게 주사를 놔달라고 주문했다.

그러자.

“…프, 프로듀서님! 저, 진짜 죽어요…!”

눈물까지 머금어가며 황급히 매달려오는 방한나.

어지간히 주사가 무서운 모양이었다.

‘아니, 탱커가 주사를 무서워해…?’

주사를 무서워하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으나, 앞장서서 무지막지한 괴수를 상대하는 그녀가 겨우 조그만 주사를 무서워한다는 게 살짝 아이러니했다.

“한나야. 며칠 뒤면 토벌인데, 바로 나아서….”

나는 방한나의 손을 꼬옥 붙잡아주며 살살 달래보려고 했지만….

“토, 토벌…. 토벌은…. 으….”

토벌마저도 먹히지 않았는지, 그녀는 선뜻 주사를 맞겠다는 이야기를 꺼내오지 않았고,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생각지 못한 변수에 머리를 긁적이며 울먹거리는 방한나를 바라보던 그 순간.

상황을 지켜보던 의사가 허허 웃으며 말해왔다.

“어… 뭔가, 착각하신 거 같아서 말씀드리는데, 이번엔 주삿바늘 안 씁니다.”

“…네…?”

“비약을 주입할 땐 바늘 없는 주사기를 쓰거든요.”

“!”

설마 했던 무바늘 주사기였다.

“…….”

우뚝 멈춰서며 잠잠해진 방한나는 얼굴을 붉힌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고,

나는 의사에게 인사를 건네곤 방한나와 함께 주사실로 향했다.

*

하루 정도는 푹 쉬라는 간호사의 조언에 따라, 숙소로 돌아가는 길.

드라이브 스루 카페에 들른 우리는, 잠시 차를 댄 채로 달콤한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이야…. 내가 카메라를 들고 있었어야 했는데.”

“…….”

“우리 한나가 바늘을 그렇게 무서워하는지 몰랐어. 조금 귀엽던데?”

“…….”

나는 울고불고 매달리던 방한나가 한 마디도 없이 잠자코 주사 맞는 모습을 떠올리며 그녀를 놀리고 있었는데….

“아마 서원이가 봤으면….”

“프, 프로듀서님…!”

동생 같았던 진서원의 이야기를 꺼낸 탓일까, 방한나가 사뭇 날카로운 눈빛을 띠며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부끄러우니, 그만 놀리라는 의미였다.

‘귀엽네.’

장난스럽게 씩 웃어 보이며 시선을 거둔 나는, 음료를 내려놓곤 사이드브레이크를 풀며 입을 열었다.

“오늘 맘고생 많이 했으니까, 저녁에 맛있는 거 먹자. 소고기 먹을까?”

“…몰라요….”

그렇게 나는 한층 더 방한나와 가까워졌음을 느끼며 그녀를 숙소까지 바래다주었고,

“혼자 올라가도 괜찮겠어?”

“네. 진짜 괜찮아졌어요…!”

“그래. 올라가서 푹 쉬고 있고. 이따 보자.”

“조심히 다녀오세요…!”

비약을 맞고 금방 회복한 그녀를 배웅해 준 뒤에, 곧장 훈련장으로 복귀했다.

“프로듀서님! 오셨어요?”

“고생했다.”

“한나는 괜찮아요?”

“예. 주사 맞고 많이 나아졌어요. 애들은요?”

“부스 잡고 개별 훈련 중이야.”

훈련 일정이 끝나기까지 앞으로 약 1시간.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나는 이참에 한번 환기를 시키자는 생각으로 조기 퇴근을 제안했다.

“어, 진짜?”

“정말요?!”

“이럴 때 쉬어야지, 언제 쉬겠어요.”

김준형과 한규리는 쌍수를 들며 기쁘게 반겨왔고, 멤버들이 세트를 끝내고 나오면 함께 퇴근 준비를 하기로 했는데….

우우웅…… 우우웅……

김나래와 진서원의 훈련을 살피던 도중, 품속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 ㄱ아린이♥ ]

누군가 했더니, 여자친구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 아, 지혁아! 휴우…. 혹시 지금 일 중이야…? ]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임아린의 목소리.

묘한 조심스러움이 실려있는 게, 무언가 문제라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일 중이긴한데…, 무슨 일이야?”

[ 아니, 그냥 네가 아까부터 계속 답장이 없어서….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고…. ]

“아…. 그래? 갑자기 바빠져서 못 봤나 보다.”

나는 임아린으로부터 메시지가 왔었다는 사실에 살짝 놀라고 말았다.

평소 같았으면 적어도 바쁘면 바쁘다 답장이라도 했을 텐데, 오늘은 거의 휴대폰을 보지 않은 것 같았다.

[ 오늘은 언제 퇴근해? 같이 저녁 먹을까? ]

“음…. 오늘은 좀 힘들겠는데. 팀원들이랑 같이 먹기로 했거든.”

정확히는 방한나와 진서원.

팀원은 팀원이니, 거짓말은 아니다.

[ 아…. 그럼 어쩔 수 없지…. ]

임아린은 못내 아쉬운 티를 팍팍 내며 내게 여운을 주었다.

물론 그녀와 시간을 보내는 게 싫지는 않았으나, 할 일이 많아서….

‘…어?’

할 일.

그 순간 머리 한 구석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아! 홍유라!’

홍유라에게 답장을 준다는 걸 까맣게 잊고 말았다는 사실이.

“어…, 아린아. 아무튼, 조금 이따가 만날 수 있을 거 같으면 연락 줄게.”

그렇게 임아린과 통화를 다급히 끊은 후.

나는 반나절이 넘게 잠들어있던 메신저를 열어보았다.

[ ㄱ아린♥ : (23) ]

……

……

‘얘는 무슨 이 만큼이나….’

임아린이 보내온 23개의 메시지 이후로 촤르륵 늘어져 있는 수많은 메시지들.

그 너머로, 홍유라와 나눴던 메시지가 파묻혀 있었다.

‘유라는 이런 거 엄청 싫어하는데….’

나는 홍유라의 역린을 건드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재빨리 메시지를 보내보았다.

[ 나 : 늦어서 미안. 일이 바빠서 답장이 늦었어. ]

[ 나 : 오늘 8시 이후로는 시간이 될 거 같은데. 어때? ]

그리고 잠시 후.

팟-

메시지 옆에 떠있던 확인 표시가 사라졌다.

홍유라가 메시지를 확인했다는 뜻이었다.

“…….”

나는 숨을 죽인 채로 그녀의 답장을 기다렸고….

머지않아 그녀로부터 짧은 답장이 돌아왔다.

[ ㄱ유라 : 됐어. ]

[ ㄱ유라 : 내가 바쁜 사람을 불렀네. ]

[ ㄱ유라 : 그냥 잊어줘. ]

누가 봐도 기분이 나쁜듯한 뉘앙스였다.

‘젠장.’

나는 내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얌전히 그녀에게 양해를 구했다.

[ 나 :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오늘 우리 팀 멤버 하나가 다쳐서 급하게 병원도 다녀오느라 경황이 없었어. 중요한 이야기라고 했으니까, 저녁에라도 보자. ]

국정원이 찾아오는 둥, 방한나가 부상을 입는 둥, 실제로 정신이 없던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내가 잘못한 건 잘못한 것이었기에 저녁 약속이라도 취소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 ㄱ유라 : 됐어. ]

홍유라는 다시 한번 나를 밀어내고 말았다.

이렇게까지 나온다는 건 정말로 마음이 떴다는 뜻.

더 이상 말해봤자 의미가 없었다.

[ 나 : 미안하다. ]

나는 다시 한번 사과를 남기며 메신저를 꺼버렸고,

“프로듀서님!”

때마침 훈련을 끝내고 부스에서 빠져나온 김나래의 부름에 휴대폰을 집어넣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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