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같이 사무실에 앉아 업무를 보던 어느 날.
“스읍…. 으음…”
탕비실을 다녀온 듯,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있던 김준형이 슬쩍 말을 건네왔다.
“뭘 그렇게 생각해?”
“응? 아니, 그냥…. 누구를 데려갈까 싶어서.”
“지리산?”
“응.”
백일 제약의 도움을 받아 다리를 고친 후.
훈련 시간 이후에 따로 재활 기간을 거친 나는, 마침내 지리산 게이트를 들어가기 위한 계획을 잡았다.
상대적으로 위험이 적은 하급 게이트이기도 하고, 토벌이 아닌 단순 탐사 목적이라서 입장 자체엔 큰 문제가 없었는데….
엄연히 나는 공식적인 헌터도 아니고, 따로 출입 자격을 받은 것도 아니었기에, 혹시 모를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동행자가 하나 필요했다.
“제수씨 데려가면 되는 거 아냐?”
아무렇지 않게 커피를 홀짝이며 임아린을 들먹이는 김준형.
나는 아쉬운 마음에 책상을 툭툭 내려치며 부정했다.
“안 돼. 겨우 F급 게이트에 임아린이 들어갔다는 게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냐?”
“…그건 곤란하지.”
국내에 발생한 게이트는 모두 국가에서 관리한다.
그래서 게이트에 출입하기 위해선 의무적으로 신청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게이트 출입에 관한 모든 정보는 법적으로 공개돼있기에, 인터넷에 이름만 검색하면 누가 어느 게이트에 다녀왔는지 쉽게 알아낼 수 있다.
그런데 만약 S급 헌터 임아린이 갑자기 무명 게이트에 출입한다?
아마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순간, 수많은 기자들과 맞닥뜨릴 게 뻔하다.
“그럼, 애들 데려가면 되겠네.”
김준형은 아무렇지 않게 멤버들을 데려가라고 말해왔다.
솔직히 나도 그녀들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꿀 같은 휴일에, 나와 단둘이 먼 지방으로 가는 걸 권하기가 조금 그랬다.
“애들이 싫어하지 않을까?”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눈을 가늘게 뜨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는 김준형.
그런 그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고 슬쩍 되묻자, 그가 어이없다는 말투로 대답해왔다.
“이 새끼, 일부러 이러나…? 네가 한나한테 가자고 하면, 걔가 싫다고 하겠냐?”
“…한나는….”
만약 내가 지리산에 가자고 권유하면, 방한나는 분명 흔쾌히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선뜻 데려가기가 조심스럽다.
방한나는 내게 개인적인 만남을 청해올 정도로 큰 호감을 내비쳐왔다.
아무리 출장 명분이라곤 하지만, 공적인 업무라면 모를까 개인적인 일로 호감을 보여온 그녀를 데려가는 건 조금 양심에 찔린다.
“아니면…. 서원이는 어때?”
“서원이?”
“서원이도 요즘 많이 나아진 거 같던데. 이참에 같이 바람이나 쐬고 오지 그래?”
김준형의 말대로, 요즘 진서원의 행동이 부쩍 달라지긴 했다.
당장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의 입을 열지 않던 그녀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달라진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매번 단답으로 끊어버리던 대화를 조금씩 이어간다거나.
먼저 말을 걸거나 호기심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다가선다거나.
마치 사람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느낌이었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
나는 그런 진서원의 변화를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어쨌든 사이코패스 살인귀 ‘천마’와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는 뜻이었기에.
‘서원이한테 물어보기만 해볼까?’
그날 오후.
방한나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나는 점심을 핑계로 불러낸 진서원에게 슬쩍 운을 떼어봤다.
“서원아. 다음 주말에 출장 갈 거 같은데, 같이 갈래?”
그러자.
“…갈래.”
귀찮아 할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너무나 흔쾌히 권유를 받아들였다.
“…나, 아직 어디 가는지 말 안 했는데.”
아직 행선지조차 말하지 않았음에도 덥석 받아들인 걸 보면, 내 신뢰도가 꽤 높은 모양이었다.
“…어디 가는데?”
뒤늦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행선지를 물어오는 그녀.
무표정한 얼굴에 은근히 묻어나오는 그녀의 귀여움은 아무리 봐도 영 질리지가 않았다.
“지리산에 있는 게이트로 갈 예정이야.”
“…갈래.”
“아니…. 너, 지리산이 얼마나 먼지 알아?”
“……아는데?”
묘하게 한 박자 늦은 대답.
분명 모르는 눈치였다.
“…여기서 차 타고, 한 세 시간은 달려야 해. 아마 아침에 가긴 할 거 같은데, 그날 못 올 수도 있어.”
“…그럼, 하룻밤 자고 오는 거야?”
“그럴 수도 있다는 이야기야.”
물론 그럴 확률은 낮다.
이번 행선지는 괴수조차 거의 나타나지 않는 매우 안전한 게이트.
꿈속에서 본 ‘폭포’를 찾는 게 문제긴 하지만, 이미 공개된 정보에 의심되는 부분이 있어서 꽤 금방 찾지 않을까 싶다.
“…갈래.”
진서원은 모든 이야기를 듣고도 반드시 따라가겠다며 의지를 보여왔고,
“진짜 괜찮아?”
나는 외려 그런 그녀의 반응이 걱정되어 몇 번이나 되물었다.
“하루 종일 차 타고, 피곤하지 않겠어?”
“…오빠는, 내가 같이 가는 게 싫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갈래.”
결국, 지리산 게이트는 진서원과 함께 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
도지혁과 짧은 식사 데이트를 마친 뒤.
풀썩─
집으로 돌아온 진서원은, 침대에 몸을 뉘며 곰곰이 머리를 굴려보았다.
“…….”
갑작스러운 장거리 출장 제안.
그것도 다른 사람 없이, 오직 둘이서.
심지어 ‘외박’에 관한 여지조차 남겨두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냥 대놓고 하자는 의미였다.
꿀꺽─
진서원은 묘한 흥분감에 군침을 삼키며 재빨리 몸을 돌려 눕곤, 휴대폰을 꺼내어 ‘인경 언니’라고 저장된 윤인경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 언니 바빠? ]
드문 환경에 더불어 천성적으로 여러 가지가 부족한 진서원이지만, 그렇다고 머리가 느린 편은 아니었다.
그녀는 앞서 여러 차례 겪어온 일련의 사건들 덕분에 자신이 아직 모르는 게 많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고,
항상 자신의 판단이 옳은지 확인하고자 ‘믿을만한 사람’에게 자문했다.
[ 인경 언니 : 아니 손님 없어서 그냥 청소하고 있었어 ]
이윽고 날아온 윤인경의 답장.
진서원은 어느덧 능숙해진 타자로 빠르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오빠가 다음 휴일에 출장 가자고 해서 가기로 하는데 ]
그러자….
우우웅─ 우우웅─
답장 대신, 곧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 정말이야?! 지혁 씨가 같이 출장 가자고 했다고!? ]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잔뜩 흥분한 윤인경의 목소리.
한창 진서원과 도지혁의 관계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그녀로선 동반 출장 소식에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어디로? 얼마나 길게 가는데? ]
“…그게….”
최대한 흥분감을 가라앉힌 진서원은 차분하게 객관적으로 상황을 설명하였다.
도지혁이 함께 점심을 먹자고 불러냈으며,
점심을 먹던 도중에 출장 제안을 들이밀어 왔고,
거리도 멀고, 때에 따라선 1박 2일짜리 출장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해왔다고.
[ 미친…. ]
그렇게 모든 설명을 듣게 된 윤인경은 단 한 마디로 상황을 평가했다.
[ 하자는 거네. ]
도지혁이 자자는 말을 돌려서 표현한 게 분명하다는 말이었다.
“…그럴까?”
[ 그게 아니면,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인 거지! ]
물론 이는 진서원이 고백을 받았다는 걸로 알고 있던 윤인경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역시 그렇구나….’
착각에 빠진 건 진서원도 마찬가지였다.
‘…오, 오빠가…, 나랑….’
자신의 의견이 틀리지 않았음에 덜컥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 진서원.
그녀는 무심코 양쪽 허벅지를 꿈틀거리며 조심스레 의견을 구해보았다.
“…그럼, 어떻게 해?”
매일 밤 시청해온 ‘자극적인 교육 영상’의 영향을 받아, 이미 그녀의 머릿속엔 온갖 판타지로 가득 찬 상태.
사실상 처음 연애를 시작한 고등학생이나 다름없었는데….
“…튕겨?”
[ 아냐, 절대 튕기지 마. 여기서 빼면 진짜 끝이야. ]
다행이 연애 경험이 다분한 윤인경은 이 분야의 스페셜 리스트.
누구보다 오랫동안 진서원을 지켜봐 온 그녀는, 진서원의 성격에 맞춰 매우 적절한 조언을 해줄 수 있었다.
[ 그냥 지혁 씨가 이끄는 대로 얌전히 따라가기만 해. ]
“…왜?”
[ 너 분위기 잡을 줄 알아? ]
“…아니.”
[ 그래서 그래. 괜히 분위기 망치면 서로 곤란하니까, 눈치껏 따라가기만 해. 이번엔 그냥 먹혀주란 말이야. ]
“…….”
진서원은 노골적인 발언에 내심 부끄러워하며 입을 다물어버렸고,
마치 제 일인 것처럼 흥분한 윤인경은 사뭇 비장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 근데 너도 멀뚱멀뚱 가만히 있으면 안 돼. 하고 싶은 뉘앙스를…. 그러니까, 할 마음이 있다는 걸 계속해서 표현해야 한다는 말이야. ]
“…어떻게?”
[ 뭐, 끈적한 스킨십을 한다거나, 눈빛을…. ]
진서원은 어젯밤 일본 자료에서 보았던 장면과 서양 자료에서 보았던 장면을 떠올렸다.
‘끈적한 스킨십….’
물론 윤인경이 말한 스킨십과는 매우 다른 느낌이었지만….
[ 이해했어? ]
“…응.”
그 사실을 모르는 진서원은, 자신이 제대로 이해했으리라 굳게 믿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같은 시각.
설주희의 집.
설주희를 돌보기 위해 아예 합숙을 시작한 홍유라는, 자신의 방에 누워 천화 그룹의 자료를 살피고 있었다.
‘임아린…. 걔가 왜….’
홍유라는 사망한 박정석과 만난 임아린의 행적을 수상쩍게 여겼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임아린과 박정석이 따로 만날 이유가 없었기에.
심지어 두 사람이 만난 건 박정석이 죽기 하루 전.
누가 봐도 이상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임아린이 박정석을…? ’
홍유라는 임아린이 박정석을 죽인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었다.
그러나.
‘…아냐, 그럴 리 없어….’
이내 의심을 접고 말았다.
임아린이 살인을 저질렀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아….”
그렇게 홍유라가 알 수 없는 의문에 빠져있길 얼마나 지났을까.
? ♪ ♬ ♩
화장대에 놓여있던 그녀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
화장대에 놓인 건 홍유라의 개인 휴대폰.
애초에 번호를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 개인용 휴대폰이었다.
‘누구지?’
홍유라는 물음표를 띠며 휴대폰을 확인해보았다.
[ 김노아 ]
상대는 흥신소를 운영하는 김노아였다.
뜬금없는 그녀의 전화에 고개를 갸우뚱하던 홍유라는 바로 전화를 받아보았고,
“여보세요?”
[ 유, 유라 님! 다행이다, 받으셨구나…! 아무래도 빨리 와보셔야 할 거 같아서… ]
“갑자기 무슨…….”
순간 이어진 그녀의 설명에 표정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누가요?”
뭔가 심각한 일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