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술을 받은 후, 몇몇 추가적인 검사까지 모두 마친 뒤.
“축하해요. 마음 같아선 축하주라도 한잔하고 싶은데, 아직 볼일이 조금 남아서 저녁은 다음에 같이 먹어요.”
할 일이 남았다는 백유진에게 여러 가지 선물을 받아 연구실을 빠져나오자, 어느덧 하늘에 짙은 노을이 깔린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꽤 오래 걸렸네.’
그렇게 맡겨두었던 차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이.
나는 왼쪽 다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
마치 원래 내 다리였던 것처럼 아무런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사실 시술을 안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아직은 잘 모르겠네.’
솔직히 검사 결과와 다리의 상태를 똑똑히 지켜보긴 했지만, 제대로 실감이 나진 않았다.
아예 다리가 없었더라면 모를까, 크게 달라진 점을 찾지 못했기에.
사실 시술을 받기 전에도 일상생활을 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살짝 쉽게 피로해지고, 날이 안 좋을 때마다 시큰거리는 정도?
무리하게 마력을 퍼부으며 움직이는 게 아니면 크게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역시, 직접 확인해보는 게 낫겠지.’
내가 시술을 받아들인 건 직접 전투에 나서기 위함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부상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
아무리 다리가 멀쩡하다 하더라도 결국, 내가 극복해내지 못하면 다리를 고친 이유가 없다.
‘훈련장에 들러봐야겠다.’
이내 다리가 제대로 나았다는 걸 직접 확인하기로 한 나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어 임아린에게 시술이 끝났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 나 이제 나왔어 ]
그리고는 훈련장에 잠시 들렀다가 집으로 가겠다는 말과 함께, 축하주라도 한잔 마시자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 좋은 날이니까 좋은 술로 사 갈게 ]
“손님. 맡겨 주셨던 차 대기시켜놓았습니다.”
그때, 주차돼 있던 차를 꺼내온 직원이 내게 차 키를 건네왔고,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겠지.’
나는 그대로 차 키를 받아, 곧장 훈련장으로 향했다.
*
어두컴컴한 방안.
“…….”
싸늘한 표정을 띤 임아린은 막 날아온 도지혁의 메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좋은 날이니까 좋은 술로 사 갈게 ]
좋은 날.
분명 별 의미가 담기지 않은 단어였으나, 임아린은 유독 ‘좋은 날’이라는 단어가 눈에 거슬렸다.
‘…어쩔 수 없는 건가….’
임아린은 도지혁의 다리가 평생 낫지 않기를 원했다.
아니, 될 수 있다면 아예 바깥으로 돌아다니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다리를 고쳐버리면, 분명히 앞으로 벌어질 전투에 직접 나설 게 뻔했기에.
“…….”
임아린은 오래전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가던 도지혁의 기억을 끄집어내 보았다.
마왕을 물리치고자 끝내 자신의 목숨을 바쳐버린 그의 모습을.
지금은 존재하지 않게 된 역사이지만….
이따금 떠올릴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로 참 쓰라린 기억이었다.
“…지혁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봤던 임아린은 두 번 다신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검을 쥐지 않도록, 직접 싸우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도록 끝없이 바람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도지혁은 마치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처럼 여지없이 검을 쥐었고,
임아린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다리를 망가뜨려 버렸다.
실수를 가장한 일격.
이제 막 잠재력을 꽃 피운 도지혁의 다리를 부수는 건 매우 쉬운 일이었다.
물론, 그 선택이 두 사람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한 사람은 전투에 나설 수 없을 정도로 큰 트라우마를 겪게 됐으며,
한 사람은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것에 큰 죄책감을 품게 됐기에.
그러나….
임아린은 결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또다시 역사를 반복할 게 분명했으니까.
분명 도지혁은 ‘황제’라는 거창한 이명과 함께 수준급 헌터로 승승장구했을 것이고,
너무나 매력적이고 능력 있는 여성들을 홀리고 다녔을 것이며,
결국, 소꿉친구와 임신이라는 명분을 앞세운 설주희에게 뺏기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임아린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아니, 그 사건을 계기고 더더욱 마음을 독하게 먹기 시작했다.
마왕의 침공까지 약 11년.
임아린은 도지혁을 지켜내기 위한, 동시에 스스로의 사랑을 지켜내기 위한 ‘완벽한 플랜’을 구상했다.
그동안 도덕적인 이유로 행하지 못했던 ‘나쁜 짓’들을 마음껏 저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어쩔 수 없었어….’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쉽다고 하던가.
그녀는 매번 자신의 행동에 ‘사랑’이라는 면죄부를 기워내며 합리화를 이어나갔고,
어느덧 생명을 앗아버리는 일조차도 무디게 느껴지는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다.
결국, 여기까지 와버리고 만 것이다.
톡─ 톡톡─
모니터로부터 시선을 거둔 임아린은, 무심한 얼굴로 손가락을 움직여 도지혁에게 답장을 보냈다.
[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 ]
[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와! 훈련 조심히 하고…! ]
평소였다면 싱글벙글 웃으며 메시지를 보냈겠지만….
차마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툭─
그렇게 답장을 마치고 휴대폰을 내려놓은 임아린은, 시선을 옮겨 탁상 위에 올려진 작은 달력을 바라보았다.
[ 주의! 가임기 돌입! ]
오늘은 때마침 가임기에 접어드는 날.
그 어느 때보다 확실히 도지혁을 붙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사실 굳이 애를 낳아, 도지혁의 사랑을 나눠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
‘딸만 아니면 된다’라고 생각하며 곧장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특별한 날이니, 그만큼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하기 위해서.
*
웅성웅성…… 웅성웅성……
‘이 시간에도 사람이 꽤 많네.’
저녁 시간이 지났음에도, 훈련장엔 꽤 많은 헌터들이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사실 능력이라는 게 훈련하는 만큼 성장하는 것이니, 이렇게 열심히 해야 하는 게 맞겠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 팀이 참 보기 드문 케이스긴 하다.
“음…. 이 정도면 쓸만하네.”
딱히 맞춰둔 전투복이 없던 나는, 적당히 공용 전투복과 연습용 무기를 대여받았다.
나름 좋은 훈련장이라 그런지, 꽤 고급 브랜드의 제품들을 대여해주었다.
‘슬슬 해볼까.’
그렇게 가벼이 워밍업을 뛰며 굳어있던 몸을 푼 뒤.
묘하게 들뜬 발걸음으로 훈련 부스에 들어선 나는, 안쪽에 달린 패널을 조작하여 훈련 상황을 세팅하였다.
[ 더미 레벨 : A랭크 ]
훈련 로봇의 레벨은 A랭크.
우리 멤버들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이다.
삐이이이익──
시작 버튼을 누르자, 이윽고 부스 내부에 울려 퍼지는 비프음.
나는 부스 중앙으로 다가가, 깊은 심호흡을 내쉬곤 천천히 검을 치켜들었고,
‘…이건 실전이다….’
지그시 눈을 감곤 끝없이 자기 세뇌를 반복하여, 억지로 트라우마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후우….”
그렇게 뇌리에 새겨진 고통을 쿡쿡 쑤셔가며, 끊임없이 혼란을 일으키던 그때.
주룩─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흘러내린 순간.
살벌한 기계 소리와 함께, 훈련 로봇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키이이이이이잉─────!
“!”
응축했던 마력을 폭발시킨다.
후우우우웅────!
온몸을 감싸는 기분 좋은 활력.
아낌없이 마력을 퍼부으며 자세를 잡은 나는, 달려드는 로봇을 피해 높이 뛰어올랐다.
타앗─!
콰아아앙────!
맨땅을 내려찍은 로봇은 뒤늦게 나를 찾아 머리를 높이 치켜들었고,
‘가볍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외려 가볍게 느껴지는 다리의 감각에 무심코 미소를 지으며 검 끝을 겨누었다.
“하아아앗───!”
그렇게 계속해서 이어진 훈련.
“으아….”
몇 번의 훈련 끝에 녹초가 되어 부스를 빠져나온 나는, 벤치에 풀썩─ 기댄 채로 왼쪽 다리를 흘끔 바라보았다.
“…….”
평소 같았으면 이미 새빨갛게 부어올라서 퍽 무겁게 느껴져야 하는데….
하나도 붓지 않았을뿐더러 딱히 불편한 점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짜 다 나았구나….’
감동이 잔잔하게 밀려온다.
나는 다리가 다 낫게 되면, 감정이 벅차올라 눈물이라도 펑펑 흘릴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다 나았다는 걸 실감했음에도, 눈물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마음 한구석에 놓여있던 커다란 바위가 사라진 것처럼, 후련함만이 시원스레 느껴질 뿐이었다.
“…인생…. 쯧….”
묘하게 싱숭생숭한 마음에 괜히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며 휴식을 취하고 있을 무렵.
우웅─ 우웅─
벤치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에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메시지가 온 것 같았다.
‘아린이인가?’
나는 곧바로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의 주인을 확인해보았다.
[ ㄱ아린이♥ ]
아니나 다를까, 역시 임아린이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었는데….
[ 사진 ]
뭘 찍어 보낸 건지, 메시지 대신 ‘사진’ 표시가 떠 있었다.
“……?”
나는 별생각 없이 메신저를 열어 그녀가 보내온 사진을 확인해보았고,
“…허….”
[ ㄱ아린이 : 축하 이벤트 준비 중♥ ]
짧은 메시지와 함께 떠오른 한 장의 사진에 나지막이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사진 속 임아린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촬영하고 있었는데,
대체 언제 준비한 건지, 차마 옷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노골적인 의상을 입고 있었다.
‘갑자기 또 이런 예쁜 짓을….’
나는 그런 그녀의 갑작스러운 이벤트가 썩 싫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기쁘게 해주려고 하는 게 너무나 기특해서, 당장이라도 달려가 꽉 안아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 나 : 금방 갈게 ]
그대로 곧장 가겠다는 답장을 남긴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탈의실로 향했고,
‘오늘은 무조건이다.’
특별한 날이니, 도구 없이 밤새 거사를 치르리라 마음먹으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물론 평소 같았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매우 위험한 생각이지만….
누가 뭐래도 오늘만큼은 괜찮았다.
백일 제약의 베스트셀러, 남성용 피임약을 잔뜩 얻어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