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방한나의 뜬금없는 권유에 잠시 넋을 놓았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곤 평정심을 유지하며 그녀를 좋게 타일러보았다.
“한나야.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지,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그런데.
“들어가요오…! 오빠도 힘들잖아요오…!”
“오, 오빠…?”
이제는 아예 호칭까지 멋대로 바꿔가며 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오빠는 제가 오빠라고 부르는 거 싫어요오…?”
양손으로 팔을 붙들곤 입술을 삐죽이며 조심스레 물어오는 방한나.
술에 취해서 그런 걸까.
유독 그녀가 귀엽게 느껴져서 살짝 두근거림을 느끼고 말았다.
“그, 싫은 건 아닌데….”
“그러엄…. 이제 앞으로 둘이 있을 때마다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오…?”
“…어?”
그야말로 산 넘어 산.
방한나는 잔뜩 기대에 부푼 듯, 두 눈을 반짝이며 새로운 호칭을 요구해왔다.
‘이걸 받아줘도 되나…?’
원래라면 개인적으로 관계를 쌓는 건 주의해야 하는 게 맞다.
개인적인 친분이나 감정이 섞이면 필시 문제가 생기기에.
지금껏 퀸즈가 무난하게 달려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와 비슷한 거리를 유지해온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좀 특수한 경우다.
‘…어차피 기억도 못 할 텐데….’
방한나의 필름이 끊겼음을 확신한 나는, 그녀가 이번 일도 기억하지 못하리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까짓 거, 오빠라고 부르고 싶으면, 얼마든지 불러!”
“와아!”
“그러니까, 오빠 말 듣고….”
그 순간.
꾸우우우욱───
잠시 방심한 틈을 타, 그녀가 나를 모텔 입구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야, 야!”
화들짝 놀란 나는, 몸에 힘을 주며 그녀에게 저항하려 했지만….
‘아니, 뭐 이리 쎈 거야!?’
그녀는 예상치 못한 괴력을 선보이며, 내 몸을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하, 한나야! 잠깐…!”
체급 차이를 무시하고 질질 끌려간 나는 그대로 모텔 입구까지 다다르고 말았고,
“방한나!”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머리를 콩! 쥐어박으며 강제로 멈춰 세워버렸다.
“아으…. 오빠가 때렸어….”
외려 억울하다는 듯 정수리를 감싸며 울먹거리는 그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던 나는, 모여드는 시선을 무시한 채로 그녀를 훈계하기 시작했다.
“너,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싫다는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가?”
“아니이…. 나는, 그냥…. 힘드니까….”
“힘들면 집에서 쉬면 되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애도 아니면서, 내가 나쁜 마음 먹고 따라갔으면 정말 어쩌려고 그래?”
“…….”
방한나는 입을 꾹 다문 채로 바닥을 바라보았다.
마치 잘못한 걸 알면서도 인정하기 싫은 아이 같았다.
“…하아….”
뒤늦게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과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의 모습에 살짝 회의감을 느낀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곤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집에 가자. 바래다줄게. 원래 너 혼자 보내려고 했는데…. 하는 거 보니까, 안 되겠다.”
“…….”
“따라와.”
“…네에….”
방한나는 비틀비틀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미련이 남은 듯 계속 모텔 입구를 흘끔거렸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던 나는, 혹시 그녀가 특별한 감정이라도 품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빠아…. 그…. 화 많이 났어요오…?”
“응. 엄청.”
“으…. 잘못했어요오…. 그냥…. 나는 오빠랑 더 친해지고 싶어서어….”
이윽고 내 착각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홀로 생활하고 있는 방한나가 의지할만한 곳은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몇 없는 대학 친구들뿐인데….
그마저도 팀에 출근하기 시작하며 만나기 어려워졌다고 하니, 가까운 나에게라도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좀 안쓰럽긴 하네.’
사실 이건 방한나가 진서원이나 김나래와 더 가까워지면 충분히 해결될 문제다.
물론 두 사람이 살가운 성격은 아니라서 조금 고전하긴 하겠지만….
그때까지만 좀 신경 써주면 잘 해결될 것이다.
“…방한나.”
그렇게 택시를 기다리는 사이, 나는 방한나를 앞에 세워놓고 눈을 마주치며 목소리를 깔며 으름장을 놓았다.
“또 그럴 거야?”
“네…?”
“또 그럴 거냐고.”
그녀는 그새 술기운이 살짝 가신 듯 정신을 차린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아, 안 그럴게요…!”
“진짜로?”
“네…! 정말요…!”
“믿는다?”
“믿어주세요…!”
“…그럼, 손가락 걸고 약속해. 다시는 그러면 안 돼?”
“…네, 넵…!”
그 모습도 꽤 귀엽게 느껴져서,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녀를 용서해주고 말았다.
*
같은 시각.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든 설주희는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설주희…! 너, 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주희야…. 우, 우리는…? 우리는 그럼 어떡하라고…?”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도지혁과 사귀고 있음을 밝힌 뒤, 홍유라와 임아린에게 책망받는 꿈이었다.
“네가, 네가 약속했잖아…! 다, 다 같이 결혼해서…! 다 같이…!”
“…아린아. 내가 설명했잖아. 지혁이가 도망 못 가게, 먼저 결혼하는 거라고. 지혁이 노리는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는 네가 더 잘 알잖아.”
“설주희.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어떻게 그걸 변명이라고 할 수가 있어!”
“목소리 높이지 마, 유라야. 나도 좋아서 이러는 게 아니잖아…! 애가 생겨서 어쩔 수 없이….”
“설주희!!!”
꿈은 말 그대로 악몽 그 자체였다.
설주희는 친구들 몰래 임신한 쓰레기가 돼 있었고, 친구들은 그녀를 졸렬한 배신자로 취급하고 있었다.
“너희도 지혁이한테 임신시켜달라고 하면 되잖아!!!”
“입 닥쳐! 비겁한 계집애…. 우리를 그렇게 기만해놓고, 뭐가 어째?”
“흑…. 나는…. 끅….”
바닥에 주저앉아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 임아린과 거칠게 다투는 두 사람.
“…네가 지금까지 해온 짓. 지혁이한테 전부 다 말할 거야.”
“홍유라. 진짜 적당히…!”
“네가 지혁이한테 몰래 약 먹인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뭐?”
“우릴 비참하게 만들고 혼자 지혁이랑 놀아나니까 재밌었지? …너도 똑같이 당해봐.”
“홍유라, 거기 서. 홍유라!!!”
그렇게 설주희가 임아린을 뒤로한 채 홍유라를 따라나선 순간….
“!”
잠에서 깨어난 설주희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꾸, 꿈인가…?’
마치 조금 전에 겪었던 것처럼, 너무나 현실성 넘치는 꿈이었다.
‘무, 무슨 이딴 꿈이 다 있어….’
그녀는 이마에 흐른 식은땀을 슥─ 닦아내곤, 여전히 쿵쾅쿵쾅 뛰어대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는데….
“하아….”
왠지 모르게, 꿈속에서 나눴던 대화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마치….
그녀에게 경고를 보내는 것처럼.
*
며칠 뒤.
여느 때와 같이 이어진 훈련 시간.
“서원아. 허리를 더 낮추고, 더 돌리면서 주먹을 내질러야지.”
“…이렇게요?”
나는 진서원에게 천마신공과 연관된 몇 가지 초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후웅─
“주먹 끝에 힘이 너무 실렸잖아. 조금 더 가볍게. 툭.”
“…가볍게….”
진서원은 설주희와 똑같이 권법 위주의 초식들을 익히기로 했다.
검 같은 무기를 쓰는 종류의 무공이 없던 건 아니었으나, 천마신공이 지닌 압도적인 파괴력과 효율을 높이기 위해 권법을 택했다.
“으음…. 안 되겠다. 이건 내가 자세 다시 잡아 줄게.”
나는 진서원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허리를 지그시 누르곤 팔꿈치를 붙잡으며 설명했다.
“이렇게, 이런 식으로 허리가 더 돌아가야 해. 이해했어?”
“…네.”
진서원은 영 익숙하지 않은 듯 보이면서도 곧잘 훈련을 따라왔는데, 아무래도 기본적으로 지닌 재능이 있다 보니, 흔히 말하는 재능빨을 좀 타는 거 같았다.
“…저…. 잠시 볼일 좀….”
“아. 다녀와.”
한가지 신기한 점은, 설주희를 가르쳤을 때처럼 그녀도 하루에 3, 4번도 넘게 화장실을 들락날락한다는 것.
처음엔 그냥 신진대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볼일을 자주 보는 줄 알았는데….
“…왔어요.”
“그…. 괜찮아?”
“…네?”
“아니, 얼굴이 엄청 빨개서…. 숨도 좀 거친 거 같고.”
“…괜찮은데요.”
화장실에서 돌아올 때마다 마치 거사라도 치르고 온 사람처럼 잔뜩 상기돼 있어서, 설주희와 같은 증상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공 쪽 능력이 뭐 그런 게 있나?’
“아무튼…. 다시 시작해보자.”
“…네.”
그렇게 훈련은 계속되고.
‘슬슬 팀 단위로 넘어가도 되겠는데?’
훈련장에 딸린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때우며 팀원들의 수준을 체크하던 나는, 오후엔 간단한 팀 단위 훈련을 진행해 보기로 결정했다.
“팀 단위 훈련이요…?”
“팀 단위면…. 다 같이 하는 건가요?”
“맞아. 언제까지 개인 훈련만 이어갈 순 없잖아?”
팀 단위 훈련은 개인 훈련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대신 혼자가 아니라, 다 같이 부스에 들어가서 더미 로봇을 상대하면 되는 것이다.
“일단 호흡만 좀 맞춰보자. 따로 지시는 안 내릴 테니까, 너희끼리 상대해봐.”
나는 곧바로 세 사람을 한 부스에 몰아넣곤 D등급에 맞춰 더미 로봇을 작동했다.
키이이이잉───
로봇이 음성을 흘리며 세 사람을 바라보자, 부스 속 세 사람이 그동안 각자 익혔던 대로 얼추 대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다들 제 뒤로 오세요!”
선봉은 탱커인 방한나.
방패를 치켜든 그녀가 앞장서서 더미와 마주하자, 상대를 인식한 더미가 신호를 보내며 달려들었다.
키이이이잉────!
쿵──!
같은 D등급 수준의 공격이었으나, 훈련을 거듭해온 방한나에겐 그리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했고,
“나래 언니!”
“가라앗…!”
공격이 막혀버린 더미가 주춤거리는 사이, 방한나의 오더를 받은 김나래가 정령을 다루어 불덩이를 쏘았다.
후우우우우욱── 파아아앙──!
키이이이이잉────
불길에 휩싸여 허둥거리기 시작한 더미.
“서원아!”
앞으로 튀어 나가 더미의 주의를 끌던 방한나는 곧바로 진서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타아앗──!
진서원은 기다렸다는 듯 더미의 옆구리로 파고들어 내공을 담은 주먹을 날렸고,
파아아앙───!
삐이이이이이───
파공음과 함께, 더미가 다운됐음을 알리는 비프음이 들려왔다.
무려 첫 시도에 D등급 훈련용 로봇을 깔끔하게 쓰러뜨린 것이다.
“어…. 쓰러뜨린 건가…?”
“그런 거 같은데…?”
정작 부스 안의 그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한지 모르는 듯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누가 가르쳤는지 몰라도, 진짜 제대로 가르쳤네.’
나는 생각보다 준수한 그녀들의 실력에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