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15화 (15/165)

“죄송합니닷!!”

나는 현관을 열자마자 넙죽 엎드리며 머리를 조아리곤 사과를 건네오는 방한나의 행동에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어요…! 제, 제발 자르지만 말아 주세요!”

“저…. 한나야. 괜찮으니까. 어서 일….”

“진짜 시키는 건 다 할게요…! 딱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콩─!

아무리 장판이라고 하지만, 망설임 없이 바닥에 머리를 찧어대는 방한나의 행동에 무심코 뒷걸음질쳐버린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녀가 원할만한 답을 던져주었다.

“알았어! 용서해 줄게.”

그러자 방한나가 퍼뜩 고개를 들더니, 마치 목숨이라도 빚진 사람처럼 침을 꼴깍 삼키며 조심스레 되물어왔다.

“…지, 진짜요…?”

촉촉하게 젖은 초록색 눈동자와 불그스름하게 물든 이마.

그녀가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보여주는 듯했다.

“용서하지 말까?”

“아, 아뇨!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그럼 어서 일어나. …옷도 좀 털고.”

“…네, 넵…!”

잽싸게 몸을 일으킨 방한나는, 내 말을 따라 몸의 먼지를 꼼꼼하게 툭툭 털기 시작했는데….

‘아니, 이러고 여기까지 왔다고…?’

나는 뒤늦게 눈에 들어온 그녀의 모습에 또 한 번 당황하고 말았다.

옷차림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무난한 단색 티셔츠에 돌핀팬츠라는 평범한 조합으로 꾸며져 있었기에.

그러나….

그녀의 몸매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분명 펑퍼짐한 디자인이었을 티셔츠는 그녀의 압도적인 계곡에 들려 허리가 슬쩍 드러났고, 바닥에 엎드렸던 탓에 돌핀팬츠도 죄다 말려서 뽀얀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다, 다 했어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조심스레 말을 걸어오는 그녀.

무방비하다는 말이 이렇게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녀의 옷차림에 대해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일부러 보란 듯이 티셔츠를 정리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속은 좀 괜찮아?”

그러자 그녀가 아차 싶었다는 듯 자신의 옷매무새를 다급히 매만지더니, 한껏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마구 끄덕여왔다.

“해장은? 내가 사뒀던 숙취해소제는 마셨어?”

“어…. 아,, 아뇨….”

머리카락도 아직 덜 마른 게, 분명 일어나자마자 대충 씻고 와버린 것 같다.

그만큼 급했다는 뜻이겠지.

‘얼마나 불안했으면….’

새삼스레 그녀가 딱하게 느껴진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짧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럼, 라면이나 먹고 가.”

*

같은 시각.

면담을 마치고 사무실을 빠져나온 홍유라는, 설주희와 함께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온몸을 던진 구석일의 필사적인 부탁으로 간신히 물러난 설주희는,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한 채 씩씩거리며 신경질을 부리고 있었는데….

“절대 가만 안 둬…. 반대쪽 다리도 부러뜨려버려서, 아주 못 걸어 다니게…!”

그런 설주희의 모습에, 홍유라는 더더욱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뭔가 이상해….’

홍유라는 이번 일이 어딘가 의심쩍다고 생각했다.

도지혁 인성을 떠나, 걸리는 점이 한둘이 아녔기에.

홍유라는 이번에 날아온 동영상이 마치 누군가를 유도하는 것 같다고 느꼈는데, 실제로 폭로에 가까웠던 이전 동영상과는 달리, 무언갈 암시하는 듯한 내용이 많았다.

예를 들면, 도지혁이 세진 길드에 합류할 예정이라고 말했던 것부터가 그렇다.

현재 도지혁은 이미 팀 서울시청에 소속돼있다.

그냥 소속만 돼 있는 게 아니라, 최근 서울시장인 이상흠과 직접 면담하여 앞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았다는 기사까지 뜬 상황.

곧 팀을 옮길 사람이 보인 행보라기엔 너무나 적극적이었는데,

동영상에선 세진 길드를 언급하며 이적을 암시하더니, 같이 있던 여성의 부정적인 반응으로 은연중에 동영상이 보내진 목적까지 드러냈다.

이로 인해 언젠가 도지혁이 세진 길드로 합류하게 될 거라 생각하게 됐으며, 세진 길드 단장 이혜리와 도지혁의 관계가 확신의 쐐기를 박아주었다.

즉, 동영상의 내용은 ‘도지혁의 복잡한 여성 관계’라는 자극적인 이야기로 가려져 있었으나….

의심이 의심을 낳게 하며 사고를 유도하는 교묘한 연출들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던 것이다.

‘…내가 착각했을 수도 있어….’

홍유라는 자신이 과대하게 해석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놓치지 않았지만, 그녀가 느낀 이상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구석일이 보인 애매모호한 태도에 의문을 품었다.

그는 혼자 처리할 순 없다는 이유로 모두를 불러 모아 동영상을 공유했는데, 정작 공식적으로 성명문을 발표하고 법적 조치를 취하라는 의견엔 매우 보수적인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설주희가 직접 나서겠다고 하니, 기겁하며 그녀를 말리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분명 아린이 눈치를 봤어.’

구석일이 무의식적으로 임아린의 눈치를 살핀 걸 목격한 홍유라는 더더욱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주희야. 좀 이상하지 않아?”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한 홍유라는 설주희에게 의견을 물으려 했는데….

“이번 일,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아. 뭔가 이상한 거 같….”

“이상한 건 도지혁이겠지.”

“…어?”

도지혁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에 눈이 돌아간 설주희는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 새끼가 우리를 배신하지만 않았어도 이럴 일은 없었어. 뭐? 임신을 시켜? 발정 난 개새끼도 아니고…!”

퀸즈의 멤버 중에 가장 몸이 달아있고 질투심이 심하던 설주희는, 문란한 도지혁의 행태에 유독 민감히 반응했다.

동영상에 눈가림으로 깔려있던 ‘자극적인 키워드’에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

설주희와 의논하는 건 힘들 것 같다고 판단한 홍유라는 조용히 입을 다물어버렸고,

왼쪽 검지에 끼워진 우정 반지를 매만지며, 임아린의 제안으로 맺었던 약속을 떠올렸다.

‘무조건 처음은 다같이. 알았지?’

‘응! 꼭 셋이서 함께 하는 거야…!’

‘아무리 급해도 새치기하면 안 된다?’

도지혁과의 첫 경험은 반드시 다 함께 나누기로 다짐했던 그날을.

*

“우움…!”

나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로 행복한 표정을 짓는 방한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머리카락도 금발이라 그런가, 꼭 욕심 많은 햄스터를 보는 것 같았다.

“맛있어?”

“우움!”

언제 그랬냐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오는 그녀.

나는 남은 라면을 양보하기 위해 젓가락을 슬쩍 내려놓곤 조용히 물을 홀짝였다.

‘이 귀여움이 끝까지 갔으면 좋겠네.’

방한나는 장차 A랭크 헌터가 될 몸이다.

외모도 훌륭하고, 차별화된 특징도 있으니, 아마 톱10위급 순위권 팀에 뽑혀 갈 가능성이 높은데, 그 정도 팀에 뽑혀가면 지금의 삶과는 아예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스타성이 없는 순위권 헌터조차 억 소리 나는 명품 브랜드들이 협찬을 위해 줄을 서는 시대에, 스타성 충만한 방한나는 어떻겠는가?

아마 더 이상 헌터로서 일하지 않아도 될 수준의 돈을 벌게 될지도 모른다.

‘설주희가 이 세상을 잘 지켜준다면 말이지.’

보통 그렇게 큰돈을 벌면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다.

설주희가 그랬고, 부잣집 아가씨였던 홍유라도 그랬으며, 유일하게 임아린만이 덜 변한 축에 속했다.

명품 브랜드라곤 이름조차 모르던 그녀들이 온몸에 명품을 두르기 시작했고, 꾸미기보다 훈련하는 걸 좋아하던 그녀들이 어느 새부터 전문샵에서 관리를 받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성장할 만큼 성장했고, 모두 제 손으로 이룬 것들이기에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이따금, 순수하던 그녀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

“후우…. 잘 먹었습니다!”

어느새 라면을 모두 먹어치운 방한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배를 통통 두드렸다.

나는 웃음이 절로 나오는 그녀의 모습에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곧장 그릇과 냄비를 치우려고 했는데….

“어어! 제가 할게요!”

방한나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들고 있던 그릇과 냄비를 빼앗아버렸다.

“이 정도는 내가 해도 괜찮은데.”

“아니에요…! 제가 하게 해주세요…! 가만히 있다간, 정말 돼지가 돼버릴 거예요!”

방한나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귀를 쫑긋 세운 강아지 같은 느낌.

아니, 강아지보다는 크려나?

“…그럼, 맡겨볼까?”

“넵…!”

그렇게 방한나가 앞치마를 차려입곤 싱크대 앞에 선 사이, 나는 식탁에 앉아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흐흐흥….”

무엇이 그리 기쁜지, 방한나는 콧노래와 함께 몸을 살랑살랑 흔들어가며 그릇을 닦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뭔가 알 수 없는 기분이 뭉클하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

사실 누군가 우리 집에서 살림을 해주는 게 썩 어색한 일은 아니다.

퀸즈에서 잘리기 전까진 정기적으로 가정부를 불러 집안을 정리해왔기에.

처음엔 조금 불편하긴 했으나, 이제는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방한나가 주방에 서 있는 걸 보고 있으니, 묘한 감정이 조금씩 배어 나왔다.

언젠가, 사고로 다리가 산산조각이 나버린 후 임아린과 반 동거처럼 지내던 시절의 느낌과 비슷했다.

‘요즘 외로움을 타나….’

나는 최근에 연락처를 받았던 시청 직원에게 연락이라도 해봐야 할지 고민하며, 잠자코 시선을 거두었다.

“다 됐어요!”

그렇게 어느덧 설거지까지 모두 마친 후.

곧바로 방한나를 내쫓긴 뭐했던 나는, 친목도 다질 겸 거실에 앉아 그녀와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곤 뜻밖에 사실을 하나 알게 됐는데….

“…아예 처음 마셔본 거라고?”

“어…. 친구들이 술을 다 안 마셔서…. 호, 혼자는 마셔봤어요! ”

알고 보니, 방한나가 밖에서 술자리를 가져본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이거 진짜 큰일 날 애네.’

어마어마했던 방한나의 주사를 떠올린 나는, 마치 그녀의 친오빠라도 된 것처럼 몇 번이나 신신당부해주었다.

“맛있다고 절대 막 마시면 안 돼. 차라리 못 마신다고 빼거나, 진짜 믿을만한 사람이 있는 곳에서만 마시는 거야. 알았어?”

그러자 방한나가 묘한 시선을 지그시 보내오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해왔다.

“…넵….”

제대로 알아듣긴 한 건지, 외려 더 걱정스러워지기만 했다.

‘부모님이 엄청 걱정하셨겠네.’

그 밖에도 나는 그녀에 대해 꽤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부모님이 공격에 특화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

능력을 꽤 늦은 나이에 각성했다는 것.

아슬아슬하게 시험을 통과하여, 겨우겨우 대학에 붙었다는 것.

그리고 너무 울어서 실신할 뻔했다는 것.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붙었는데…, 이제 갈 일이 없어서 아쉽겠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저는 지금이 더 좋아요!”

현재 대학생인 방한나는 헌터 팀 데뷔 준비로 출석을 인정받고 있는 상태다.

아마 이대로 헌터 생활을 이어나간다면, 앞으로 학교에 나갈 일도 없으리라.

“나도 대학 축제는 좀 궁금하네. 근처에 다니기만 했지, 제대로 즐겨본 적은 없거든.”

“아, 진짜요? 그럼 다음에 저랑 같이 가요! 제가 이곳저곳 소개해 드릴게요!”

방한나는 당연하다는 듯 해맑게 웃으며 놀러 가자고 이야기해왔다.

아무리 빈말이어도 엄연한 상하 관계라 대하기 어려울 법도 한데, 그녀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그만큼 내가 편하다는 뜻이겠지.

원래라면 적당히 선을 그으며 거리감을 유지해야 했지만….

방한나의 원래 성격이 이런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것 같아서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다.

“우와…! 프로듀서님, 아카데미 토너먼트에도 참가하셨어요?”

“하긴 했는데. 본선에서 기권했어. 훈련 도중에 좀 크게 다쳤었거든.”

“앗…. 죄송해요….”

“아냐. 그래도 다친 덕분에 프로듀서가 됐으니까, 오히려 좋았을지도 몰라. 아녔으면, 네 프로듀서가 못 됐을 거 아냐?”

“…그, 그건 그렇네요…!”

그렇게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가며 방한나와 시간을 보내던 도중.

띵동─ 띵동─

집안에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가 오셨나 본데요…?”

“…?”

방한나를 거실에 앉혀놓은 채 곧장 현관으로 향한 나는, 별생각 없이 잠금을 풀고 현관문을 열어보았다.

삐리릭─ 철컥─

그리고 그 순간.

“…지혁아….”

현관 앞에 서 있는 그녀와 마주한 나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다.

“…오, 오랜만이야….”

임아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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