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죽여야 할 자
치유와 풍요.
지구에서 치유나 풍요와 관련된 신은 대부분 여신이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병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제법 규모가 큰 저택 앞에는 세르케티를 형상화한 여신상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대충 어림잡아서 3미터 정도의 크기에, 흰색의 돌을 깎아서 만든 정교한 예술 작품이었다.
그 앞에는 꽃과 화환, 과일과 곡식이 놓여 있었고, 기도하는 사람들도 끊이지 않았다.
마치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는 성지를 보는 느낌이었다.
나는 여신상을 지나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병원 입구에서는 내 방문을 미리 통고받은 여사제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작님께 신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세르케티를 따르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대들에게도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길. 칼마르의 백작인 윌리엄이오.”
나를 맞이한 자들은 3명의 여사제였다.
전에 만나 보았던 세르케티의 사제들처럼 이들도 선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이상할 정도로 친근감이 느껴진다고 할까?
친구나 이웃으로 지낸다면 정말 좋을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선지 상태창은 물론, 내 예감까지도 이들에 대해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진짜 종교인이고 의사임이 분명했다.
“윌리엄 백작 각하께서 방문하신다는 전언을 조금 전에서야 들었습니다. 원래 거친 음식밖에 없는 곳이라 제대로 준비한 것이 없습니다. 용서를 바랄 뿐입니다.”
“군대를 이끌고 다니다 보면 냇물을 마시고, 육포를 씹는 것이 일상이오. 신경 쓰지 마시오.”
나는 그들의 안내에 따라 신전이라고 부르고 병원으로 기능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병원은 밝고 깨끗했다.
지구의 21세기 기준으로는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병원에 왔다가 병을 얻어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신전이 청결하군. 채광도 좋고.”
“모든 것은 세르케티의 가르침에 따른 것입니다. 세르케티께서는 적어도 삼일에 한 번은 인간의 육신과 주변을 새롭게 할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그래서 물로 목욕하고, 거하는 곳은 청소를 하지요. 신앙이 깊은 자들은 매일 목욕과 청소를 한답니다.”
과학에 근거를 둔 위생이나 종교적 가르침에 근거를 둔 위생이나 결과는 같다.
목욕은 일 년에 한 번 하는 것이 몸에 좋다는 처참한 상식이 기준이 되는 세상보다야 이런 식으로라도 위생을 챙기는 것이 낫기는 하겠다.
“세르케티의 가르침은 정말 적절한 것 같소. 병사들도 더러운 곳에 오래 있으면 병에 걸리더군. 칼마르에도 세르케티의 신전이 있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영지민들이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신전을 확충해야 할 필요가 있겠어.”
“백작님께 축복이 있기를! 세르케티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당분간은 어렵습니다. 제국에서 벌어진 내전 때문에 신전의 재정 대부분이 구호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상 밖의 반응이었다.
교세를 늘릴 절호의 기회를 이렇게 흘려보낸다고?
물론 그들은 정말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래도 구호가 우선이니 어쩔 수 없다는 태도였다 .
이들은 진정한 종교인이었다.
신의 파편을 모으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있을 교단의 상층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세르케티라는 교단은 상층부의 일부를 제외하면, 진짜 제대로 된 종교로 활동하는 모양이다.
저들 종교의 상층부 일부를 제거할 필요성이 하나 더 늘었다 .
“그대들은 나를 뭐로 보는 거요? 내 영지민들을 위해 필요한 것을 만드는데 다른 자의 손을 빌린다는 것은 내게 모욕이오. 나는 칼마르의 백작이고, 황금이라면 누구 못지않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오. 신전을 세우기 위해 충분한 금전과 토지를 지급하겠소. 그대들이 준비할 것은 내가 건설할 신전에 어울리는 숫자의 사제들뿐이오.”
“오오! 세르케티시여. 윌리엄 백작님이 모든 병으로부터 안전하시길 기원합니다. 백작님이 장수하시고 많은 자녀를 갖기를 기원합니다. 백작님의 부가 지금보다 10배 더 늘어나기를 기원합니다.”
노골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의 축복이었다.
나는 그들의 축복에 들으면서, 이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당연히 받아야 할 찬사라는 태도를 사제들에게 보였다.
이 정도면 노리는 것이 따로 있는 음흉한 귀족으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좀 속물로는 보이겠지만.
“그리고 이왕이면 신전을 완성한 후 세르케티에서 가장 높은 분이 와서 축복을 내려주셨으면 하네. 그러면 축복이 더 강해지겠지. 가능하겠나?”
“물론입니다. 백작 각하. 대사제께서는 3년에 걸쳐 세르케티의 모든 신전을 순례하신 후 대신전에서 2년 동안 기도하십니다. 지금은 순례 여행이 끝나갈 때이니 신전 건립과 시기를 잘 맞추면 될 듯합니다.”
오! 순례 여행!
순례 여행이 아니라 수확 여행이겠지.
이제서야 왜 이곳에 죽여야 할 자들이 없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정리해야 할 자들은 순례 여행을 다니는 중이었다.
“순례 여행이 끝나가는 중이라고? 그렇다면 조만간 대신전에 머무르겠군.”
“그렇습니다. 지금이면 아마 남해의 세 섬나라를 순회하기 위해 가고 계실 겁니다. 그렇게 세 섬나라를 순회하신 후 바다 건너에 있는 대신전에 가서 기도하십니다.”
“그렇다면 신전 설립을 서둘러야겠군. 건물을 짓는 것이 한두 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니까.”
이제 들을 말은 다 들은 것 같았다.
너무 늦기 전에 움직여야 순례 중이라는 자들을 따라잡을 수 있다.
나는 병원을 위한 기부금을 건네고, 세르케티의 신전을 떠났다.
*
제국과 바다 건너 대륙 사이에 있는 바다에는 여러 크기의 섬들이 흩어져 있다.
그중에서 남부 해상 교역망의 중심을 이루었던 섬나라들이 바로 비엘리, 펠트리아, 포를라였다.
그들은 중계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고, 규모는 작지만 강력한 군대를 육성했다.
그러나 프리시오 공작이 바다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과정에서 세 섬나라는 막대한 피해를 보아야 했다.
체급 차이가 너무 심해서 초기부터 연전연패하며 밀려버린 것이다.
비엘리는 왕족부터 노예까지 모조리 죽거나 노예로 끌려갔다.
펠트리아의 경우는 섬을 점령당하고, 많은 시민이 죽거나 끌려갔지만, 지배층과 군대는 살아남아서 도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포를라는 살아남은 두 섬나라의 세력뿐 아니라 바다 건너 왕국들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버티는데 성공했다.
그래도 결국은 모두 패배하고 프리시오 공작이 남부 해상 교역망을 장악하리라는 암울한 예측이 현실이 되어간다 싶을 때 변수가 생겼다.
프리시오 공작이 황제를 참칭하면서 주변 변경백들과 마찰이 생긴 것이다.
기회를 잡은 섬나라들은 내부 문제로 인해 철수하는 프리시오 공작군을 공격해서 대승하면서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그 이후는 망하다시피한 두 개의 섬나라에 새로운 왕국이 세워지고, 세 개의 섬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중계 무역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제국과 바다 건너 대륙 사이의 교류가 다시 정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엉망진창이야! 전과 같지 않아!”
주점에서 내 앞에 앉아있던 상선의 사무장은 짜증스럽다는 듯이 고함을 치더니 독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나는 지금 신출내기 상인으로 행세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경험 없는 호구 말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상선의 경험 많은 사무장에게 충고를 들을 자격은 없다.
내 자격은 호위 용병으로 분장한 아쉬리프의 기사가 증명했다.
척 봐도 보통내기가 아닌 호위 용병까지 거느린 초짜 상인이라니 돈냄새가 풀풀 풍기지 않은가?
나는 사무장의 빈 잔에 다시 독주를 따랐다.
“그래도 교역망이 정상이 되었으니 이제는 적당한 상품을 날라도 되지 않을까요?”
“교역망이 정상이 되었다고 보기도 힘들지. 해적은 없지만 해적질은 있거든. 다들 돈이 급해서 눈이 벌개져 있다고. 재수 없으면 바다 속을 구경해야 할걸?”
“아이구야.”
“이봐. 윌. 내가 조카 같아서 해주는 말이니까 잘 듣게. 지금 펠트리아나 비엘리는 칼 든 강도나 다름없어. 세금을 무지막지하게 뜯어가. 물값, 식량 비용, 창고세 모두 상식을 벗어난 가격이야. 상행을 마치고 결산을 해보면 남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라고. 그나마 포를라는 좀 나은 편인데 그래도 전쟁 전과 비교하면 세금이 두 배는 돼. 물값하고 식량 비용이 비싼 것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고. 지금은 아니야. 자네 같은 초보 상인은 밑천까지 몽땅 날릴 수도 있어. 그냥 몇 년 정도 다른 상인 밑에서 경험이나 쌓아. 지키는 것도 버는 거야.”
독주와 좋은 안주, 슬쩍 찔러준 금화는 사무장의 입을 가볍게 만들었다.
처음 보는 초보 상인에게도 가까운 친척에게 하는 것처럼 제대로 된 충고를 해 준 것이다.
나는 낙담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무슨 종교를 믿는다는 사람들까지도 바다를 넘어간다기에 이제는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아! 세르케티를 믿는다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상행을 하는 것이 아니잖아. 해적이 들끓지만 않으면 별문제가 없지. 아니지. 어쩌면 군대라면 모를까 해적 정도는 문제가 안 될지도 몰라. 실력좋은 기사들이 따라다닌다는 말이 있더라고.”
내가 이 사무장을 찍은 것은 그가 경험이 많은 것 때문만은 아니다.
어제 이곳을 떠난 세르케티의 일행들이 탄 상선과 같은 상단 소속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소문에 어두운 척하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타는 배와 같은 배를 타는 것은 어떨까요? 바다 건너 왕국들을 시장조사 겸해서 구경이라도 하고 싶은데.”
“늦었어. 어제 이미 떠났거든. 포를라를 거쳐서 비엘리까지 갔다가 저쪽 대륙으로 넘어간다고 하더라고.”
“진짜 아쉽네요. 하루만 더 빨랐으면 좋았을 텐데.”
“정 아니다 싶으면 나한테 와. 내가 타는 배의 선장님을 소개시켜 주지.”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술에 취해서 점점 발음이 뭉개지는 사무장을 뒤로하고 주점을 떠났다.
비엘리로 직행하는 배를 구해야 했다.
*
재건된 비엘리는 내 예상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부두는 새로 건설이 되어서 말끔한 모습이었고, 그 앞에 정박한 상선의 숫자도 적지 않았다.
살인적인 세금과 부두비용으로 인해 이익이 남지 않는다는 사무장의 불평과 달리 항구의 활기는 다른 항구와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부두에 내려서 살펴보니 한때 점령되어서 완전히 쓸려 버렸던 흔적이 여실히 남아있었다.
불에 타고 파괴된 집과 건물 중 상당수는 아직도 철거가 끝나지 않았다.
철거가 끝난 자리도 정리만 해놓았을 뿐 건설 중인 건물은 얼마되지 않았다.
그나마 창고와 상단 건물들은 제법 복구가 되어서 항구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기는 했다.
건설 현장에서 노역하고 있는 자들의 일부는 노예였고, 가혹한 노동과 학대에 시달리고 있음이 명백했다.
전쟁을 거치고 재건 중인 비엘리는 여러모로 뒤틀린 도시가 되어 있었다.
내가 목표로 한 자들은 일주일이 지나서야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