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17화 (217/248)

217. 새로운 후계자

가능성은 충분하다.

세르케티의 경우도 본질은 종교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의료 단체였다.

다양한 사람이 들락거리는 것도, 치료에 실패한 시체가 나오는 것도 자연스럽다.

사람을 납치하고 죽이기에 이보다 더 편한 환경은 찾기 힘들다.

가장 처음 이런 발상을 한 자는 사악하고 감정이 메마른 자였음이 틀림없다.

“신비에 접한 자들을 죽여서 흡수하는 걸까요?”

“확신을 가지고 주장할 수는 없지. 정황 증거가 곧 진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나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네.”

“그런데 왜 그냥 내버려 둔 겁니까?”

“지난 3백 년간 어떤 상황이었는지 이제는 윌리엄 백작도 알지 않은가?”

아! 제국의 흑막으로 암약하던 그놈.

볼포토.

둘로 나누어졌지만 모두 내게 죽었다.

하지만 그전까지 엑사드나 알라드 같은 자들은 숨도 못 쉬고 숨어 있어야 했다.

그렇게 못한 자들은 볼포토에게 모두 흡수당했다.

그러니 그들에게 왜 과거에는 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 했느냐고 추궁하는 것은 지나친 비난이다.

그들도 살아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미래에 대한 부분은 짚어야 했다.

“이해합니다. 그래도 이제는 미래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자들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뻔히 알게 되었는데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아르보그 같은 대귀족들의 휘하에는 귀족들뿐 아니라 비밀 단체나 결사도 존재한다.

간단하게 써먹고 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오랜 시간 동안 동행하다가 반쯤 한 몸이 되어버린 자들도 드물지 않다.

거기에 종교 단체가 하나 정도 새로 끼어들어 가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지금 같이 귀족들의 전력 누수가 심해서 도움이 필요할 때면 더욱 그렇다.

그러니 마음이 급한 귀족이 저런 자들과 손을 잡기 전에 미리 쐐기를 박아놓을 필요가 있었다.

알라드 역시 내 말에 부정하지는 않았다.

“몰래 숨어있는 것도 아니고, 간판까지 내걸고 병원을 운영하고 있으니 모조리 쓸어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지. 하지만 윌리엄 백작. 그거 아나?”

“뭘 말입니까?”

“세르케티의 본부는 제국에 있지 않아. 바다 건너 대륙에 자리잡고 있지.”

아!

뭔가 상식이 하나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이 세상의 중심은 언제나 신성 마르스 홀롬 제국 아니었나?

모든 중요한 단체와 다양한 문화가 이 땅에 자리잡고 번성하지 않았던가?

당황한 내게 알라드는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대규모 단체 중에는 제국의 간섭이 싫어서 외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경우도 있네. 물론 세르케티는 발상지부터가 바다 건너 대륙 쪽이었으니 경우가 다르기는 하지.”

바다 건너에 있는 대륙이라면 프리시오 공작의 공격으로부터 남부 해상 교역망을 지키기 위해 출병했던 나라들이 위치한 곳이다.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제국에 비해 여러모로 열등한 지역이었다.

이거 아예 국가를 장악하고 있는 종교 단체도 있겠는데?

나는 점점 일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제국 내의 일이 대충 정리가 되어 간다고 생각했는데 외국까지 돌아다녀야 할 판이다.

그것도 바다를 건너서.

“외국에 본부가 있다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군요. 그래도 신의 파편을 흡수한답시고 사람을 죽여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일단 귀족연합자치령 내에서는 정리를 해야겠습니다. 그 이후의 일은 나중에 생각을 하도록 하지요.”

내 말에 알라드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엑사드 역시 생각에 잠긴 눈초리였다.

그는 여전히 낮은 울림의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자네는 두렵지 않나? 만약 세르케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신의 여정에 나선 자가 있다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신의 파편을 흡수했을까? 얼마나 신에 가깝게 접근했을까? 나는 감히 저항을 할 엄두가 안 나더군. 3백 년간 고개를 숙이고 숨어 있었더니, 이제는 고개를 드는 법을 까먹었나 봐. 우리는 백작과 달라.”

엑사드와 알라드는 이상한 곳에서 기가 죽어 있었다.

아무래도 볼포토에 의해 억눌려 있었던 기간이 좀 길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물론 진짜로 때렸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기본 전제를 가격한 것이다.

“신이 뭡니까?”

“......모든 신비의 능력을 모아서 사용하게 된 막강한 존재?”

역시나.

이럴 줄 알았다.

이들은 인간과 신을 나누어서 생각하고 있었다.

인간이 아닌 어떤 막강한 능력을 갖춘 존재를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이 되는 여정에 나섰다는 존재가 신인가?

아니다.

아직은 그냥 인간이다.

나부터가 아무리 상태창을 봐도 인간이라는 종족에서 변한 것이 없었다.

저들은 그냥 심리적으로 몰려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다 신과 종교에 대한 상식도 부족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제국에서는 평소에 종교를 접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종교는 이 세상에서, 적어도 제국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근본 원리가 종교적인 가르침과는 상관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신과 상관없이 살아간다.

그들의 삶은 전통과 법에 따라 규정되어 있고, 그들의 죽음은 불가지론에 기대고 있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평범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신에 대한 명확한 개념조차 없을 정도다.

그들이 세상을 살면서 마주치게 되는 평범하지 않은 모든 일은 신비와 관련된 것이지 신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 다른 관점을 제시해 주었다.

“신의 파편을 많이 흡수했다고 해서 어떻게 인간이 아닙니까? 열 개 흡수하면 인간이고 스무 개 흡수하면 신입니까? 기록대로라면 세상에 흩어진 신의 파편을 모조리 흡수해야 신이라고 불러줄 수 있을 것 같던데? 그러니까 아직은 우리와 같은 인간입니다. 신이 아니에요.”

쉬지 않고 쏟아내는 내 말을 듣는 두 사람의 표정이 묘해졌다.

할 말은 많지만 말하기 어렵다는 티가 역력했다.

그러나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신의 파편을 많이 흡수한다고 무조건 강해집니까? 강해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힘이 세면 강한 겁니까? 아니면 칼을 잘 쓰면 강한 겁니까? 신의 파편을 하나 흡수한 자는 두 개 흡수한 자에게 무조건 집니까? 확인해 보셨습니까? 확인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확신합니까? 그리고 세르케티의 지원을 받은 자가 그렇게 강한 자라면 왜 본부가 외국에 있습니까? 제국에 와서 모든 것을 장악하고 사람들을 부려서 신비에 접한 자들을 잡아들여야지. 그리고 이제 와서 말하지만 볼포토라는 자, 별것 아니었습니다. 제가 죽여버리지 않았습니까? 제 나이가 이제 20중반입니다. 그런데 3백 년 넘게 그 짓을 한 자가 내게 죽었습니다. 다시 묻죠. 신의 파편을 많이 흡수하면 정말 강해지는 겁니까? 아닌 것 같은데. 그러니까 미리부터 부정적으로 생각할 것 없습니다. 그냥 보통 인간보다 조금 더 강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신도 죽었다는데 인간이 뭐가 두렵습니까?”

오랜 시간 동안 눌려온 정신적 압박감이 내 말 몇 마디로 해방될 리는 없다.

그래도 그들의 심리적인 부담감을 많이 경감해주지 않았을까 싶었다.

하지만 둘은 나와 다른 생각인 듯 했다.

“윌리엄 백작. 당신은 그렇게 말해도 됩니다. 당신의 빛은 찬란하다고 하니까요.”

“그렇소. 윌리엄 백작. 당신의 빛은 아주 강해. 내가 이전에 보지 못했을 정도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무래도 이것은 알라드의 신비와 관련이 있는듯 했다.

알라드는 내 의문을 풀어주려는 듯 말을 이었다.

“윌리엄 백작. 이것은 엑사드 말고는 당신에게 처음 말하는 거요. 나는 신비에 접한 자를 볼 수 있소. 능력이 강한 자일수록 강한 빛을 발하고, 다양한 능력이 있는 자들은 여러 색의 빛을 발하지.”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여전히 살짝 찌푸린 눈살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내게 선언하듯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내가 일찍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강하고 다채로운 빛을 발하고 있소. 얼마나 강하냐고? 너무 밝고 다채로와서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요. 내가 당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계속 인상을 쓰고 있는 것이 바로 그래서요.”

알라드가 저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내가 생각보다 강하기는 한 모양이다.

한때는 인간 중에서 가장 강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을 정도니까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넉넉하게 잡아도 열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윌리엄 백작. 당신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소. 내가 본 자들 중에서 가장 밝은 빛을 가졌으니까. 신으로 가는 여정 위에 있는 자들 중에서 당신처럼 강한 빛을 가진 자는 없을 거요. 그러니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시오. 우리가 같은 편이라는 것을 잊지만 말고.”

너무도 의도가 명백한 발언이라서 그냥 미소만 짓고 말았다.

이 둘이 볼포토에게 가졌던 공포가 너무 컸었다고 이해하기로 했다.

사람이 이성적으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니까.

때마침, 아스워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리를 비운 것이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세는 한바탕 전투라도 치른 것처럼 살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아스워드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두 원로에게 놀라운 사실을 전했다.

“블레인이 죽었습니다.”

이곳에서 놀라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나 역시 그랬다.

결국 제거당하기는 하겠지만 시간이 좀 걸리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공작가에서 손을 쓰는 방식은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신속했다.

“공작 부인의 반응이 생각보다 과감한데? 내성에 숨은 채 블레인의 협박이나 당하고 있었던 사람이 맞나?”

“라그닐드 경의 독단이었습니다. 블레인이 아스워드 공작의 유족을 인질로 삼고 원로원을 장악할 계획을 입 밖에 내자 라그닐드 경이 즉시 블레인을 암살했습니다.”

“사고를 쳐도 단단히 치려고 했군. 그런 상황이라면 라그닐드가 할 일을 제때 제대로 한 것이지. 그런데 블레인의 휘하 귀족들은 어떤 반응이었나?”

“블레인이 죽자 곧장 손을 들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위해 칼을 들지 않더군요.”

“다행이다. 블레인이 전투에서 추태를 보인 이후로 인망을 많이 잃기는 했던 모양이군. 그 아이가 요즘 무리를 많이 했지.”

알라드는 아스워드를 통해 꼼꼼히 상황을 파악한 후 별문제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는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아스워드의 이야기를 듣다가 아르보그 공작가의 유력한 후계자가 모두 제거되었음을 깨달았다.

블레인은 죽었고, 아스워드는 탈락했다.

그들에게 밀려서 조기에 탈락한 자들은 언급할 것도 없다.

이렇게 되면 후계자의 자리 주변이 깨끗해진 것이다 .

누구를 후계자로 세워도 반발할만한 구심점이 없다.

새로운 후계자로 세울 자가 누구인지는 대충 짐작이 가지만 확실히 해야 했다.

이것은 미래의 평화가 달린 일이다.

“이제 우리 사이에는 일말의 불안 요소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아르보그 공작은 언제 옹립할 예정입니까?”

“5년 정도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전까지는 공작 부인이 섭정으로 어린 아들 대신 통치하게 될 겁니다. 물론 두 분 모두 평화에 힘을 실어 주셨습니다.”

“조만간 사절을 교환하고, 이 모든 것을 공표하도록 하지요.”

예상은 적중했다.

공작의 10살짜리 첫째 아들이 후계자로 내정된 것이다.

5년 어쩌면 1~2년 정도 더 연장한 후에 공작령의 새로운 지배자로 전면에 나설듯 하다.

아르브고 공작가에서의 일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그리고 나는 공작령을 떠나기 전 세르케티의 병원을 방문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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