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12화 (212/248)

212. 그들의 선택

엑사드.

알라드.

기억에 있는 이름이었다.

그들은 아르보그 공작가의 원로들이다.

엑사드는 거인족이고 알라드는 인간이다.

아니, 그렇게 파악하고 있다.

원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자들이라서 그들에 대한 정보가 많이 부족했다.

내 기억에도 그들에 대한 정보는 문서 한 장을 간신히 채우는 정도였다 .

심지어 가족관계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네아가 제공한 첩보에 의하면, 그들 둘은 7명 정도 있는 공작가의 원로들 중에서도 실세라고 한다.

생전의 아르보그 공작조차도 조심스럽게 대했고, 지금은 다음 대의 공작을 누구로 추대할 것인지에 대한 키를 잡고 있다는 말도 있다.

그런 자들이 아스워드를 보내서 나를 부르는 것이다.

왜?

내부 정리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나와 만나서 할 말이 있나?

그렇다면 내부 정리와는 관계가 없다는 이야기인데······

우리들끼리 무엇을 논의하든 새로운 아르보그 공작이 노우하면 그냥 나가리 아닐까?

나는 의문을 품은 채 초청장을 열었다.

초청장의 내용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단숨에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반복해서 읽었다.

그리고 내가 뭔가 잘못 이해했나 싶어서 다시 한번 더 읽었다.

역시, 내가 처음에 읽고 이해한 내용이 맞았다.

잘못 이해한 것은 없었다.

앞부분의 내용은 별다른 것이 없었다.

나를 아르보그 공작 가문에 초청한다는 내용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뒷부분이었다.

다음 대의 아르보그 공작을 추대하는데 있어서 내 조언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나는 귀족연합자치령의 수장들 중 한 명이고, 귀족연합자치령군을 이끌고 아르보그 공작령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공격도 매우 성공적이어서 세금을 모아놓은 대규모의 곡물창고를 태워버렸고, 귀족들의 영지를 약탈해서 엄청난 규모의 재화를 가져왔다.

아마, 그쪽의 귀족들 중에서 내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귀족이 드물 것이다.

그런 내게 공작 추대에 대한 조언을 구한다고?

아무리 가문의 원로고, 실세라도 해도 이런 내용이 공개되면 반역자라고 조리돌림당한 후 목이 매달릴 것 같은데?

게다가 이 초청장을 가져온 자가 아스워드라는 것도 문제였다.

아스워드는 유력한 후계자 중의 하나다.

그런데 제국의 변방까지 초청장 하나를 들고 심부름을 온 것이다.

일행이라고는 경호원 노릇을 하는 기사 몇 명이 전부였다

아르보그 공작가 같은 대귀족의 유력한 후계자로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이었다.

이것은 분명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후계구도가 뒤집어졌나?

칼마르에서 파악한 후계구도로는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는데?

칼마르는 제국 전역에 걸친 첩보망을 운영하고 있다.

리네아가 하는 일의 절반이 영지 경영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첩보망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일이라고 할 정도로 첩보 분야는 칼마르 백작가에서 대대로 정성을 들이는 분야다.

얼마나 정성과 시간을 들이는지 대귀족의 턱밑에까지 협조자를 박아넣었을 정도다.

글렌 공작의 최측근이었던 베르그렌이 칼마르의 협조자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다른 대귀족에게도 베르그렌 같은 자가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 첩보망을 통해 내린 결론이 다음 대의 아르보그 공작은 아스워드 또는 블레인이라는 것이었다.

아스워드가 명백한 우위를 가졌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분석한 것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모양이다.

어이가 없어진 나는 아스워드에게 다시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스워드 경. 혹시 초청장의 내용을 경도 알고 있습니까?”

“내용에 대해 따로 언질을 주신 것은 없었습니다. 직접 가서 전달하라는 말씀만 있었지요.”

그렇지.

몰라야 정상이지.

아스워드가 초청장의 내용을 알았다면 이렇게 심부름을 왔을 리가 없다.

두 원로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 내용이니까 말이다.

아무래도 초청에 응해야 할 것 같았다.

단순히 한 번 얼굴을 보자는 내용이었으면 정중하게 거절하고 칼마르로 복귀했을 것이다.

아르보그 공작을 사실상 내가 죽이고 흡수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해도, 혹시 또 모르는 일이니까.

그러나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이라면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설마 진짜로 공작 추대에 대한 의견을 구할리는 없고, 무엇인가 나와 의논할 중요한 문제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따져보면 제국 내에서 귀족연합자치령을 위협할 만한 세력은 이제 아르보그뿐이다.

그것은 아르보그쪽에서도 마찬가지다.

뱅트손과 스케티는 세력을 지나치게 잃어서 스스로를 지키는 것도 위험한 상황이 됐고, 프리시오 공작의 영역은 너무 멀어서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런 부분을 감안해보면 서로 마주 앉아서 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고 의논할 부분이 있기는 하다.

어쩌면 새로운 공작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기 위해서 자신들이 악역을 담당하고 나선 것일지도 모른다.

새로 추대되는 공작이 무리한 결정에 대해 책임을 물으면서 원로들을 퇴진시키고 권력을 강화하는 그림이라면 그럴듯하지 않을까?

나는 에할름에게 명령을 내렸다.

“에할름 경은 즉시 칼마르로 복귀해서 내가 아르보그 공작가문의 원로인 엑사드와 알라드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보고하시오.”

나는 에할름에게 명령을 내리면서 하늘에서 육식조 하나를 불러들였다.

매를 닮은 큰 새가 내 왼쪽 팔뚝에 내려앉았다.

나는 잠시 육식조의 눈을 보며 교감을 강하게 했다.

육식조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입력한 것이다.

육식조가 내 의사를 이해한 것을 확인한 후에 그 육식조를 에할름의 팔뚝으로 옮겨주며 추가로 명령을 덧붙였다.

“그리고 만약, 내가 아르보그 공작령을 방문하기 전에 알아야 할 일이 있다면, 최대한 빨리 알려주시오.”

최대한 빨리 알려달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전서구가 있고, 잘 써먹고 있는 세상이다.

뭐든지 내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육식조의 다리에 문서를 담은 통을 묶어서 보내줄 것이다.

교감해서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야생동물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편리하다.

마치 고성능의 배달용 드론을 이용하는 기분이었다.

에할름은 내 명령에 따라 배를 타기 위해 즉시 항구도시로 향했다.

나 역시 호위기사 한 명을 거느린 채 아르보그 공작령을 향해 출발했다.

아스워드가 나를 안내했다.

육식조가 내게 돌아온 것은 아르보그 공작령의 초입에서였다.

칼마르에서 아르보그 공작령까지 단숨에 날아온 육식조의 다리에는 역시나 작은 통이 매달려 있었다.

작은 통에서 나온 문서의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내용은 상당히 중요했다.

내가 알지 못했던 최신 첩보 중에는 아스워드의 실패한 궁정쿠데타에 대한 전말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아르보그 공작가에도 베르그렌 못지않은 자가 박혀 있는 모양이다.

덕분에 왜 아스워드가 이렇게 심부름이나 다니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외부에서 한 번 읽은 문서는 유출을 막기 위해 태우는 것이 원칙이다.

아스워드는 문서의 내용이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내 손에서 불에 타는 문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재로 변한 문서를 손으로 쳐서 공중으로 날려보낸 후 육식조에게 먹이를 주고 야생으로 돌려보냈다.

아르보그 공작령은 나도 처음 방문하는 곳이다.

귀족연합자치령군을 이끌고 공작령 가까이 접근하기는 했지만, 공작령 내부로 침입하지는 못했다.

전쟁을 겪지 않은 아르보그 공작령은 예상보다 괜찮아 보였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지역들을 돌아다니다가 온 후라서 그런지 전쟁의 흔적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공작령의 저력을 높게 쳐 줄만 했다.

이 정도라면 원정을 나갔다가 병력을 모조리 말아먹어도, 한 번 정도는 더 병력을 동원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설 정도였다.

아스워드가 나를 안내한 곳은 공작성 외곽에 있는 거대한 저택이었다.

그 규모나 곳곳에 놓여있는 예술적인 장식품을 볼 때, 아르보그 공작가의 유력자가 소유한 장소임이 분명했다.

예상대로 그곳에는 엑사드와 알라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첩보의 내용에 나온 모습 그대로였다.

붉은 피부를 가진 거인 엑사드.

평범한 중년의 인간 알라드.

둘은 겉보기와 달리 나이가 아주 많은 자들이다.

거인의 나이는 겉으로 봐서 알기 어렵다고 하니 감안하더라도, 나이가 많은 인간이 중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들은 신비에 접한 자들일 가능성이 컸다.

“전부터 한 번쯤은 보고 싶었소. 윌리엄 백작.”

“당신에 대한 소문은 내가 여러 곳에서 듣고 있었지.”

둘의 태도는 적대적이지 않았다.

그냥 귀족을 만나는 귀족의 태도, 그 정도였다 .

그래도 미묘한 차이가 나기는 했다.

먼저 말한 엑사드의 태도가 정중했다면, 나중에 말한 알라드의 태도는 어딘지 모르게 까칠한 부분이 있었다.

나 역시 귀족다운 예의를 지켜 그들을 대했다.

“그래서 이렇게 만나게 된 모양입니다. 저 역시 명망 높으신 두 분을 뵙게 되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명망은 무슨. 칼마르에서나 명망이 있겠지. 그쪽은 우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대놓고 첩보활동을 지적질하는 알라드의 대꾸에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이곳에 박혀있는 끄나풀이 드러난 모양이다.

게다가 저렇게 대놓고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드러난 끄나풀이 한두 개가 아니라 여러 개임이 분명했다.

나는 전초전에서 패했음을 인정하고 곧장 본론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저를 만나고자 한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새로운 아르보그 공작의 추대에 대해 그쪽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불렀소이다.”

진짜?

정말 우리 쪽의 의견이 필요하다고?

왜?

엑사드의 말에 나는 처음의 예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우리 쪽의 의견을 필요로 할 줄은 몰랐다.

나는 놀라움을 감추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설마 제 개인의견을 듣고 싶은 것은 아닐 것이고, 역시 귀족연합자치령의 입장을 알고 싶다는 말이겠지요?”

“그렇소. 백작. 귀측의 입장에 따라 우리는 새로운 공작으로 어떤 이를 추대해야 할지 결정할 거요. 어쩌면 새로운 공작을 추대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

어! 이거 설마?

그러나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아스워드가 먼저 반발했다.

“새로운 공작을 추대하지 않는다구요!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다. 아스워드.”

“이것은 반역입니다!”

아스워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일어나기가 무섭게 엑사드의 손에 목이 잡혀서 끌려갔다.

엑사드는 아스워드를 바로 코앞으로 끌어당긴 채 화를 냈다.

“말이 끝나지 않았다고 했다! 끝까지 말을 듣고 반발을 하든지 칼을 뽑든지 해라. 네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를 생각해!”

엑사드는 아스워드를 던지듯이 해서 다시 제자리에 앉혔다.

나는 한바탕의 소동이 지나가자 엑사드를 향해 조금 전에 하지 못한 질문을 던졌다.

“설마 귀족연합자치령에 합류하시려는 겁니까?”

“조건이 맞는다면.”

내 질문에 대한 엑사드의 답변은 명확했다.

그러나 알라드는 침묵을 지켰다.

나는 알라드의 답변도 들어야했다.

둘의 의견이 다르다면 이것은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는 제안이었다.

“알라드 경께서는 어떤 의견이십니까?”

“나 역시 조건이 맞는다면 찬성이다.”

둘이 하는 말은 같은 내용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다른 내용으로 들렸다.

둘의 태도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둘이 말한 ‘조건’이 같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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