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11화 (211/248)
  • 211. 우연한 만남은 없다

    빛의 기둥에 손을 넣은 순간 느껴지는 것은 따스함이었다.

    그리고 무엇인가가 자신의 손을 타고 흐르는 것 같은 느낌도 받았다.

    이것은 분명 빛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치 천천히 흐르는 물에 손을 넣은 것 같았다.

    고프리는 빛의 기둥이 심상치 않은 존재라는 것을 지하공동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 공동에서 빛줄기가 기둥처럼 서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일이 아니었으니까.

    적어도 눈에 보이는 것처럼 단순한 빛의 기둥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르누트의 태도를 본 후에는 빛의 기둥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느낌은 어떻게 생각해도 위험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아르누트 역시 고프리와 같은 생각인듯했다.

    “기록과는 다른데?.”

    “기록과 다르다고요? 도대체 뭐라고 기록되어 있는 겁니까?”

    고프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르누트는 그의 도구에게 제대로 설명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확신을 갖기 위해 명령했다.

    “빛이 비추는 안으로 들어가 봐. 완전히 안으로.”

    고프리는 잠시 망설였지만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

    레인저병이 여전히 화살을 겨누고 있는 이상 다른 선택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한 가닥 믿는 바는 있었다.

    빛의 기둥이 자신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느낌,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고프리의 선택은 보답받았다.

    고프리가 빛의 기둥에 온전히 들어가자 지금까지와는 다른 수준의 따뜻함이 그를 감싸고 돌았다.

    손을 타고 흐르던 따뜻한 기운이 전신으로 돌기 시작함을 느끼는 순간부터는 아무런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의 뱃속에서 부유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르누트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일에 입이 딱 벌어졌다.

    빛의 기둥으로 들어간 고프리가 허공으로 살짝 떠오르더니 반쯤 누운 듯한 자세로 천천히 돌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그는 편안한 표정으로 눈까지 감고 있었다.

    아르누트는 그 모든 장면을 보면서 뭔가 상식이 박살나는 느낌을 받았다.

    아르누트가 기대한 것은 이런 종류의 사건이 아니었다.

    아르누트는 고프리가 빛의 기둥에 손을 댄 순간, 아니면 안으로 들어간 순간 함정이 발동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빛의 기둥이 부여하는 시험을 통과한 자는 지슬리의 이름에 어울리는 자격을 갖출 것이고, 별의 의지에 따라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다.]

    그가 발견한 기록에 있던 내용이었다.

    상징과 비유로 가득 찬 내용이지만 해석은 뻔했다.

    빛의 기둥이 부여하는 시험은 함정.

    지슬리의 이름에 어울리는 자격은 상징물과 황금.

    별은 제국 황제.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공작의 통치.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비유로 생각했던 빛의 기둥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놀라웠지만 말이다.

    그래도 함정을 돌파하면 분명히 지슬리의 이름을 주장할만한 상징물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어쩌면 폐광 같은 것으로 위장한 보물창고의 지도도 같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다.

    그것으로 지슬리 공작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공작에게 어울리는 규모의 군대를 다시 조직해서 진정한 지슬리 공작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라니!

    자신의 해석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어디에서부터 해석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아르누트 님. 어떻게 할까요?”

    지금 벌어지는 광경을 보고 당황한 것은 아르누트만이 아니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르누트에게 미리 귀뜸을 받았던 레인저병들 역시 예상외의 사태에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누트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도에 기록된 장소는 정확했지만, 그 내용에 대한 해석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면 지슬리 공작의 유력한 계승자가 갑자기 신분을 버리고 이상한 짓을 하고 돌아다녔다는 것을 간과했다.

    신비와 관련된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떠올리지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신비와 관련되었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저 이상한 현상까지도.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뻔했다.

    빛의 기둥 속에 들어가 있는 외부인을 끌어내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저 안에 대신 들어가야 했다.

    빛의 기둥이 부여하는 시험이 함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혹시 진짜 시험이라면 외부인을 저 안에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절대로 안될 일이었다.

    아르누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빛의 기둥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늦은 판단이었다.

    고프리를 빛의 기둥으로 들어가라고 했을 때부터 모든 것이 틀어진 셈이었다.

    고프리는 빛의 기둥으로 뛰어 들어오는 아르누트를 느끼며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종류의 것이었다.

    그것은 아르누트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지배자의 눈빛이었다.

    아르누트 역시 그 변화를 눈치챘다.

    고프리는 아르누트를 바라보며 땅에 두 발을 내렸다.

    인간은 하루의 경험과 지식을 쌓음으로 하루 전의 자신과는 또 다른 존재가 된다.

    단순히 키가 커지고, 몸무게가 늘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만약 일 년의 경험과 지식을, 아니, 10년의 경험과 지식을 순식간에 머리 속에 강제로 집어넣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 전과 후의 인간은 얼마나 달라질까?

    만약 그 경험과 지식이 100년에 달하는 분량이라면?

    방금까지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바로 고프리가 그랬다.

    방금까지의 고프리는 출세에 목이 마른 하급 귀족에 불과했다.

    그는 너무 출세에 목이 말라서, 소금물까지도 마시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 실수가 너무 커서 결국은 살기위해 눈치를 보고, 불합리한 명령이라도 따라야 하는 장기말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지금 고프리는 조금 전까지의 실패자와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세상의 진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수많은 비밀스러운 지식과 여러 인생의 경험이 그에게 밀려들었다.

    고프리는 더 이상 고프리가 아니었다.

    그는 신이 되기 위한 여정에 서 있는 씨앗이었다.

    고프리는 신비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신비에 접한 자들이 인간성을 잃고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니까.

    고프리 역시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실패했던 여러 씨앗의 기억을 가지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씨앗이었다.

    지금은 발아한 씨앗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달라진 고프리의 분위기를 본 아르누트는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더 이상 늦기 전에 문제를 바로잡아야 했다.

    “당장 여기서 나가!”

    그러나 아르누트의 명령은 소용이 없었다.

    고프리는 더 이상 아르누트의 아랫사람이 아니었다.

    “아르누트, 당신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오해했던 모양입니다.”

    “감히!”

    “이곳은 만약을 대비한 지슬리 가문의 비밀창고 같은 곳이 아닙니다. 신이 되는 여정에 나섰던 당신의 선조가 남긴 이정표 같은 곳이지요. 당신이나 나나 같은 오해를 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아르누트는 고프리의 말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아르누트는 자신의 피부가 부서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육체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이 부서지고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기억과 지식과 감정과 느낌.

    기쁨과 욕망과 분노와 슬픔.

    그 모든 것이 하나하나 분해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른다면 자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고프리는 빛의 기둥 안에서 서서히 분해되고 있는 아르누트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공포에 질린 채 빛의 기둥에게 육체와 정신을 흡수당하고 있던 아르누트는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는 비인간적인 눈동자를 인식하고 마지막 발악을 했다.

    “죽여! 저자를 죽여!”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레인저병들 중 일부는 아르누트를 끌어내기 위해 빛의 기둥으로 뛰어들었고, 다른 일부는 명령에 따라 화살을 쏘았다.

    그러나 아르누트의 마지막 명령은 헛수고가 되었다.

    날아간 화살은 빛의 기둥에 닿는 순간 속도를 잃고 바닥으로 툭 떨어져 버렸다.

    마치 그 자리에 화살을 잡고 있다가 떨어뜨린 것 같았다.

    그리고 살의를 가지고 빛의 기둥에 뛰어들었던 레인저병들은 순식간에 부서져 버렸다.

    머리털부터 피 한 방울까지 미세하게 부서진 가루처럼 변해서 사라진 것이다.

    아르누트 역시 같은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빛의 기둥 밖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레인저병들은 미친 듯이 화살을 연사했다.

    그러나 여전히 화살은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빛의 기둥 안으로 들어갔던 동료들이 모두 가루로 변해서 부서지는 것처럼 사라지자 레인저병들은 뒤늦게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너무 늦은 도망이었다.

    화살에 담긴 운동에너지까지 흡수해버린 빛의 기둥이 고프리의 의지에 따라 공동 전체로 크기를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두 배씩 커지는 빛의 기둥이 도망치던 레인저병들을 따라잡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도망치던 레인저병들 역시 동료들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그 후에 전등이 꺼지는 것처럼 빛의 기둥이 팍하고 사라졌다.

    땅 위 가까이 드러났던 별의 기운이 고프리에게 완전히 흡수된 것이다.

    그제서야 고프리는 지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직 일의 마무리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지상에도 레인저병들은 많이 있었다.

    *

    제국의 북쪽 경계선을 넘어선 곳에서 제국의 최남단까지 가는 것은 평화시에도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지금은 내전의 여파로 도적과 탈영병이 횡행하고 있다.

    지붕이 있는 곳에서 잠을 청하는 것도 쉽지 않다.

    어떻게 생각해도 육로로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좀 편하게 가도록 하지요. 전에 제가 은거하던 곳 근처에서 배를 타고 곧장 칼마르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럽시다. 길 위에서 야영하면서 돌아다니는 것은 이제 징글징글하군요.”

    에할름의 제안에 나뿐 아니라 동행한 기사들까지 모두 대찬성이었다.

    칼마르로 직행하는 배가 없더라도 근처까지만 가도 된다.

    적어도 제국 중부를 육로로 돌아다니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의 희망은 희망으로 끝나고 말았다.

    제국령의 경계에서 전혀 예상 밖의 사람을 만나서 예상 밖의 장소로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국령의 경계에서 만난 사람은 아스워드였다 .

    그는 아르보그 공작위를 이어받을 유력한 후계자들 중 하나다.

    이런 곳에 심부름을 나오기에는 지나치게 중요한 인물이었다.

    “설마 길에서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이 우연이라고 주장할 것은 아니겠지요?”

    “우연이 아닙니다. 윌리엄 백작 각하. 제가 백작 각하를 쫓아서 제국 북부를 얼마나 헤매고 다녔는지 아십니까? 먼저 이것부터 받아주십시오.”

    아스워드는 내게 편지를 하나 내밀었다.

    엑사드와 알라드의 이름으로 된 초청장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