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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94화 (194/248)
  • 194. 가능할까?

    *

    뱅트손은 자신이 쓰고 있던 얇은 황금관을 내려놓았다.

    황제 즉위식에서 사용했던 호화로운 황금관은 어디까지나 행사용이었다.

    황제 즉위를 위한 행사 때 단 한 번 사용한 것을 마지막으로 당분간은 쓸 일이 없어야 하는 물건이다.

    평소에는 이렇게 약식으로 만든 얇은 황금관을 사용해왔다.

    그러나 아무리 약식으로 만든 것이라고 해도 황금의 무게는 만만하지 않았다.

    반나절 정도만 쓰고 있어도 목이 뻐근해지는 것이 나중에는 정말 감당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래도 이렇게 황금이 많이 들어간 것 말고, 좀 더 가볍고 얇게 새로운 관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즉위식에서 사용했던 황금관은 아예 가문의 비고에 넣어서 보관하고,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현재 쓰고 있는 황금관을 사용하는 것으로 하면 된다.

    뱅트손은 주변의 의견을 구하지도 않고 황제가 쓸 황금관에 대한 사항을 독단적으로 결정해버렸다.

    이런 식으로 뱅트손이 황제의 복식을 멋대로 바꾸는 것은 원래 허용되지 않는 일이었다.

    황실에서 결정하는 사소한 일까지도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소한 문제로 인해 권력투쟁으로 비화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실 내부의 일을 담당하는 궁내부의 관리들은 뭐든지 되도록이면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간주해왔다.

    그러나 뱅트손은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하고 자기 손으로 직접 황금관을 머리에 썼다.

    바로 그 순간 신성 마르스홀롬 제국에서 관습적으로 지켜왔던 모든 관례와 전통은 박살 나 버렸다.

    더 이상 관례니 전통이니 하며 따지는 것이 무의미해진 것이다 .

    그리고 사실, 뱅트손의 결정에 대해 뭐라고 토를 달만한 사람들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뱅트손을 새로운 황제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남아서 그를 새로운 황제로 떠받들었다.

    그러나 정당한 황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를 떠난 후였다.

    미래에 대한 아무런 전망도 없음에도 마지막 한 가닥 기대를 가지고 황도에 남아있던 관리들과 귀족들이 뱅트손의 황제 선언을 기점으로 황도를 떠나서 제국 남부로 향한 것이다.

    그래서 헤아려보면 뱅트손을 지지하며 남은 사람들은 과거 뱅트손 파벌에 속한 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이외에는 원래 뱅트손 공작 가문과 관련된 관리들 약간이 전부였다.

    그러나 뱅트손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조각조각 흩어진 채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다른 세력들을 모조리 제압하면 되는 일이었다.

    스케티와의 전투에서 겪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그의 세력은 아직 건재했다.

    아니, 군사력은 오히려 더 강해졌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의 재정을 갉아먹던 대규모 용병 부대를 해산하고, 대신 영지병들의 장비와 훈련에 투자했기 때문이었다.

    남겨둔 용병 부대는 실력과 충성심이 동시에 증명된 천인대 몇 개가 다였다.

    겉으로 보기에 뱅트손은 스케티와 전투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가 잃은 병력은 대부분 용병 부대였다.

    돈으로 끌어모은 병사들을 잃은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숙련된 병사들이기는 했지만 믿을 수는 없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뱅트손은 멀리 보기로 했다.

    다시 한번 대규모 원정을 하려면 적어도 몇 년이 걸릴 판이니, 그동안 놀고먹을 수밖에 없는 용병들은 해고하고 영지민에 대한 훈련을 시작한 것이다.

    일년에 몇 주의 훈련을 받는 대가로 약간의 수고비를 지급하고 갑옷과 무기까지 지급하는 새로운 체계를 만드는 중이었다.

    이것은 군사력 강화 이외에도 내부 정치에도 유용했다.

    급증하는 영지군의 규모에 질려버린 귀족들은 더욱 고분고분해지고 있었고, 치안 역시 개선되는 중이었다.

    어떻게 평가해도 지금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앞으로도 괜찮을 것 같았다.

    거의 내전 수준으로 숙청과 반발이 잇따르고 있는 스케티를 생각해 보면 더욱 그랬다.

    황금관을 앞에 놓고 상념에 잠긴 그에게 오르기손이 면담을 원한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원정 중에 능력을 증명한 오르기손은 뱅트손의 유력한 측근 중의 하나로 부상했다.

    뱅트손은 그에게 치안 문제를 담당하도록 했고, 뱅트손의 기대대로 지금까지는 제법 잘해오고 있었다.

    뱅트손 앞에 모습을 드러낸 오르기손은 약간 흥분한 상태였다.

    평소의 그가 얼마나 냉철한 모습으로 있는지 알고 있는 자가 본다면 무엇인가 큰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금방 알아챌 정도였다.

    “황제 폐하. 아무래도 이 일은 급하게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 무례를 무릅쓰고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내가 휴식을 하는 시간임을 알고 있음에도 면담을 요청했다면 그만큼 급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겠지. 말하라. 오르기손 경.”

    “아루스 남작과 그의 기사 10명이 모두 살해당했습니다. 같이 움직였던 백인대 역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범인은 얼마 전에 회의에서 언급되었던 자로 사망한 아루스 남작은 그를 추적 중이었습니다.”

    “잠깐! 오르기손 경. 지금 범인이 한 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믿을 수 없는 보고였다.

    한 사람이 기사 10명과 일반 병사 백 명을 죽였다는 이야기였다.

    그것도 상단의 경비로 있던 용병들까지 살해하며 돌아다니는 미친 기사를 잡기 위해 충분한 준비까지 하고 추적 중인 병력을 말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자는 진짜 얼마 되지 않는다.

    뱅트손이 거인족을 흉내내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거인 기사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혹시 실력 있는 거인족 전사가 기습을 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뱅트손의 기억에 있는 아루스 남작은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

    야망있고 실력이 뛰어난 귀족이었고, 그의 휘하에 있는 기사들 역시 충분히 제 몫을 할만한 사람들이었다 .

    보급도 거의 없었던 후퇴 작전에서도 그가 거느린 병력은 엄격한 군기를 유지했었다.

    기습을 당해서 어이없게 죽을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 하고 있나?”

    “마침 근처에서 재편성 중인 용병 부대가 있어서 출동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재편성 중인 용병 부대라면 황제 직할령 바로 외곽에 있는 천인대 아닌가? 요새를 지키기 위해 차출했다던?”

    “그렇습니다. 살아남은 용병 부대 몇을 섞어서 재편성 중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직할령 근처에서의 대규모 병력 이동이라서 폐하께 허락을 받고 움직였어야 했는데 용병 부대 지휘관들의 의욕이 지나쳤던 모양입니다. 이것은 치안을 맡은 제게 책임이 있습니다. 부디 저를 책해 주시고 그들은 용서해 주시옵서소.”

    용서를 구하기는 했지만 이것이 형식적인 절차라는 것을 뱅트손도 오르기손도 알고 있었다 .

    이것은 직할령 근처에서 함부로 병력을 이동하는 것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일 뿐이다.

    지금 진짜 중요한 것은 직할령 근처에서 거인족 기사를 방불케 하는 실력을 가진 미친놈이 돌아다닌다는 것이었다.

    그런 자가 궁성에라도 뛰어들면 심각한 사태가 벌어진다.

    뱅트손의 목숨이야 별 문제가 없겠지만, 위신의 손상은 막을 수 없다.

    불과 얼마 전에 스스로 황제가 되었던 뱅트손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일개 살인자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황제라니!

    엉뚱한 생각을 하는 자가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불과 하루가 지난 후, 다른 의미로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 미친 살인자에게 출동한 용병 부대가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은 것이다.

    백여 명의 필수요원만 요새에 남긴 채 출동한 천인대는 불과 십여 명의 생존자만을 남긴 채 모두 죽어 버렸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달려간 요새의 병사들은 현장의 처참함 모습에 구토를 할 정도였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넋을 놓고 있던 생존자들은 뒤늦게 달려온 동료들에게 그 미친 살인자가 이동한 방향이 황궁 쪽임을 알려 주었다.

    그 이후로는 오르기손을 위시한 귀족들의 몫이었다.

    황제의 위신이 아니라 목숨을 걱정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패닉에 빠진 오르기손은 허겁지겁 기사와 병사들을 끌어다가 궁성 곳곳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기마병으로 구성된 병력이 미친 살인자를 찾기 위해 출동했다.

    감당할 수 없는 적을 찾아야 할 기마병들은 두려움에 가득 찬 눈빛을 숨기지 못한 채 억지로 밖으로 나갔다.

    과연 제대로 정찰을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던 뱅트손은 잊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악몽을 떠올렸다.

    홀로 천인대를 몰살시킨 자라고?

    그런 자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생각을 해도 그런 자가 인간일 수는 없었다.

    3백 년 전에 황제가 되겠다고 다투던 대귀족들간의 내전은 엉뚱한 존재의 등장으로 끝이 나 버렸다고 한다.

    대귀족들을 모두 제압했다던 괴물 말이다.

    그 존재가 선제후 제도를 세우고 제국을 암중에서 조정했었다.

    그렇지.

    그런 괴물이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졌을 리가 없지.

    뱅트손은 자신이 너무 성급했음을 인정했다.

    황도에 만들어 놓았던 덫은 진작에 해체해 버렸고, 공작성이었던 궁전에는 아예 설치하지도 않았다.

    아직 남아 있는 것은 거인족을 흉내 내어서 만들어낸 거인 기사들뿐이었다.

    그리고 몇 가지 무기들 정도.

    가능할까?

    뱅트손은 크게 숨을 쉬었다.

    역시 궁전에서 적을 기다리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뱅트손은 궁전 안에 있는 기사들, 특히 거인 기사들을 모두 소집했다.

    오랫동안 준비해 온 것을 써먹을 순간이었다.

    *

    살아남은 병사들의 증언은 정확했다.

    가짜 몸은 병사들의 증언대로 뱅트손의 황궁을 향해 도로를 따라 움직였다.

    처음에는 걸어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말을 빼앗아 탈 수 있었다.

    말을 타고 가짜 몸을 찾기 위해 나왔던 기마병들은 말을 헌납하고 자신의 목숨도 헌납했다.

    가짜 몸의 뒤에 열 마리가 넘는 말이 따라오는 상황이 되자 기마병들은 더 이상 가까지 접근하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면서 가짜 몸의 위치를 전파하기만 했다.

    가짜 몸도 그들의 행동을 딱히 막지는 않았다 .

    그냥 지켜보다가 너무 가까이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칼을 던져서 죽일 뿐, 일부로 쫓아가지는 않았다.

    변화가 일어난 것은 궁전에 가까이 접근했을 때였다 .

    기사로 이루어진 일단의 기마부대가 등장한 것이다.

    그들의 뒤에는 거인 기사의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발리스타를 실은 마차의 행렬이 그 뒤를 따라왔다.

    그 뒤로도 천인대 2개에 달하는 병력이 몰려왔다.

    모두 세습 영지병으로 구성된 정예병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활과 쇠뇌로 무장한 상태였다.

    단 한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 출동한 병력으로는 지나치게 과한 규모였다.

    그러나 뱅트손은 그마저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3백년 전의 대귀족들이 거느렸던 병력이 이보다 적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당시의 대귀족들에게 없던 무기가 존재했다.

    거인 기사.

    신비를 접한 자들을 동원해서 만들어낸 가문의 역작이었다.

    거인족 전사와 비교해도 꿀릴 것이 없다고 자부했다.

    특히, 그의 명령이라면 불 속이라도 뛰어들고 절벽에서라도 뛰어내릴 자들이라는 점에서 거인족 전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이 정도라면 가능할 것이라고.

    뱅트손은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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