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갈림길
포를라에서 비엘리까지 일주일이 걸렸다는 말은 제대로 된 전투가 없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심지어 우리는 진격하던 중간에 펠트리아를 수복하기까지 했다.
프리시오 공작군과의 전투는 전투가 아니라 토벌이었고, 일방적인 추격전이었던 것이다.
내가 볼 때 프리시오 공작군은 싸울 의지 자체가 없었다.
그들은 어서 공작령으로 복귀하기만을 원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약탈한 재화를 포기하지 못했다.
펠트리아에서 그리고, 비엘리에서 약탈한 재화를 선박에 싣느라고 시간을 지체한 것이 그들의 결정적인 실책이 되어 버렸다.
후퇴하던 수송선 중 일부가 비엘리 인근에서 따라잡히고 만 것이다.
싸우려면 충분히 싸울만한 숫자의 전투함이 있었음에도 도망가기에 급급했던 프리시오 공작군은 따라잡힌 수송선을 위해 시간을 벌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반면에 전공을 세우기 위해 눈이 시뻘게져서 날뛰던 우리쪽 귀족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적함에 접근해서 공격을 퍼부었다.
어떻게든 도망치려던 수송선도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화공으로 인해 돛이 불에 타고, 다수의 전투함으로 둘러싸이자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수송선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던 병사들 역시 그대로 포로가 되어 버렸다.
백병전도 없이 수송선째 나포한 덕분에 엄청난 숫자의 병사들이 포로가 된 것이다.
내가 보기에 프리시오 공작군은 전사자와 포로를 합쳐서 적어도 30%는 되는 손실을 입은 것 같았다.
이 정도의 피해라면 프리시오 공작군이 후퇴하다가 다시 공격을 해온다는 선택지는 지워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피해를 본 이상 적어도 3년 정도는 해상 전투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변경백들과의 문제까지 고려한다면 그 기간을 좀 더 늘려잡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는 비엘리 앞바다에서의 전투가 끝난 후 추격을 멈추고 섬국가 연합군과 그들의 동맹이 승리했음을 선언했다.
승리 후의 뒤처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전공에 따른 작위의 수여를 나중으로 미루지 않고 약식이나마 즉시 시행했다.
포를라와 펠트리아 국왕들도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약속했던 황금을 아낌없이 풀었다.
그리고 일반적인 전리품뿐 아니라 포로로 잡은 프리시오 공작군의 병사들 역시 귀족들에게 전리품으로 분배되었다.
복구를 위한 일손이 부족했던 섬나라의 귀족들 입장에서 젊고 튼튼한 남자 포로는 횡재나 다름없다고들 했다.
섬이라서 도망도 치지 못한다면서 신이 나서 떠드는 모습을 보니 포로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대충 예상이 되었다.
줄줄이 밧줄에 묶여서 끌려가는 포로들을 보고 있는 내게 한 사람이 접근해왔다.
“윌리엄 백작 각하.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요?”
“말씀 낮추십시오. 국왕 전하.”
내 말에 비엘리의 새로운 국왕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비엘리의 살아남은 귀족 중 하나였다.
비엘리 출신 중에서는 가장 많은 병사를 거느리고 있다는 이유로 비엘리의 왕으로 선출된 것이다.
“국왕은 무슨. 어제까지 남작이었습니다. 내 것도 아닌 전투함 두 척을 지휘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국왕이 되라고 하다니. 그냥 허수아비 하나 세워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국왕은 국왕입니다. 세력이야 천천히 키우면 됩니다.”
“그것도 만만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렇지요.”
“무슨 말씀이신지?”
“새로 비엘리의 귀족이 된 자들 중 일부가 사략함대를 운영하자며 자기들끼리 작당하고 있습니다. 쿠나 왕국 출신인 귀족들이 주축인데 다른 자들도 흥미를 보이더군요.”
나는 어이가 없었다.
해적질을 하겠다고?
남부 해상 교역로의 중심지에 자리잡은 자들이?
미친놈들인가?
“지금은 프리시오 공작령만 공격하겠다고 하지만, 약탈에 맛이 들리면 손쉬운 목표를 노리기 마련입니다. 결국은 가까운 곳에 있는 상선에 손을 대고 말겁니다.”
다행히 비엘리의 왕으로 추대된 자는 제법 시야가 넓었다.
나는 그의 의견에 동의하며 칼마르가 힘을 실어줄 수 있음을 암시했다.
“프리시오 공작이 당하고만 있을 사람도 아니니 저들의 계획대로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엘리에도 다리클리프의 용병 사무소가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다리클리프에서 조만간 다시 용병사무소를 열도록 조언을 건네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윌리엄 백작.”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전직 남작 현직 국왕의 모습을 보니, 이 사람의 원래 목표가 이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비엘리는 생각보다 쓸만한 국왕을 선출한 모양이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활동할 용병의 숫자를 좀 더 늘려야겠다.
*
프리시오 공작의 원정군이 후퇴하기 한참 전,
프리시오 공작이 남부 해상 교역망을 장악하기 위해 원정군을 파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한 가지 엄청난 소문이 귀족들을 강타했다.
뱅트손 공작이 자신이 황제임을 선언하고 스스로 자신의 머리에 황금관을 썼다는 소문이었다.
그것은 모든 귀족들에게 충격이었다.
근 3백 년간 내려온 전통과 관례가 한순간에 무너진 것이다.
물론, 황도에서 공작들끼리 전투를 벌였을 때, 선거후 제도가 끝장이 났음은 모두에게 명백했다.
그러나 오랜 기간의 평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지막 미련을 버리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사실상의 내전으로 선제후들이 연달아 죽어나가는 상황에서도 그랬다.
아직은 선제후를 내보낼 수 있는 공작 집안이 남아있으니 어떻게든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조차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스스로 황제가 된 선제후가 등장한 이상, 이제는 마지막 미련까지도 버릴 때가 된 것이다.
프리시오 공작이 황제의 위에 오르겠다고 결심한 것도 그래서였다.
물론 뱅트손처럼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머리에 황금관을 얹어주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황금관을 머리에 쓰다니 얼마나 채신머리없는 짓인지.
프리시오 공작은 충분한 명분과 주변의 추대로 자신이 황제임을 선포할 작정이었다.
그래서 제국의 황제가 되어달라며 휘하의 귀족들이 몰려와서 강권하고, 하급 귀족과 재산이 있는 유력자들이 연명으로 호소문을 발표하는 연극을 거의 한 달에 걸쳐서 진행했다.
결혼 동맹이 진행 중인 왕국들에서 보내온 사절단 역시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도 명색이 황제인데 외부에서의 인정이 있다면 더 좋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고서도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되어서 변경백들에게도 지지를 요청했다.
다 같은 선상에 있었던 선제후들끼리 경쟁한다면 누구에게 황제로서의 정통성이 있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 점에 있어서는 아무래도 뱅트손이 가장 유리했다.
그는 황도를 점거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프리시오 공작은 변경백들의 지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제국의 경계를 지키는 자들이 지지하는 황제라니!
이보다 더한 정통성은 없지 않은가 말이다.
게다가 변경백들이 거느린 정예병 역시 탐이 났다.
뱅트손과 스케티는 수만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전투를 벌이면서 온갖 실수와 무능을 거듭하다 병력을 말아먹었다.
그 꼴을 지켜보던 프리시오 공작은 대군의 원정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영지전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휘하 귀족과 병사들 역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도 인정했다.
그러니 앞으로의 전투를 생각한다면 대규모 전투에 대한 전문가를 어디선가 데려오든가 아니면 병사의 생명을 수업료로 치르면서 배워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변경백의 군대는 기대할 만했다.
주변 왕국들과 크고 작은 분쟁을 계속해왔기 때문이다.
지휘관들은 전투에 익숙하고, 병사들 역시 정예병이다.
그들의 도움만 받을 수 있다면 정말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변경백들이 프리시오 공작의 요청을 거부한 것이다.
아니, 거부 정도가 아니라 프리시오 공작을 반역자 취급하며 병력을 동원해서 위력시위를 하는 변경백조차 있을 정도로 적대적이었다.
이것은 프리시오 공작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었다.
“이 자들이 왜 이런 멍청한 짓을 하는 거지? 자신들의 영지를! 그들의 병사들을! 내 지원없이도 지금처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가 그자들의 목줄을 죄면 당장에 굶주려야 할 자들이 어디서 감히 이빨을 드러내!”
프리시오 공작은 자신의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같은 반열에 서 있던 선제후인 리딕슨조차 부하처럼 다루어왔고, 지금은 그의 가문을 아예 휘하의 귀족으로 흡수해 버린 그였다.
적어도 제국 서부에서는 황제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변경백들이 반기를 들다니!
“바로 그 점 때문이 아닐까요?”
분노한 프리시오 공작에게 입을 연 것은 가신들 중 하나인 웨이트였다.
그는 측근들끼리의 회의에서 고정멤버나 다름없는 자로 주변 왕국의 정세에 대해 밝았다.
“무슨 소리인가? 웨이트 경.”
“공작 전하께서 상업적인 교류를 막아 버리면 변경백들이 군대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그들도 잘 알 겁니다. 그런데 공작께서 주변 왕국들과 결혼 동맹을 진행 중이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들은 공작 전하의 황제 선언을 지지하기 위한 사절단까지 파견했습니다. 사절단에 속한 자들이 돌아다니면서 떠드는 가벼운 입을 생각하면 변경백들이 결혼 동맹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된 것입니다. 변경백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지금까지 적으로 싸워온 자들과 공작 전하께서 동맹을 맺는 것이니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겠지요.”
웨이트의 말에 프리시오 공작은 일단 말을 멈췄다.
프리시오 공작은 화가 난다고 해서 생각을 멈추고 기분대로 떠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리는 사람도 아니다.
그는 웨이트를 비롯한 측근들에게 과거의 일을 상기시켰다.
“경들은 모두 결혼 동맹이 유용할 것이라고 주장했었지. 나 역시 경들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런데 이제와서 변경백들과의 문제가 생길 것 같다고 과거의 결정에 대해 비난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나? 대안을 내놔야 할 것 아닌가?”
프리시오 공작의 말에 웨이트는 잠시 자신이 주장이 불러올 파장을 고려해 보았다.
그리고 아무래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제국에 속한 자들끼리 싸우는 내전이 여기서도 벌어질 모양이었다.
“여러 왕국들과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변경백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결혼 동맹을 철회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결혼 동맹을 철회한다면 변경백들과의 마찰은 비교도 할 수 없는 충돌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목줄을 죄면 변경백들은 말려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국 외부의 왕국들은 아닙니다. 그들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계속 그들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여야 할 것입니다. 아마 영원히 이 땅에 못 박혀서 살아야 되겠지요. 제국의 재통일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될 겁니다.”
웨이트의 주장은 명확했다.
그는 변경백들을 버리고 외부의 왕국들과 손을 잡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제국의 공작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다.
그러나 황제라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황제라면 어떨까?
프리시오 공작은 자신이 갈림길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