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88화 (188/248)
  • 188. 손쉬운 승리의 결과

    그리고 내 직감은 현실이 되었다.

    불과 며칠 후에 제국의 변경백들과 프리시오 공작간의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식이 포를라에도 전해진 것이다.

    처음에는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지금 당장 프리시오 공작의 원정군을 모조리 바다에 수장시키자는 주장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움직일 수 있는 함선이라면 전투함이든 일반 함선이든 상관하지 말고 모조리 동원해야 합니다. 도망갈 생각으로 가득 찬 자들이니 싸우지 못할 겁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용감한 병사라도 후퇴할 때는 겁쟁이가 됩니다. 당장에 공격합시다!”

    “펠트리아도 비엘리도 텅텅 비울 겁니다. 본래 상륙해서 적을 공격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법인데, 이번에는 걱정할 것도 없을 겁니다.”

    가장 적극적인 자들은 전공에 따라 황금의 무게가 달라지는 바다 건너 왕국군 소속의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일단 바다에만 나가면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처럼 서둘렀다.

    그들의 주장은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러나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펠트리아의 왕족과 귀족들이 그랬다.

    그들은 적극적인 공세를 주장하는 여러 귀족들의 의견에 침묵을 지켰다.

    황금을 뿌리며 전의를 북돋우던 이전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심지어 크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바다 건너에서 온 다른 왕국 소속의 귀족들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약간 달라지기까지 했다.

    나는 그들의 복잡한 속내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펠트리아는 자신들의 섬을 빼앗기는 사태를 두려워하는 중이었다.

    본거지를 잃고 도망친 자들이니 작은 가능성이라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저런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고위 귀족이라면, 또는 외국인이라도 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정보가 밝은 귀족이라면 변경백의 군대와 충돌한 이상 바다로 원정나온 공작군의 후퇴를 기정사실로 생각할 것이다.

    얼마나 빠르게 후퇴하느냐의 문제일 뿐 조만간 본토로 돌아가는 것은 확정되었다고 간주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변경백들의 군대 때문이다.

    제국에서 변경백은 국경선을 지키는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영주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상당한 정도의 자치권을 가진 대신 국경을 지킬 의무를 짊어진 자들이다.

    제국의 남부와 동부는 바다를 접하고 있어서 변경백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바다가 곧 국경이고 장벽인 셈이다.

    북부는 온통 산이고 척박한 곳이라서 경계조차 명확하지 않다.

    다들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나 할까.

    그러나 제국 서부는 다르다.

    풍요롭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람이 살기에 나쁘지는 않은 땅이고 이웃하고 있는 왕국들의 규모도 상당하다.

    아무리 제국이 우위에 있다고 해도 주변 왕국들과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고, 가끔은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도 한다.

    개개의 변경백이 거느린 군대가 적으면 2천 명이고 많으면 5천 명인데, 그 정도면 이미 상당한 규모다.

    게다가 국경을 따라 죽 늘어선 변경백’들’의 숫자가 15명은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1, 2만 정도는 충분히 외부로 동원할 수 있다.

    그것도 전투에 경험이 많은 정예병으로 말이다.

    그것이 바로 프리시오 공작군이 최대한 빨리 후퇴하리라는 근거였다.

    설마 두 군데서 전선을 열고 싸우는 미친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우선순위는 바다보다 육지가 먼저일 테고.

    그렇다면 프리시오 공작군이 이미 점령한 두 개의 섬을 유지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 당연해진다.

    바로 여기서 질문이 하나 튀어나온다.

    펠트리아와 비엘리.

    그 두 개의 섬이 수복된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이지?

    누가 그 섬을 다시 지배하게 되는 걸까?

    가난한 왕국의 가난한 귀족이라고 하더라도 명색이 귀족이고, 태어나면서부터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교육받은 이들이다.

    제국에 비해서 교육의 수준이 조악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통치자로서의 그들의 본질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왕국의 가난한 귀족이라는 지위보다는 남부 해상 교역망의 중심지인 섬나라에 자리잡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은 다시 생각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능력만 된다면 왕족과 귀족이 몰살하다시피 한 비엘리는 물론이고, 펠트리아도 충분히 노려봄직하다.

    어쨌든 그곳의 주인들은 본거지를 잃고 밀려나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명분이고, 동맹세력이다.

    그리고 강력한 전투함을 10척이나 거느린 제국의 백작이라면 꽤 괜찮은 동맹이 되어 줄 수 있다.

    내게 가장 먼저 온 자는 펠트리아의 국왕이었다.

    “도와주십시오. 윌리엄 백작.”

    펠트리아의 왕은 왕세자와 함께 공개리에 나를 방문했다.

    포를라에 있는 자들이라면 모두 다 보라는 공개 시위였다.

    그들의 섬을 떠날 때만 해도 국왕이라는 느낌이 흘러 넘치던 자였는데, 그동안 마음고생과 몸고생이 너무 심했는지 지금은 삐쩍 마른 몸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지배자의 눈빛.

    그는 아직 그것을 잃지 않았다.

    자신이 펠트리아의 지배자라는 확신이 아직 그대로였다.

    그런 자와 펠트리아를 두고 싸우는 것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다.

    저런 눈을 한 자는 마음이 꺾이기 전까지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기꺼이 그의 손을 잡아주기로 했다.

    “펠트리아의 권리는 정당한 소유자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다리클리프가 피를 흘렸고, 그들의 동맹인 칼마르 역시 함께 피를 흘렸습니다. 국왕께서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칼마르의 지지는 언제나 정당한 소유자에게 향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백작. 펠트리아는 칼마르의 우정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펠트리아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펠트리아의 공개적인 행보가 가져온 파급효과는 상당했다.

    해상 교역망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칼마르가 펠트리아의 국왕을 지지한다는 선언은 아직 별생각이 없던 귀족들의 머리를 강하게 후려쳤다.

    수복하는 섬의 주인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 공개적으로 부상한 것이다.

    머리가 돌아가는 이들이야 진작에 자기들끼리 물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상당했다.

    그들은 전공을 세우고 황금을 받을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을 뿐 수복하는 섬을 자신이 차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던 자들이었다.

    당장에 여론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귀족들의 눈이 탐욕으로 물드는 것이 실시간으로 보일 정도였다.

    밀려나기는 했지만 아직 힘이 남아있는 주인이 눈을 부라리며 권리를 주장하는 펠트리아에는 손을 대기 힘들다.

    그렇지만 비엘리는 그렇지않다.

    탐욕의 대상으로 비엘리가 떠오른 것이다.

    비엘리의 생존자들은 금방 곤경에 빠져버렸다.

    섬나라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국가였다.

    원래라면 펠트리아처럼 상당한 힘이 남아있었어야 했다.

    그러나 기습으로 인해 국왕과 고위 귀족들까지 모조리 전멸했고, 기껏해야 남작 몇 명과 외부로 나가있던 수백의 병사가 다였다.

    그들이 운영하는 함선도 3척에 불과했다.

    기껏해야 그정도가 비엘리의 주인임을 주장할 수 있는 자들의 전부였다.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에는 지나치게 미약한 힘이었다.

    비엘리는커녕 거래처에 깔아놓은 외상대금조차 회수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정도다.

    결국 탐욕이 지나쳐 살기까지 흐르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나섰다.

    자중지란이 일어나면 이길 전투도 지는 법이다.

    나는 즉시 포를라의 국왕을 통해 모든 귀족들을 소집했다.

    내가 걱정하는 상황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포를라와 펠트리아의 국왕들 역시 내게 힘을 실어주었다.

    두 명의 국왕을 뒤에 두고 나는 이권의 조절에 나섰다.

    “펠트리아의 수복이 눈앞에 있습니다. 펠트리아의 국왕께서는 전공에 따른 황금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귀족들은 침묵을 지켰다.

    이게 본론이 아니라는 것을 다들 아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곧장 말을 이었다.

    “펠트리아 다음은 비엘리의 수복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지금 비엘리의 정당한 주인이 없습니다. 비엘리를 위해 전투에 나서는 우리를 위한 황금을 약속해 줄 수 있는 자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비엘리의 국왕과 후계자들은 모두 전사했습니다. 귀족들 중에 살아남은 자 역시 손에 꼽을 정도밖에 안 남았습니다. 비엘리의 백성들은 대부분이 죽었고, 살아남은 자는 모조리 끌려갔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비엘리는 빈 섬입니다.”

    말은 부드럽게 했지만, 나는 기세를 끌어 올리며 좌중의 귀족들을 압박했다.

    내 눈에서는 헛소리를 하면 몇 명이라도 죽여 버리겠다는 살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지나친 욕심으로 인해 우리끼리 분열하고, 서로의 목숨까지 노리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은 절대 사양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엘리 자체를 전공에 대한 포상으로 삼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곳에 모인 귀족들은 한 척, 혹은 두 척에서 많게는 다섯 척까지 전투함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전공에 따라 서열을 매기고 20명의 귀족에게 비엘리의 귀족 작위를 부여할 생각입니다. 그들은 비엘리의 생존 귀족과 함께 비엘리의 귀족으로 권한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할 말이 있는 자는 하라는 식으로 내가 말을 멈추자 곧장 질문이 튀어나왔다.

    질문을 한 자를 보니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고, 얼굴에는 오래된 흉터가 있는 귀족이었다.

    외강내유.

    본보기로 삼기에 적당해 보였다.

    “누가 합의를 했다는 것입니까?”

    “포를라, 펠트리아, 그리고 비엘리의 남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설득을 하러 그들을 방문했을 때, 비엘리의 살아남은 귀족들은 암살로 인해 벌써 한 명이 죽은 후였다.

    내게는 오히려 좋은 상황이었다.

    아무리 비엘리가 탐이 난다고 해도 자기들끼리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실감했을 테니까.

    내가 제시한 이득보다는 눈에 보이는 위협이 그들을 설득한 셈이다.

    “그렇다면 누가 전공을 판단한다는 겁니까?”

    “내가 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믿고······”

    떠들던 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를 향해 걸어갔다.

    한걸음 한걸음 걸을 때마다 강철로 된 신발에서 나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딱딱딱딱.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소음이었다.

    가까이 가면서 차가운 바람이 그를 스치고 지나가게 했다.

    그리고 염동력으로 그를 눌렀다.

    점점 더 세게.

    아마 짓눌리는 느낌에 두려움이 몇 배로 늘어나지 않을까?

    나는 그의 코앞에서 멈췄다.

    내게 압도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내 시선을 피하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의 얼굴은 땀투성이였다.

    “우리가 아니라 당신 혼자겠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전력을 보존해서 무사히 후퇴할 수 있을까?”

    “...”

    “적들 사이에 분열을 심으면 되겠지. 추격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도록 하면 돼. 큰 다툼도 필요 없지. 하루나 이틀 정도만 추격을 늦춰도 충분할 거야.”

    내 말속에 담긴 의미를 깨달은 흉터는 자신도 모르게 주저앉았다.

    그는 내려다보는 내 시선 아래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호소했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나는 그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우며 으르렁거렸다.

    “일단 믿어주지. 그러나 동료들까지 설득하려면 정말 용맹스럽게 싸워야 할걸.”

    그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질문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출진은 그 즉시 이루어졌다.

    그리고 비엘리를 수복하기까지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