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68화 (168/248)

168. 창고 습격

전투에 있어서의 격렬함이라는 것은 양쪽의 기세나 공격력이 엇비슷해야 일어나는 법이다.

아니면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는 약자가 마지막으로 필사적인 저항을 시도하거나.

그런 의미에서 밤이 오기 전에 벌어졌던 낮의 전투는 별로 격렬하지 않았다.

공작군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무리지어 왔다가 무리지어 죽어나갔다.

반면에 연합자치령의 병사들은 활쏘기 연습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이런 뜻밖의 사태가 벌어진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아무리 전체적인 규모에서 공작군이 수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첫날의 공격에 동원된 공작군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과 1만 남짓.

그것도 한 방면으로만 공격이 진행되었다.

이러면 수적인 우위를 가진 것이 아니다.

준비를 잘해 놓은 군대에게 들이박는 일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닌데다가 숫자까지 적으니 공격측이 일방적으로 죽어나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공작군은 목책 앞에 도달하기도 전에 투석기에서 날아온 돌덩어리에 맞았고, 빗발치는 날아오는 화살에 죽어갔다.

그리고 누가 뭐 하는 병사인지 대충 구분이 될 정도부터는 쇠뇌에 의한 저격에 시달렸다.

조금이라도 튀는 병사는, 그러니까 선임이라고 할 수 있는 병사는 무조건 날아오는 쇠뇌살에 노출되었다.

목소리를 높이고, 심지어 폭력까지 쓰면서 병사들을 단도리하던 고참병이 저격을 피해 몸을 낮추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러면서 조금 시간이 지나자 결국은 공작군의 조직력까지 문제가 생겨 버렸다.

중간중간 파여있는 구덩이를 피하다가 흩어진 대열은 다시 원상복구도 하지 못했고, 심지어 그냥 무리지어 목책까지 도달해 버린 병사들도 있었다.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그렇게 오합지졸이 되어버린 병사들을 사람 키의 두 배는 되는 목책 뒤의 발판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연합자치령군이 살살 상대해 줄 이유가 있을 리가 있나.

전황은 일방적이었고, 공작군은 많은 사상자를 남긴 채 걸어온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 했다.

반나절쯤 진행된 전투로 공작군은 적어도 수천 명의 희생자가 나버렸다.

그렇게 양쪽 다 충분히 피맛을 본 후에야 내가 출발할 수 있었다.

출발까지는 어려움이 많았다.

당연하다는 듯이 기마부대의 장대한 돌격을 상정하고 있던 지휘부의 귀족들은 불을 다룬다는 수상한 마법사를 포함하여 불과 5명의 인원으로 적진을 가로지르겠다는 말을 듣자마자 발작을 일으켰다.

그러나 내게 기마부대는 오히려 발목에 매달아 놓은 모래주머니와 비슷했다.

소수의 결사대라면 적의 눈을 피해 움직일 수 있지만 1천에 달하는 기마부대라니!

얼마 가지도 않아서 적들 사이에 돈좌되어서 전멸하는 그림이 그려진다.

더구나 기마부대의 절반 이상이 귀족과 기사라는 것을 감안하면 기마부대를 계속 험하게 굴리는 것도 곤란했다.

아무리 전공과 명예에 굶주린 사람이라고 해도 죽을 고비에 몇 번 몰리다 보면 신체뿐 아니라 정신도 어딘가 고장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고장난 부분이 나에 대한 원망이나 적대감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는 점을 언제나 유의하고 있었다.

“내가 감이 아주 좋다는 것은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겁니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면 어디에 적이 있고 어디로 가야 안전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전쟁터에서는 너무도 유리한 재능이지요. 그러니까 몇 명 안되는 인원으로 움직이는 것이 오히려 더 안전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여러분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윌리엄 백작 각하의 말대로 된다고 하더라도 식량창고에 불을 지르면 모두의 눈에 그대로 드러날 것 아닙니까? 식량 창고에서 여기까지 오는 중간에 있는 공작군의 숫자가 적게 잡아서 1만입니다. 과연 탈출이 가능하겠습니까? 백작 각하께서는 본인의 안전에 대해 좀 더 신경을 쓰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탈출은 분명 문제가 될 겁니다.”

그러나 반대는 예상보다 격렬했다.

특히 과거 막시밀리안 공작 계열의 귀족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했다.

그들은 전투의 선봉에 섰던 공작이 죽고 난 후 벌어진 아수라장을 겪어 보았기 때문에 또 그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결국 나는 어느 정도 타협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도 할 일을 줘야 했다.

“물론 탈출 과정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지적입니다. 그래서 부탁이 있습니다. 혹시, 만약 중간에 도움이 필요하다면 기마대의 출격을 요청할 생각입니다. 출진 대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기마대의 출진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윌리엄 백작의 의견이 괜찮아 보입니다. 화재 후의 야습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몇 사람이 도망갈 수 있는 정도의 혼란이 아니라 잘하면 아예 한 쪽 면을 밀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내 제안은 화재를 신호로 한 전면적인 야습으로 확장되어 버렸다.

낮의 맛보기 전투에 이은 야습이라면 괜찮은 순서라는 생각에 나 역시 동의했다.

그제서야 마법사 피요트르를 부를 수 있었다.

그는 낮의 전투에서도 열외로 빼두었다.

눈치가 빠른 자라면 뭔가 따로 시킬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겠지만, 그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파웰 상단에서 겪어본 그는 어딘가 나사가 빠진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불려온 피요트르는 내 기억과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뭐랄까 학식있는 스승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경망하고 자기중심적이던 성격이 완전히 사라졌는지 점잖은 태도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윌리엄 백작께 불의 마법사 피요트르가 경의를 담아 고개를 숙입니다.”

같이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내가 아주 무례한 자가 될 것 같은 압박이 그의 말에서 느껴졌다.

나는 그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넬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 작전의 대강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자신을 따로 필요로 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기다리고 있었다면서 기꺼이 도와주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이 과거와 달리 많이 달라져서 창고 하나쯤 태우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 되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정중하고 예의바르며 친절한 피요트르라니!

정말 어떻게 이렇게까지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어쨌든 운이 좋은 변화였기에 나는 별다른 걱정없이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밤은 금방이었다.

공작군과 연합자치령의 군대 사이에는 넓은 공간이 비어 있었고, 그 뒤로는 공작군의 백인대가 드문드문 방진을 치고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몇 개의 백인대를 지나야 비로소 1만에 달하는 병력이 진을 치고 있는 곳에 도달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진짜 별것 아니었다.

공작군이 따로 정찰병을 운영하는 것도 아니어서 방진에 틀어박혀 있는 자들만 경계하면 되었다.

오히려 낮의 전투 이후에도 아직 죽지않고 방치되어 있는 공작군의 병사들이 문제였다.

이들이 고함이라도 지른다면 혹시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들을 하나하나 확인사살을 하면서 지나간다는 것도 웃긴 일이다.

그런 식으로 하다가는 해가 뜰 때까지 공백지대를 지나가지도 못한다.

결국 우리는 부상병의 소심함을 믿고 그냥 지나가야 했다.

중간에 물을 요구하며 고함을 지르는 부상병이 몇 있기는 했지만 공작군 중에서 신경쓰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방치된 부상병들은 그대로 죽어갔다.

우리는 방치된 부상병 사이를 지났고, 여러 백인대의 방진 사이를 지났고, 결국은 1만 명씩 주둔한 공작군의 주둔지 사이의 공백지를 지나갔다.

여기까지 왔을 때 나는 작전의 성공을 예상했다.

공작군은 모두 주둔지에 틀어박혀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쉴새없이 정찰대를 돌리는 우리와 비교한다면 정찰대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수준이었다.

정찰대의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할 필요도 없어서 이동 속도도 빨랐다.

결국 두 시간도 되지 않아서 창고 주변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창고는 거대한 게르형식의 천막이었다.

제대로 된 건물을 만들기에는 무리니까 나무로 골격을 잡고 천으로 벽을 세운 게르 형식으로 만드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다.

이상한 것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지.

50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웃긴 것은 창고 주변에 있는 병사들은 20명 정도에 불과했다는 것이었다.

미니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여기까지 같이 온 호위기사 겸 특공대의 대원이 물어왔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창고 안에 사람이 너무 많아. 밖에 있는 자는 20명 정도에 불과한데 안에는 50명이 넘어. 이건 대놓고 함정을 파 놓은 것인데?”

“대놓고 함정을 파놓은 것은 아니지요. 저 창고 안에 몇 명의 병사가 있는지 누가 어떻게 파악을 합니까? 저들은 만약을 가정한 습격을 잘 대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피요트르가 끼어들어서 내 말을 정정해 주었다.

생각해 보면 그의 말이 맞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나 어떻게 할지는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결정하기도 전에 공작군이 먼저 움직였다.

외부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의 태도가 이상해졌다.

그들은 고개를 들더니 숨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마치 냄새를 맡는 것처럼.

내 두뇌는 달아오른 냄비에 손을 덴 것보다 더 격렬하게 반응했다.

수인족이다!

진작에 생각해 내야 했다.

아르보그 공작군에 거인족은 물론 수인족까지 종군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고, 얼마 전에 전투를 벌이며 거인족과 수인족까지 목을 쳐 댔으면서도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고 있었다니!

이럴 때면 내가 나와 같은 인간으로만 가득 찬 행성에서 전생을 살아온 한계를 느끼게 된다.

나는 스스로에게 한심함을 느끼며 바람을 등지고 적에게 돌진해 들어갔다.

“피요트르 창고를 태워!”

물론 우리의 목적은 잊지 않았다.

나와 함께 온 기사들 역시 내 움직임에 따라 곧장 반응해서 내 뒤를 따라 적에게 돌격했다.

*

블레인은 창고 안에 있었다.

지금 공작군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가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만약 창고 안에 있는 식량을 잃게 된다면 공작군은 굶어죽지 전에 후퇴해야 할 판이었다.

헤필드에서 연합자치령의 병사들이 얼마나 꼼꼼하게 창고를 태웠는지 외곽에서는 건질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창고 구역의 안쪽은 아직도 불에 타고 있다.

아마 며칠은 더 탈 것 같았다.

물을 끼얹고 심지어 흙을 가져다가 부어도 그때뿐이었다.

조금만 시선을 돌려도 다시 불이 살아나서 미친 듯이 날뛴다.

창고 구역의 안쪽에서 불을 끄다가 화재에 휘말려서 죽은 자들만 해도 몇백 명은 될 정도였다.

100대의 수레에 싣고 이곳까지 끌고 온 식량도 불에 탄 창고에서 간신히 수습해온 분량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 언제 얼마나 가져올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이곳에 있는 식량이 소중한 것이다.

원래는 시간도 끌고 시선도 돌리기 위해 이곳에 있는 연합자치령군에게 던져준 미끼 부대였는데, 미끼를 안 물어 버려서 부대도 식량도 건재했다.

덕분에 기회가 생겼다.

공작령에서 실어 올 식량이 도착할 시기는 빨라도 아직 일주일 후다.

그때까지 이곳의 식량을 지켜야 했다.

그래서 블레인은 전면적인 공격은 일주일 후 식량이 도착하는대로 시작하자고 제안했지만 아스워드는 그 시간이면 나무로 된 목책 따위는 다 뽑아다가 장작으로 만들어도 되겠다면서 당장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두 사람의 주장은 평행선을 달렸고, 결국 각자 알아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고 말았다.

그 결과가 낮의 전투였다,

그리고 블리인이 이곳에 있는 이유였다 .

블레인인 연합자치령의 군대가 후방 한참 뒤에 있는 이곳까지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이 일주일 후에나 움직인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직속 부하들과 함께 여기까지 물러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바로 배반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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