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42화 (142/248)

142. 그의 배후는 뱅트손

*

“이 미친놈이! 근본 없는 평민 주제에!”

고프리는 시의회에서 당한 모욕과 협박에 이성을 잃을 정도였다.

뱅트손과의 관계는 최후의 순간까지 밝혀져서는 안 되는 비밀이었다.

만약 자신이 뱅트손과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이 까발려지면 감옥으로 직행이다.

그리고 며칠 내로 집안 남자들의 목은 줄줄이 교수대에 매달리고 재산은 몰수될 것이다.

그런데 윌리엄이 증거도 없이 이를 대놓고 언급한 것이다.

사실상 너를 죽이겠다는 협박이나 다름없는 짓이다.

고프리는 얼굴을 굳히고 증거를 가져오라고, 누명을 씌우지 말라고 고함을 쳤지만, 지금까지의 당당했던 모습과는 다른 얼굴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직접 코앞에서 공개적으로 압박해오는 협박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두려웠다.

그로서는 버티는 것이 한계였다.

그래서 윌리엄이 모두의 환송을 받으며 시의회를 떠나자마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폭발해 버린 것이다.

그는 시의회에 있는 자신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이성을 잃고 폭주해 버렸다.

입에서는 계속 상스러운 욕설을 쏟아내고, 손에 집이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졌다.

의자를 들어서 던지고, 탁자를 넘어뜨린 후 황동으로 된 촛대를 망치삼아 휘둘렀다.

나중에는 벽에 걸려있던 그림까지 찢어버렸다.

잘 꾸며진 응접실 하나가 박살이 나는 데에는 그렇게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고프리는 엉망이 된 응접실에서 벌렁 뒤로 누워버렸다.

응접실의 천창은 아직 깔끔했다.

그제서야 격앙되었던 기분이 가라앉고 제정신이 돌아왔다.

머리도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그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자신이 무척 어리석은 일을 했다는 것에 동의했다.

이렇게 이성을 잃고 날뛰다니 반성해야 할 일이었다.

더구나 증거 운운하며 변명을 하다니!

아무리 당황했다고는 하지만 병신짓을 했다.

오히려 당당하게 윌리엄과 손을 잡고 있는 자는 스케티가 아니냐며 역으로 공격을 했어야 했는데!

만약 윌리엄이 움직일 수 있는 시의회의 의원이 몇 명만 있었어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조사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동료 의원들의 발언을 뒤로 하고 감옥으로 직행을 했을지도?

그리고 자신이 약한 모습을 보인 이상 앞으로 윌리엄 편에 서서 자신을 물어뜯는 의원이 등장하는 것도 기정사실이다.

시의회의 의원들만큼 권력의 향배에 대해 눈치가 빠른 자들이 없으니 말이다.

아직은 시의회의 의원을 의혹만으로 내치기에는 윌리엄의 권위가 약하고 칼마르에 내린 뿌리가 얕았다.

그래서 오늘은 서로 간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돌아갔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이대로 몇 년의 시간만 흘러도 윌리엄에 대한 공격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칼마르의 백작 리네아처럼.

고프리는 자신에게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자들은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칼마르 백작가와의 유대를 빌미로 칼마르에 점점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칼마르 백작가의 가신으로 눌러앉은 외지인들을 몰아내려고 했지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첫 번째 목표였던 윌리엄조차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

그는 본인이 직접 시의회로 와서 자신이 그렇게 쉬운 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갔다.

게다가 그런 자의 손에 전쟁터에서 갓 돌아온 1천 명의 용병이 들려 있는 것이다.

고프리는 두려움을 느꼈다.

지금까지 칼마르의 백작은 유력자들을 숙청하더라도 증거와 명분이 있어야 움직였다.

그러나 지금은 전과 다른 환경이다.

황제도 선제후도 없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증거와 명분이 있어야 움직일까?

심지어 저 윌리엄이?

“고프리 의원. 잠시 이야기를 좀 하지.”

천장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고프리를 부르며 응접실에 들어오는 자가 있었다.

시의회의 의장인 옌센이었다.

그는 엉망이 된 응접실을 보고 잠깐 멈칫했지만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조용한 것을 보니 생각이 정리된 모양이군.”

“예. 의장님.”

고프리는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결심이 섰으니 더 이상 누워 있을 필요가 없었다.

“어떻게 할 텐가?”

“리네아가 죽는 것을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있던가, 그게 아니라면 오늘 당장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움직입시다.”

옌센은 고프리의 말에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고프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강조했다.

“오늘 윌리엄을 보았지 않습니까? 그는 오늘 당장이라도 움직일 자입니다. 리네아 백작의 죽음이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다가는 손도 쓰지 못하고 당할 겁니다.”

그제서야 옌센은 고프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윌리엄의 존재가 변수인 것이다.

모두가 의식을 잃은 리네아를 보면서 결정을 못내리고 전전긍긍하고 있었지만 시의회로 쳐들어온 윌리암은 달랐다.

그는 정치를 아는 자였다.

“연락을 해야겠군.”

“저 역시 준비를 하도록 하지요.”

고프리는 옌센이 연락선을 보내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을 호출하는 동안 자신의 상단에서 머무르고 있는 기사들을 준비시키기로 했다.

그들은 뱅트손 공작이 보내 준 기사들이었다.

사실 고프리가 칼마르 백작 대신 뱅트손 공작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공작이라고 해도 거래의 편의도 봐주고, 정보도 주고받는 거래 상대자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칼마르의 상인들이라면 거래처와 당연히 하는 일이었다.

누구도 이런 거래를 배반이라거나 간첩행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프리는 황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뱅트손 공작과 손을 잡고 칼마르를 팔아넘길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는 칼마르가 혼자서 세력을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공작도 아니고 백작 주제에 돈이 좀 있다고 해서 주변의 견제를 뿌리치고 왕국을 건설할 수 있을까?

그의 결론은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칼마르와 함께 쓸려나가기 보다는 자신을 비싸게 사줄 만한 자를 물색했고, 뱅트손이 가장 값을 높게 쳐줬기에 그와 함께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시의회의 의장인 옌센 역시 자신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는 것을 알게 되자 새삼 자신의 결론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확신은 뱅트손이 자신에게 보내준 30명의 기사를 보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뱅트손이 보내준 기사들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일반 기사 몇 명은 간단하게 상대할 수 있는 규격 외의 존재들이었다.

사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기사이기만 해도 보통 존재는 아니다.

30명의 일반 기사만으로도 꽤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내부에서 호응하는 병력만 충분하다면 웬만한 영지의 영주성을 공략하는 것은 별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작은 도시 정도는 기습으로 점령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칼마르 백작성을 공략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마스터 요한을 필두로 한 기사 전력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가능하지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프리는 뱅트손이 보내준 30명의 기사라면 칼마르 백작성이라도 별 문제가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직접 상단으로 이동했다.

*

본격적으로 내부의 유력자들을 숙청하기에 앞서 시의회를 방문한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시의회의 의원들을 모두, 적어도 대부분은 죽여야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고 있던 나는 시의회를 방문하고 난 후 더 이상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 작위박탈에 대한 결의안이 만장일치라고 해서 이 사람들이 무슨 속셈인 걸까 하고 궁금해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대부분의 시의회 의원들은 나와 대립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적어도 리네아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기 전까지는 무엇이든 행동을 취할 생각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사실 내가 시의회에 들어설 때만 해도 험악했던 분위기였지만 고프리 의원과 설전을 벌이면서 분위기가 꽤나 가라앉았고, 설전을 마치고 다른 의원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백작 각하라고 호칭하며 정중하게 예의를 차릴 정도로 우호적인 분위기로 변했다.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나에 대한 결의안은 소수의 주동 아래에서 벼락치기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신들도 특별히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한다.

시의회 의장인 옌센의 주도하에 벌어진 일이고, 리네아도 정신을 잃은 상태여서 대다수 의원들은 복지부동하며 대세에 영합했다는 설명이었다.

즉, 강경한 소수의 의견에 끌려간 것이라면서 책임을 미뤄버린 것이다.

이 정도 분위기라면 강경한 소수의 의원 몇 명만 제거하면, 그 이후는 내가 하기 나름이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리고 그 강경한 소수 몇 명의 제거는 빠를수록 좋겠다.

괜히 시간을 끌어봐야 시끄러워지고 이놈 저놈 끼어들어서 복잡해지기만 한다.

누가 문제인지 파악한 이상 오늘이라도 제거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고프리 의원이 그의 상단으로 갔습니다.”

“옌센 의장의 상단에 속한 연락선이 출항했습니다.”

시의회에서 돌아오자마자 내가 새로 뿌려놓은 탐보망에서 몇 시간도 안되어서 다급하게 정보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상단주가 자신의 상단에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상단의 연락선이 급한 일이 있어서 출항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모두 ‘강경한 소수’에 속한 사람들이고 오늘 충돌이 일어나서 마음이 급해졌다면 당연한 일은 더 이상 당연한 일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넋놓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는 것보다는 헛발길질을 해도 까탈스럽게 구는 것이 차라리 낫다.

“안처트. 연락선을 잡아오게. 노렌. 병력을 준비시켜 주게. 고프리의 상단으로 가겠다. 그리고 엘리아슨에게 전령을 보내서 영지군은 출동 대기 하라고 해 주게. 만약 경비대가 움직이면 제압해야 하니까.”

용병대장들의 지시에 따라 전령들이 튀어나갔다.

그런데 이럴 때는 휴대폰이 정말 아쉽기는 하다.

적과 조우하기 전까지는 귀머거리에 장님이니 문제는 문제다.

나는 소수의 경호 기사만 대동하고 출발했다.

고프리의 상단은 항구 외곽의 장원이었다.

항구에 가까이 위치한 상단이 3층이나 4층으로 건물을 올려서 사용하는 것과 비교하면, 절대로 규모가 작은 편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가 오래된 상단이라는 느낌을 준다.

고프리의 상단에 가는 동안 계속 용병들이 합류해 왔다.

내가 지휘했던 자들 이외에도 주둔지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용병부대에서 일부가 내 지휘에 따르겠다며 합류해 온 것이다.

결국 나는 고프리의 상단 근처에 갔을 때 7백명에 달하는 용병과 함께 하고 있었다.

전령이 달려왔다.

“상단에서 사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40명 정도 됩니다.”

“늦지는 않은 모양이군.”

과연 얼마가지 않아서 고프리의 상단에서 나온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웬 거인이야?”

노렌은 어이가 없다는 중얼거렸다.

과연 노렌의 말대로 덩치가 남다른 자들이었다.

대충 30명 정도.

그리고 저 덩치, 저 갑옷.

황도에서 본적이 있는 자들이었다.

황도에 있던 뱅트손의 저택에서 나온 기사들.

나는 개조한 철봉을 손에 쥐었다.

묵직한 느낌이 괜찮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