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함리 백작성 전투
성문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거대한 성문을 떠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영주성같이 규모가 좀 된다 싶은 성에는 생각보다 많은 성문들이 있다.
크기도 다양하고 용도도 다양하다.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출구를 여러 방향으로 만들어 놓은 경우도 있고, 문화적인 이유로 별개의 문을 만들어 놓기도 한다.
쓰레기나 오물만 드나드는 문이라든가 장례 행렬을 위해 별도로 만든 문이 그런 경우다.
그리고 그중에는 일반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숨겨진 문도 있다.
대개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인데 외부에서는 알아보지 못하게 위장을 해 놓았고, 내부에는 별도의 건물로 숨겨놓는다.
비밀리에 외부로 드나드는 것이 목적으로 크기는 사람 한둘 지나다니기 딱 좋을 정도다.
전령이 나가기도 하고, 정찰병이 드나들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은 야습을 위한 병력이 비밀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10명의 기사와 2백 명의 병력.
대를 이어 봉사해온 영지병이 주축으로 충성심과 실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들이었다.
*
수백 개의 붉은 점이 성벽 옆에 바글바글 모여 있다면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야습을 위해 대기 중인 함리 백작군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겠지?
야습을 예상하고 해가 진 후 함리 백작성을 한바퀴 쭉 도니까 미니맵에 붉은 점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미니맵을 보고 파악한 성의 구조에도 비밀문으로 의심할만한 쪽문이 있었다.
이러면 어디로 공격을 해야할지 그냥 알려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곧 내 직속 병력을 호출했다.
내 직속 병력은 하나같이 정예라서 야습 준비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백작님. 모두 준비 마치고 대기 중입니다.”
“좋아. 적들이 야습을 마치고 돌아갈 때 들이치자고. 기다리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을 걸세. 병력의 절반은 외성 성문, 절반은 내성으로. 확실히 구분하도록 하고.”
“예. 믿으셔도 됩니다.”
내가 이끄는 직속 병력의 대부분은 용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칼마르에서부터 끌고 다녔던 자들이 중심이다.
용병 대장부터 말단 용병까지 돈값은 제대로 해낸다고 믿을 수 있는 자들이다.
물론 용병만 데리고 다니는 것은 아니다.
용병은 막시밀리안 공작과의 전투가 결정된 이후에 합류한 것이고, 그 전부터 이미 30여 명이나 되는 칼마르 기사들과 함께 다니고 있었다.
오늘도 내 경호기사 겸 돌격대의 일원으로 10명이 나를 따라다닐 예정이었다.
시간이 흘러 달이 높이 뜨고 모두가 잠들었을 시간이 되자 붉은 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적들이 나오는 모양이군.”
내 말에 대기하고 있던 우리쪽 병사들이 야습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자고 있던 용병들을 깨우고, 무기와 갑옷을 다시 한 번 점검한 후 조심스럽게 비밀문이 있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밤이라서 성벽 위에서 보이지는 않겠지만 출성하는 적과 부딪힐 가능성을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성벽과는 조금 거리를 둔 채 몸을 숨겼다.
비밀문을 통해 빠져나온 함리 백작군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이백 명 남짓.
전쟁의 운명을 건 대규모 격돌은 아니고, 그냥 인사나 나눠보자는 규모다.
우리측을 제대로 쉬지 못하게 괴롭히고, 운이 좋아서 한 대 제대로 먹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딱 그 정도의 계획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계획은 어디까지나 계획에 지나지 않는다.
계획과 실행은 전혀 다른 범주에 속한다.
함리 백작군이 비밀문을 통해 나간 후 시간이 조금 흐르자 백작성의 전면 방향에서 소음과 불빛으로 정적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일제히 주변을 밝히고, 연달아 화살이 날아가는 방향을 보아하니 야습을 노리고 갔던 함리 백작군이 우리쪽이 준비해 놓은 매복에 걸려서 일방적으로 털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야습을 예측하고 준비하고 있던 연합자치령의 병사들이 함리 백작군을 제대로 잡아먹은 것이다.
예상대로 야간의 전투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
후퇴하는 함리 백작군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차단당했다.
완전히 대오가 무너진 채 삼삼오오 무리지어 후퇴하던 함리 백작군은 손쉬운 먹이였다.
나는 사로잡은 병사들 중 나이도 어리고 심약해 보이는 병사 하나를 잡고 필요한 정보를 빠르게 뽑아냈다.
이름, 사는 곳, 신분 등 말하기 어렵지 않은 정보였다.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나는 기사들과 함께 비밀문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비밀문을 두들기며 고함을 질렀다.
“열어! 열어 줘!”
“누구야? 암호를 대라고!”
“젠장. 몰라! 조장도 죽고, 기사님도 죽었다고!”
“너는 누군데?”
“3조에 퍼스킨이야! 다리 건너 과수원집 막내 퍼스킨!”
“씨발. 누구 3조에 있는 퍼스킨이라고 아는 놈 있냐? 과수원집 막내라는데?”
“다리 건너 과수원집? 거기 형제가 셋이기는 해.”
“그럼 맞나 보네. 열어!”
비밀문이 열렸다.
바깥쪽으로 열리게 되어 있는 1미터 정도 너비의 비밀문은 두께도 한 뼘이 넘고 철봉으로 보강이 되어 있어서 한 눈에 보기에도 보통 튼튼한 문이 아니었다.
이런 문은 억지로 부수려고 하기보다는 이렇게 열어주는 문을 통과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안전한 방법이다.
“어!”
“고맙군.”
비밀문을 연 병사는 자신의 눈앞에 익숙하지 않는 복장을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감탄사를 내뱉고는 그대로 멍청하게 제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리 건너 과수원집 막내가 판금갑옷을 입고 있을 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아니면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공포에 질려 굳어진 걸까?
나는 칼로 눈앞의 병사를 푹 찔렀다.
두꺼운 면으로 된 갑옷을 입은 병사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병사는 즉사했다.
비밀문을 열었다고 바로 성 안은 아니다.
5미터는 되는 통로를 지나야 하고 통로 밖에 있는 적병의 수도 적지 않았다.
나는 쓰러지는 병사들 옆으로 밀면서 앞으로 전진했다.
그리고 다시 한 명의 적병을 찌르면서 통로를 벗어났다.
내 뒤에 따라오던 기사는 비밀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멀리서 대기하던 용병들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통로 밖에는 비밀 공간을 지키던 병사 몇 명이 대기 중이었다.
그들은 통로에서 나온 나를 보고도 멀뚱멀뚱 바라만보고 있었다.
아직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모르는 적들이 갑자기 비밀문과 연결된 통로에서 판금갑옷을 갖춰 입은 기사가 튀어나오자 잠시 인지부조화가 왔던 모양이다.
야습에 실패한 우리 편이 귀환하는 중이니까 저 기사도 우리편이구나.
아마 그런 인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뒤에서 곧장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연달아 나오고 급기야는 내가 지휘하는 용병들까지 나오기 시작하자 뒤늦게 상황 파악이 된 모양이다.
“적이다! 적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내 앞에서 있는 뒤늦게 고함을 지르는 적병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고함을 지른 병사는 계속 소리치지 못하고 목을 부여잡으며 비틀거렸다.
나는 그를 힘껏 밀어차서 쓰러뜨리고 주변을 살폈다.
우리가 통로에서 나온 곳은 두 길 정도의 담장을 쌓아서 두른 작은 공간이었다.
숨겨져 있던 작은 공간에 대기하고 있던 함리 백작의 몇 안 되는 기사와 병사들은 순식간에 정리가 되었다.
이런 곳은 외부의 시선을 피하기에는 좋지만 이렇게 역으로 탈취당하면 재앙이 되는 곳이다.
“신호탄을 올려라. 오늘 밤에 아예 끝내 버리자.”
내 말에 옆에 있던 용병 하사관이 곧장 폭죽이 달린 화살을 쏘아 올렸다.
도화선에 불이 붙은 채 하늘로 올라가던 화살은 화려한 불꽃을 남기며 폭발했다.
그리고 다시 한 개가 더 하늘로 올라가서 폭발했다.
이제 신호를 본 연합 자치령의 나머지 병력이 야간 공격을 시행할 것이다.
구태여 열심히 공격하지 않아도 된다.
함리 백작의 병사들이 내부로 들어온 우리에게 집중하지 않게 해 주면 그만이다.
그들의 시선이 흩어져 있는 동안 우리는 성문을 점거하고 열어 버릴 생각이었다.
나는 신호 화살이 하늘로 올라가자마자 출입문을 열고 담 밖으로 나갔다.
성문 까지는 대략 삼사백 미터 정도?
짧은 거리는 아니다.
더구나 한밤중에 적군 사이를 헤치고 지나간 후 성문까지 장악할 것을 생각한다면 무리한 작전이 맞다.
그러나 나는 밤을 낮처럼 볼 수 있고, 내가 지휘하는 용병들은 실전을 여러 번 치러본 정예병이다.
밤에는 정신을 제대로 차린 정예병이 훨씬 유리하다.
지금처럼 적과 우리편을 제대로 구별하기 힘든 밤에는 더욱 그렇다.
나는 제일 앞에 서서 달렸다.
눈 앞에 걸리적 거리는 적을 단칼에 베어내며 성문을 향해 달렸다.
성벽 밖에서는 엄청난 함성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고함을 지르고 나팔을 불고 불화살이 하늘로 날았다.
함리 백작군이 성 내부에 신경을 쓰지 못하도록 미리 약속한 행동이었다.
그사이에 우리는 성문을 장악해야 한다!
어둠 속을 달리는 우리를 막는 적은 얼마 없었다.
그나마 우리를 막겠다고 나선 함리 백작의 기사는 순식간에 썰려 나갔고 그 모습을 목격한 병사들은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성문에 도착한 순간 압도적인 숫자의 우위로 적을 찍어 누르는 것은 여기까지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성문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숫자만 해도 5백 명은 확실히 넘었다.
아예 여기서 잠을 자고 있었던지 이제서야 잠에서 깨는 병사들로 어수선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만만한 숫자는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기 전에 쓸어버려!”
나는 명령을 내리며 적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심장이 거칠게 고동치며 신경이 극도로 긴장되었다.
압도적으로 강한 힘에 저항할 때의 바로 그 느낌이었다.
이번에는 압도적으로 많은 수인가?
겨우 오백 명이?
그 순간 나는 열이 확 솟는 느낌을 받으며 적을 한꺼번에 보았다.
전후좌우.
적들이 서 있는 모습.
아직 누워 있는 모습.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
무기조차 챙기지 못하고 멍하니 나를 보고 있는 모습.
마치 주변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눈이 생긴 것 같았다.
볼 수 있다면 공격할 수 있다.
그 순간의 나에게는 적이 앞에 있는 것이나 뒤에 있는 것이나 똑같았다.
내 손에 든 칼이 병사들을 향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내리치는 칼날에 내 앞의 병사가 머리를 맞고 뒤로 넘어갔다.
다시 옆으로 휘두르는 칼에 창대가 잘려나가고 옆으로 한 걸음 걸으면서 다시 한 번 더 휘두른 칼에 창을 들이대던 병사의 팔이 잘렸다.
그 자리에서 뒤로 칼을 찔렀다.
뒤에서 나를 잡으려고 하던 병사는 자신의 배를 뚫고 지나간 칼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쓰러졌다.
그대로 칼을 뽑으며 아래에서 위로 휘둘렀다.
앞에서 칼을 들고 나를 내리찍으려던 병사의 턱이 갈라지며 비명을 질렀다.
다시 옆으로 휘두른 칼에 비명을 지르던 머리가 툭 하고 떨어졌다.
목에서 솟구친 나온 피가 분수처럼 뿜으며 주변의 병사들에게 뿌려졌다.
그제서야 공포에 질린 병사들이 다급하게 서로를 짓밟으며 물러서려고 했지만 내 칼은 무심하게 휘둘러질 뿐이었다.
그제서야 함리 백작의 기사 하나가 내게 달려들었다.
더 이상 나를 내버려두면 병사들이 도망칠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에 무턱대고 달려든 모양이다.
판단력이나 책임감은 봐줄만 했지만 실력은 별 것 없었다.
실력은 저쪽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기사가 훨씬 낫다.
황도에서 보았던 덩치 큰 기사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자였다.
그는 병사들 사이에서 유달리 솟아오른 자신의 머리통에 투구를 쓰더니 나를 향해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들린 철창을 보며 나는 칼을 앞으로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