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12화 (112/248)

112. 함리 백작령 전투

*

“함리 백작.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칼마르의 백작 윌리엄 입니다. 바르거 막시밀리안 공작의 계승식에 왔을 때는 아르보그 공작과 만나느라고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린 것 같군요.”

윌리엄의 인사말에 숨어있는 비수는 날카로웠다.

계승 귀족답게 윌리엄의 인사말을 이해한 함리는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윌리엄은 바르거가 공작위를 계승하는 예식에 왔었다면서 엉뚱하게 아르보그 공작과 만났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것은 대놓고 비아냥대는 것이다.

바르거가 아니라 아르보그 공작이 이 땅의 실제 주인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당신은 아르보그 공작을 위해 싸우러 나왔느냐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빙빙 돌려서 하는 모욕과 질문에 함리 백작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내 충성은 언제나 막시밀리안 가문을 향할 뿐이다.”

그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서 시시비비를 따져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말이 길어지다가 말실수라도 한다면?

함리 백작은 운 좋게 여자를 잘 잡아서 귀족이 되었다는 뒷공론이 도는 젊은 백작을 절대 경시하지 않았다.

지금도 태연하게 귀족들끼리나 이해할 만한 언어로 자신을 도발하면서 반역자라는 누명을 씌우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저 사람은 귀족 출신도 아니고 교육은 기사 훈련을 받은 것이 다라고 들었다. 아마 약혼이 결정된 이후 여백작의 가신들이 필요한 최소한의 교육은 시켰을 것이다.

그러니 저런 식의 태도는 타고 났다고 봐야 한다.

자신의 입에서 아르보그라는 이름이 한 번만 나와도 어떻게든 자신을 아르보그 공작과 엮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글렌 공작을 죽인 자들이 이제는 막시밀리안 공작 각하를 노리는 것인가? 나는 가장 먼저 그 분께 충성을 맹세한 기사로서 절대로 너희들을 통과시킬 수 없다.”

“선대 막시밀리안 공작을 죽인 자가 바르거 아니었습니까? 함리 백작도 그때 한 손 거든 모양이군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찬탈자에게 가장 먼저 충성을 맹세합니까?”

윌리엄은 함리 백작의 비난을 거짓말이라고 맞받아치지 않았다.

대신 선대 막시밀리안 공작을 죽인 자들 중의 하나가 당신 아니냐는 엄청난 의혹을 제기했다.

원래 중상모략에는 더 심한 중상모략으로 대응하는 것이 정석이다.

당신의 주장은 거짓말이라는 반박보다는 더 큰 거짓말로 물을 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에는 양쪽 다 일말의 진실을 포함하고 있는 내용이라서 돌아가는 상황을 아는 사람들은 약간 당황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병사들은 글자도 읽을 줄 모르는 까막눈이다.

그들은 너무도 엄청난 소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오가는 것을 들으며 열심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술렁거리는 함리 백작의 병사들을 보면서 윌리엄은 미소를 숨겨야 했다.

병사들의 전투의지를 낮추려고 한 말인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돈을 받고 전쟁터를 전전하는 용병조차도 적극적으로 전투에 나서는 것은 꺼려한다.

이기는 싸움이나 약탈이라면 가장 먼저 뛰어들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 분전하는 것 따위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경우라면 오히려 영지병이 더 낫다.

자신의 영지를 지키려는 영지병은 간혹 기대 이상으로 잘 싸우기도 하니까.

그래서 윌리엄은 영지병이 이 전투를 자신들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높은 분들의 사정 때문에 재수없게 휘말린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함리 역시 막연하게나마 윌리엄의 의도를 이해했다.

그러나 그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성벽은 높고, 식량은 충분했다.

성문을 닫고 버티는 것이라면 전투의지가 약해진 영지병이라도 한 사람 몫은 충분히 한다.

더구나 전투의지는 싸우다 보면 저절로 생기는 것이다.

주변의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꼴을 본다면 살아 남기 위해서라도 정신을 차릴 것이다.

게다가 바르거의 요구는 간단했다.

한 달만 시간을 끌어달라는 것.

그 정도라면 기사와 용병만으로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사기가 낮은 것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상대방의 도발에 대한 대답으로 그의 휘하에 있는 기사 하나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 이후로 양측의 기사들이 한 명씩 나와서 경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로 승패를 주고 받으며 자신들의 이름을 알렸다.

이런 일에 나서기에는 이제 이름값이 너무 커져버린 윌리엄은 기사 대결에 뛰어드는 대신 천천히 김리 백작성을 둘러보았다.

*

잘 만들어진 성이었다.

높이는 10미터 정도.

사다리가 아니면 벽을 타고 올라가기 힘들 정도로 경사도 가파르다.

단점이라면 성문이 한 겹이고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과 해자가 성벽의 일부만 두르고 있다는 정도.

모든 성이 그렇듯 점령하기 쉽지 않은 성이다.

그러나 세상에 점령되지 않은 성이 있던가?

단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베르그렌 경.”

“예. 윌리엄 공.”

“경의 병력을 이끌고 성 아래에 있는 마을을 약탈하고 불을 지르도록 하십시오. 성에서 보는 병사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영지민도 거칠게 다뤄서 비명과 울음이 성에 들리도록 해야 합니다. 약탈물과 포로로 잡은 영지민은 성에서 안 보이게 멀리 이동한 후 병력을 좀 붙여서 대기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해가 지는대로 복귀하도록 하십시오.”

내 명령에 베르그렌 남작은 매우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로 내게 반문했다.

“윌리엄 백작 각하. 보급은 부족하지 않습니다. 약탈로 이곳 영지민들의 원한을 살 필요까지는 없지 않겠습니까? 만약 여유분을 축적하기 위함이라면 촌장을 통해 징발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약탈은 목적이 아닙니다. 목적은 성의 영지병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내 말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나고 자란 마을이 세상의 전부인 사람들이 대부분인 시대다.

백작성 주변의 성하마을을 약탈함으로 성 내부의 병사들 중 일부라도 흔들어 보겠다는 것이 내 계획이다.

지금 가능성을 가늠해보는 베르그렌 남작의 생각은 뻔했다.

야습을 위해 나온 병사들을 잡아먹고 역습까지 하겠다는 생각인데 과연 뜻대로 될까?

과연 백작의 생각처럼 성에서 반응 할까?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백작님의 의향을 이해했습니다만 너무 운에 기대는 것은 아닐지 걱정스럽습니다. 특히, 처음부터 성에 틀어박혀 있는 것을 보면 여기서 시간을 좀 끌어보자는 것 같은데 야습까지 나오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좀 무리한 희망 아니겠습니까?”

“남작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함리 백작도 그렇고, 함리 백작령의 영지민들도 그렇고 큰 착각을 하나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적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다른 영지들을 지날 때 충돌이 없었던 것은 그들이 무방비 영지를 선언했기 때문이지 그들을 배려해서가 아닙니다. 사기도 별로 좋지 않은데다 전투가 없을 것이라는 기대까지 배신당한 함리의 병사들이 가진 불만을 다독이기 위해서라도 함리 백작은 야습을 감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버티는 것이 불가능할 테니까요.”

*

“이거 돌아가는 꼴이 영 불안한데. 바르거 님이 공작이 되실 때 벌어진 전투는 기사님들끼리 했었고, 우리는 그냥 정리만 했잖아?”

“그랬지. 기사님들 싸움에 휘말린 녀석들도 있기는 했지만.”

“그거야 진짜 재수없는 녀석들이었고. 그런데 지금은 영지병이 몽땅 동원되서 이러고 있단 말이지. 몰려온 놈들은 아예 멀리서 온 놈들이고. 이거 진짜 제대로 붙는 것이 아닌지 몰라.”

“이번에도 기사님들끼리 결정을 보겠지. 낮에도 기사님들끼리 화끈하게 붙더구먼. 게다가 저 놈들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따로 전투도 없었다고 하더라고. 그러면 뭐 뻔한 거지. 높은 분들끼리 적당히 투덕거리다가 자존심 상하지 않은 선에서 결론을 낼 거야.”

“야. 근데 저거 뭐냐?”

“어! 저거 뭐야? 저기 우리 마을 아닌가?”

“조용히 해 봐.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맞네. 비명소리네.”

기사들끼리의 대결이 끝난 후 성벽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함리 백작의 병사들은 멀리서 올라오는 연기를 발견하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연기가 올라오는 곳이 자신들의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쓸만한 것은 다 끌어 냈나?”

“예. 조장. 식기와 도구, 옷하고 침대까지 돈이 될 만한 것은 다 밖으로 내왔습니다.”

“금속으로 된 것은 따로 모아놓도록 해. 그것은 종군 상인들이 직접 거둬 간단다.”

“예.”

“그럼 저기부터 여기까지는 다 불을 질러 버려!”

모닥불을 피우고 있던 병사들이 불 붙은 나무토막을 들고 집 주변을 돌며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불 붙은 나무토막을 집 안으로 던져 넣는 병사도 있었다.

영지민들의 집은 대개 나무와 흙으로 지어진 것이라서 쉽게 불이 붙었다. 지붕까지 불로 휩싸이는 것은 금방이었다.

길에 모아놓은 잡동사니를 배경으로 집들이 타고 있는 모습은 전쟁의 다른 얼굴이었다.

함리 백작성은 애초에 영지민을 수용할 생각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다.

영지군과 성 내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1년 이상 농성할 것을 예상하고 지은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백작성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성하마을에서 사는 영지민들 중 백작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대장장이나 건축가 같은 기술자와 몇 명 안되는 부유한 영지민이 다였다.

나머지는 피난을 가거나 마을에 남아야 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피난보다는 마을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처음부터 전투가 벌어지고 사람들이 죽어나갔다면 그들도 피난을 갔을 것이다.

그러나 글렌 공작이 죽고 연합 자치령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자들은 신사적이었다. 전투 없이 영지를 지나갔고, 필요한 물품은 돈을 내고 구매했다고 한다. 심지어 바르거 막시밀리안 공작에게 불만이 있는 영주들이 합류했다는 말까지 있었다.

그래서 함리 백작령의 사람들은 함리 백작이 저항을 선언했을 때조차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울보르그 지역에 살았던 친척이나 지인이 있는 영지민들은 함리 백작이 저항을 선언했다는 말에 기겁을 하고 피난을 갔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영지민들은 불안한 마음을 한 켠에 밀어두고 돌아가는 상황이나 살핀 후 움직이자며 남은 것이다.

그 결과가 약탈과 방화였다.

“꺄악! 이것은 결혼 반지에요!”

“반지가 안 빠지면 손가락을 잘라!”

“뺄게요! 뺄게요!”

결혼 반지를 빼앗기거나 패물을 강탈당하는 일은 너무 흔했고,

“이것은 조상대대로 내려온 책이야. 제발!”

“그러면 비싸겠네.”

“아악!”

책같은 귀중품은 당연히 빼앗겼다.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가차없이 칼집에 두들겨 맞았다.

그리고.

“안 돼! 안된다. 이 놈들아!”

“금은 압수야. 혹시 모르니까 이 놈 옷을 벗겨봐.”

“안 돼! 억!”

지나치게 반항하는 자들은 그 자리에서 처형당했다.

겁탈과 일률적인 학살만 없을 뿐 있을 것은 다 있는 약탈의 시간이었다.

함리 백작성의 성벽에 있던 영지병들은 그 모든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살아온 마을이 불타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도 불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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