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11화 (111/248)
  • 111. 전쟁은 처음이라서

    바르거 막시밀리안 공작.

    알핀 리딕슨 공작과 비슷한 체급이라고 평가되는 자다.

    두 명의 가장 약한 선제후 중 하나이기도 하다.

    과연 세간의 평가는 틀리지 않아서 가장 약한 두 명 중 다른 하나인 리딕슨 공작은 위기가 닥치자마자 순식간에 세력을 잃고 이스윈 프리시오 공작에게 흡수당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 공작은 버티는 중이다.

    심지어 운이기는 했지만 글렌 공작을 죽이기까지 했다.

    자신이 만만하지 않은 싸움꾼이라는 것을 세상에 과시한 것이다.

    그래선지 리딕슨의 세력을 순식간에 흡수해버린 프리시오 공작과 달리 아르보그 공작은 막시밀리안 공작에 대해 따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아르보그 공작이 지슬리 공작의 잔존 세력에게 산맥에서 발목을 잡혀서 소모전을 치르고 있는 것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꽤나 유화적인 태도였다.

    더구나 나는 아르보그 공작의 손길이 막시밀리안 공작의 파벌 귀족들에게까지 닿아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최소한 몇 명의 영지 귀족은 포섭되어 있다고 본다.

    그런 것까지 생각해 본다면 아르보그 공작이 막시밀리안 공작에게 원하는 바가 따로 있다고 판단해도 지나친 예단은 아닐 것이다.

    “베르그렌 남작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르보그 공작이 막시밀리안에게 원하는 것이 뭘까요?”

    “글쎄요. 윌리엄 백작 각하. 그냥 여력이 안 되는 것이 아닐까요? 전쟁이라는 놈은 사람이든 물자든 가리지 않고 아귀같이 집어삼키는 괴물이라서 말입니다. 아무리 아르보그 공작의 세력이 크다고 해도 두 군데서나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웃해 있는 다른 공작들도 생각해야 할 겁니다.”

    두 개의 전선을 열면 반드시 패배한다.

    양면 전선을 열었던 독일이 그래서 두 번이나 패배했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내 옆에 같이 가고 있던 귀족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법 일리있는 의견을 제시한 내 옆의 귀족은 베르그렌 남작이다.

    글렌 공작의 핵심 참모였던 베르그렌 서기관 말고 그 집안 사람으로 남작령의 영주다.

    베르그렌 서기관이 칼마르와 인접한, 나름 가치있는 영지에 자기 집안 사람이라고 박아두었던 모양인데 운이 없게도 울보르그 지역의 자기파괴적인 영지전과 그 뒤를 이은 칼마르와의 대규모 회전까지 휩쓸려 버렸다.

    그 결과 영지 자체가 완전히 황폐화되어서 베르그렌 남작의 힘으로는 도저히 복구가 힘들게 되었다고 한다.

    글렌 공작가는 문을 닫았고, 귀족 연합의 귀족들은 고리채로 호구 잡을 궁리만 하고 있으니 결국 돈을 벌기위해 살아남은 용병과 영지병을 규합해서 내게 종군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때는 서로 칼을 겨누고 싸웠지만, 그거야 피차 처해있는 입장이 달라서 그런 것이니 따로 유감은 없었다.

    게다가 베르그렌 집안 사람들 자체가 머리가 좋은 것인지 베르그렌 남작 역시 제법 식견이 뛰어났다.

    그래서 옆에 두고 일군의 지휘자 겸 참모로 굴리는 중이었다.

    “일리있어요. 그러면 아르보그 공작이 도와주러 오기 전에 어서 막시밀리안을 정리해야겠군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다들 병력 동원에 너무 소극적이라서 문제입니다.”

    “베이그렌 경은 보지 못했겠지만 연합 자치령의 의회에서 전쟁을 상정하고 예산안을 짜서 알려주니 다들 뒤로 넘어가더군요. 상상도 못 해본 액수가 눈앞에 디밀어지니 거칠게 반응하는 것이 귀족이라도 평민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제대로 된 영주전을 경험해 본 제 입장에서는 그것도 엄청나게 줄이고 줄인 것인데 말입니다.”

    나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연합 자치령의 귀족들이 보인 반응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경험해 보지 못 한 사람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과 물자, 인력을 소모하기 때문이다.

    그 낭비에 가까운 소모는 칼마르도 경험해 본 바가 있다.

    칼마르와 글렌, 양쪽 합쳐서 1만 명도 안 되는 병력이 맞붙은 전쟁에서 소모한 물자가 원래 계획의 30%를 상회했다.

    그나마 양측이 다 함께 한 장소에 모여서 회전을 벌인 덕분에 빠르게 승패가 결정이 나서 그렇지 일반적인 전쟁처럼 시간을 질질 끌었다면 어느 정도의 피해가 났을지 어림잡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

    나중에 의회의 서기들이 용병대장들과 함께 토론한 후 원래 예산보다 최소한 두 배는 더 소모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것도 인명 손실이나 지역의 재건 비용은 제외하고 말이다.

    그 전쟁 이후로 칼마르에서 주전파는 싹 사라져 버렸다.

    5천도 안 되는 병력을 한 달 정도 동원한 것만으로도 재정의 상당 부분이 날아갔다는 사실을 알고 난 사람들은 전쟁을 수단으로 삼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돈이 너무 든다고 해도 전쟁을 안 할 수는 없습니다. 전쟁이 우리에게 갖는 관심이 너무 커서 빠져나갈 수가 없으니까요. 우리가 전쟁을 피해서 도망을 쳐도 끈질기게 따라올 겁니다. 땅을 짊어지고 이사할 수 있다면 모를까 결국은 전쟁과 맞대면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윌리엄 백작 각하. 그래서 귀족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았지만 결국 지출을 승인할 수 밖에 없었겠지요. 막시밀리안의 영지에서 싸우지 않으면 연합 자치령에서 싸워야 하는데 어느 쪽이 우리에게 유리할지는 어린 아이라도 알 겁니다.”

    전쟁을 하겠다는 선언은 막시밀리안쪽이 더 빨랐지만 병력 동원은 우리가 더 빨리할 수 있었다.

    친 글렌파와 반 글렌파로 나뉘어서 전쟁을 준비하다가 그 준비한 것을 가지고 그대로 막시밀리안에게 돌리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산이 집행되는대로 준비한 병력을 이끌고 막시밀리안측을 향해 이동할 수 있었다.

    우리가 현재 이동하는 지역은 막시밀리안 공작 파벌에 속한 귀족인 아딘클리프 남작의 영지다.

    그는 바르거 막시밀리안이 공작 작위를 계승하는 의식을 치를 때 따로 충성을 맹세했던 30여 명의 귀족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연합 자치령에서는 바르거 막시밀리안 공작에 대한 충성 맹세는 그냥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아딘클리프가 선대 막시밀리안 공작과 무척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다.

    선대 막시밀리안 공작과 그 후계자들의 죽음에 아르보그 공작이 관여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바르거 조차도 혼란을 막기 위해 자신이 나섰음을 주장할 뿐 기회만 된다면 아르보그에게 복수하겠다는 의사를 슬쩍슬쩍 드러낸다고 한다.

    그러나 대놓고 아르보그 공작의 지원을 받아서 공작위를 차지한 바르거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입을 다물고 바르거 뒤에 있는 아르보그 공작의 눈치를 살피고 있을 뿐.

    이런 상황이니 아딘클라프 같은 귀족이 바르거 막시밀리안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래서 귀족 연합 자치령은 막시밀리안 공작 파벌의 귀족들 중 상당수를 포섭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결과가 다섯 갈래로 나누어진 공격 부대였다.

    군대는 하나로 뭉쳐야 강하고, 병사의 숫자가 많을 수록 승리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 병법의 상식이다.

    명령권자가 여럿이거나, 외부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패배의 지름길이라는 것도 귀족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귀족 연합 자치령 의회의 서기장을 맡고 있는 베르그렌은 그러한 상식을 깨고 막시밀리안 파벌에 속한 영지 전체를 군대를 거느리고 순회하는 작전을 제시했다.

    그것은 현재 막시밀리안 파벌의 귀족들 대다수가 바르거에 대한 충성심이 없고, 아르보그 공작의 간섭도 싫어했기에 가능한 작전이었다.

    그리고 그 작전에는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영주들을 포섭하기 위해 군대보다 미리 출발한 사절들이었다.

    지역의 유력한 학자도 있고, 귀족가의 차남이나 삼남도 있고, 성직자도 있고, 상인도 있었다.

    막시밀리안 파벌의 귀족들과 관련이 깊은 사람들을 미리 보내서 설득을 한 것이다.

    설득의 내용도 간단했다.

    세상이 변했다.

    이제 황제는 없다. 선거후도 없다.

    바르거는 찬탈자다. 그에 대한 의리나 충성을 말하는 것은 이상하다.

    귀족 연합 자치령은 모든 귀족이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외부의 공격에는 함께 저항하자.

    그래도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면 무방비 영지는 어떤가?

    물론 설득과 함께 약간의 협박도 정중하게 전달했다.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었다.

    울보르그 지역에서 벌어진 참상을 설명하는 것만으로 협박은 충분했다.

    그 결과는 내 생각보다 더 빠르게 현실로 나타났다.

    “인사드립니다. 윌리엄 백작 각하. 잉겐 아딘클리프라고 합니다. 아딘클리프 영주님의 첫째이고 현재 영지군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아딘클리프 영지와 귀족 연합 자치령의 접경지에서 기사 몇 명과 함께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자는 아딘클리프 남작의 장남이었다.

    그는 5천 명이 조금 넘는 병력을 보고 약간 질린 표정이었지만 침착함은 잃지 않았다.

    “반갑습니다. 잉겐 경. 우리가 보낸 사절에 대해 경의 부친께서는 어떤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아딘클리프는 무방비 영지를 선언했습니다. 전투는 없습니다. 필요한 보급은 말씀하십시오. 저희가 공급하겠습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 영지의 주인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만.”

    “안내하겠습니다.”

    무방비 영지는 항복의 다른 형식이다.

    저항없이 길을 내주고, 보급도 공급한다.

    대신 공격이나 약탈, 파괴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공식적으로 항복한 것이 아니니 나중에 상황이 바뀌게 되면 다른 말을 해도 뭐라고 할 수 없다.

    어쨌든 공식적으로 항복한 적은 없으니까.

    영지전에 여러 영지가 얽혀 들어갈 때 싸우기 싫은 영지가 뒤로 빠지면서 선언하는 것인데 이번에 꽤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고 예상하는 중이다.

    바르거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공격까지 하는 것은 좀···..

    이러면서 빼는 귀족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용한 카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렇게 시작부터 무방비 영지를 선언하는 영주가 나올 정도로 호응이 좋을 줄은 몰랐다.

    지나가는 영지들 중 대부분은 무방비 영지를 선언했고, 일부는 아예 우리 쪽에 합류하기도 했다.

    5천이 안 되던 병력이 어느 순간 6천을 넘겨버렸다.

    그러나 전투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막시밀리안 공작의 직할령에 가까이 가게 되자 처음으로 저항하는 영지가 나왔다.

    함리 백작령.

    영주는 고피 함리.

    가장 먼저 바르거 막시밀리안에게 충성한 귀족이었다.

    앞으로 나가서 확인해 보니 과연 바르거의 공작 계승식에서 본 사람이었다.

    그는 6천 명이 넘는 규모의 우리측 병력을 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대충 보아도 3천 명도 안 되는 그의 병력을 믿고 저런 태연자약한 모습을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더구나 기사들의 숫자까지 감안한다면 함리 백작의 패배는 기정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뭔가 따로 믿는 것이라도 있나?

    설마 충성 그 자체에 충성하기 위해 저 많은 목숨을 바치기라도 하겠다는 걸까?

    만약 그런 순진한 생각 때문이라면 나는 그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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